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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불안한 상상 (101/110)


100. 불안한 상상
2023.05.14.


5월. 혜윤은 규칙적으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어린이날만 지나면 여유로워질 줄 알았건만. 장윤의 시선을 궁금해하는 곳들이 속속 생겨난 이유였다. 동화 잡지에서 수필을 연재하게 되었고, 몇 해 전 출간한 동화의 후속작 공개도 코앞이었다.

작가 장혜윤에게 들어오는 제안들은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장혜윤은 장윤만큼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3주간 쉬는 날 며칠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슷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와 산책을 했고, 딱 그 시간만 핸드폰을 만졌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은 날에는 휴식 시간에 지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대부분은 운이 나빴다. 하지만 그랬기에, 연락이 닿으면 날개가 돋친 듯 신이 났다. 지호는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서점에 가서 책 읽었어! 나오기 전에 30분을 망설였어. 살까, 말까. 지난주에 산 책도 아직 안 읽었는데 또 사면 욕심 같고.’


‘와, 혼자 고민 많았겠다. 그리고? 서점 갔다가 뭐 했어?’


‘응. 저녁에는 민주랑 약속이 있었는데…….’

 
쫑알쫑알 쫑알쫑알. 말과 마음이 끊길 줄 모르던 20분. 더 들려달라고 보채고 조르는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만약에 나까지 바빠진다면.’ 지난달에 여러 번 했던 불안한 상상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영화 개봉하면 더 바빠져?’


‘음, 아마도. 당장 내일부터 스케줄이 여러 개라서.’


‘그렇구나…….’


‘한 달 정도는 더 이럴 것 같은데…… 미안.’


‘에이, 미안하기는. 나도 일하느라 바쁜데 뭘.’

 
3주 전, 가족들과 밥을 먹고 단둘이 보내던 하루. 서로의 살결을 살금살금 어루만지며 나누었던 대화. 그날 이후로 지호를 만질 수는 없었다. 물론 볼 수는 있었다. TV만 켜면 나왔으니까.

바로 내일로 다가온 영화 개봉일. 예고편은 수시로 나왔고, 채널을 돌리다 보면 적어도 한두 곳에서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꼭 지금처럼.

혜윤이 리모컨으로 소리를 키웠다. TV 속 지호는 배우들과 인터뷰 중이었다. 적당히 가꿔도 적당함을 모르는 외모. 지호는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아니, 안지호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관복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지금까지 시대극 왜 안 하셨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은 것도 있고요. 좀 더 연기력이 쌓이면 도전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와, 지나치게 겸손하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진행자를 따라 지호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언제나처럼 겸손하고 예의 바른 모습, 절대 그어둔 선을 넘지 않는 반듯함. 혜윤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온 국민이 익숙한 그의 모습이 이제 자신은 낯설어서.

제게는 능청스러운 장난이 많은 남자였다. 어떤 선은 반드시 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대담하게 굴기도 했고. 턱턱. 숨이 가쁘도록 색정적이게.

잠시 그가 농염하게 짓밟던 선들을 떠올렸다. 혜윤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줍은 행복이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오래 누릴 수는 없었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그의 선 주변을 서성이는 건 싫었으니까.

TV 속에서는 지호의 옆자리에 앉은 여배우가 불쑥 마이크를 고쳐 잡고 있었다. 지난번 제 관심을 끌었던 잡지 인터뷰, 그 주인공이었다. 글자가 담아내지 못한 호기가 그녀의 목소리에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지호 씨는 본래 성격이 이렇더라고요. 촬영 내내 이랬어요. 반듯하고, 정중하고. 스탭들이 힘들겠다 싶은 일이면 말없이 싹 해 놓고 가시고.”

“와, 윤소림 씨 목소리가…… 너무 진심이신데요?”

“하하. 맞아요. 사심을 가득 넣었습니다.”

 
진행자와 지호, 여배우를 포함한 5명의 사람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를 냈다. 활짝 핀 꽃처럼 웃던 여배우는 지호의 팔을 톡톡 건드리면서 웃고 있었다. 건드리는 건지, 쓰다듬는 건지 헷갈리긴 했지만.

혜윤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의미 없는 행동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심통이 났다.


“뭐야…… 보는 것도 아까운데 왜 때리고 그래…….”

 
자신의 처지와 너무 비교된 탓이었다.

찰칵-

혜윤이 두 사람의 웃음을 찍었다. 사진과 함께 보낸 그녀의 메시지에서 쾅쾅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샘이 잔뜩 난 아이가 바닥에 발구르기를 하는 것처럼.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랑 즐겁게 웃고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해? 나중에 만나면 주먹으로 퍽퍽 때려야 되나? (오후 9:50)]

 
언제쯤 확인하려나. 아마 아침에 눈을 뜨면 답장이 와 있겠지. 1시에서 3시 사이에 보냈을 테고. 3주 내내 그랬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 들여다본 TV 속에서, 지호는 점잖은 얼굴로 여배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생글생글한 여배우의 시선은 지호를, 집중이 서린 지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향한 채로.


“갑자기 너무…… 보고 싶다.”

 
쪼르륵 기운 빠진 손이 TV를 껐다. 30분 뒤, 잠을 겨우 이긴 눈이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건 핸드폰이었다. 혹시나 하고 봤지만 역시나. 아직 읽지 않은 듯했다.


“장혜윤, 자자. 운 좋으면 내일 목소리 들을지도 모르니까.”

 
결국 잔뜩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

새벽 1시. 지호의 일정 중에 그나마 규칙적인 건 출퇴근 시간이었다. 2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벌써 3주째. 아마 영화가 개봉하는 내일부터는 더 촉박한 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피로에 짓눌린 눈가가 뜨거웠다. 그래도 겨우겨우 눈을 뜨고는 핸드폰을 밝혔다. 이것 또한 3주 내내 이어진 규칙적인 행동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혜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그래봤자 이미 한참 전에 온 메시지일 테지만 말이다.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랑 즐겁게 웃고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해? 나중에 만나면 주먹으로 퍽퍽 때려야 되나? (오후 9:50)]

 


“그러게…… 빨리 만나서 맞았으면 좋겠다.”

“맞았으면 좋겠어? 이야…… 그런 취향일 줄은 몰랐네.”

 
졸음으로 낮아진 목소리와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차 안에서 부딪혔다. 지호가 코웃음을 치며 설설 고개를 저을 때야 의심을 거두는 봉기였다.

지호는 혜윤이 적은 글자들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자음과 모음에도 감정을 꼭꼭 눌러 담는 여자였기에,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났다. 그러다 보면 엄지손가락은 항상 혜윤의 번호 위를 서성였다.

매번 망설였고, 그때마다 참아냈다.

이젠 혜윤의 작업 방식을 잘 아는 탓이었다. 늘 제 일이 끝나는 시간은 혜윤이 가장 깊은 잠을 잘 시간이었다. 잘 자야 다음날 따뜻한 동화를 그릴 수 있겠지. 고개를 쓸쓸하게 주억거렸다.

그때, 차가 신호에 걸린 틈으로 봉기가 핸드폰을 만졌다. 봉기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지호의 핸드폰 화면에 새 메시지가 반짝였다.


“뭐야?”

“그냥 재미있는 인터뷰가 있길래. 보라고.”

 
봉기가 걸걸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처럼 피곤한 눈이면서 뭐가 저리 재밌을까. 지호는 피식거리며 봉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인터뷰의 제목을 보자마자 눈썹이 꿈틀거렸다.

종종 들어본 남자의 이름과 매 순간 품고 사는 여자의 이름이 함께 적힌 제목.

[정규헌 취중 토크 “서점에서 본 장혜윤, 한눈에 반했죠.”]

유명 남배우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었다. 지호의 혀끝이 볼을 깊숙이 찔렀다. 아직 기사는 읽기도 전이건만 입 안에 비린 맛이 돌았기에. 봉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붙기도 했다.


“오늘 많이 피곤해 보여서 홍삼 대신 주는 거야. 읽다 보면 활력이 돌걸?”

“와, 너무 못됐네.”

 
지호는 룸미러로 저를 살피는 봉기를 노려봤다. 하지만 빠르게 시선을 낮추고야 만다.

지금은 더 관심 가는 게 있었으니까. 제목을 누른 뒤에는 곧장 기사를 쭉쭉 내리기도 했다. 제일 자극적인 내용은 제일 하단에 배치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혜윤에 관한 내용은 기사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이상형에 관한 질문인 듯했다.

[……저도 책 읽는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죠. 그 환상을 현실에서 마주한 게 장혜윤 씨 같아요. 서점에서 3번을 봤는데 3번 다 혼자 책을 읽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서점에 갈 때마다 설렜어요. 오늘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와…… 서점이 무서운 곳이었구나.”

“어때? 눈이 딱 떠지지? 잠도 확 깨고. 역시 기운 없을 땐 분노만 한 게 없어요.”

“참 나.”

 
봉기는 운전하는 와중에도 놓치기 아깝다는 듯이 룸미러를 살폈다. ‘정규헌도 요즘 드라마 잘됐지. 잘생겼어,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살살 그를 건드리는 말까지 빼먹지 않았다. 조금씩 달라지는 지호처럼, 봉기 역시 장난이 늘고 있었다.

지호가 조금 전 혜윤의 메시지 창을 다시 띄웠다. 봉기의 말처럼 눈이 딱 떠지고 잠도 확 깨서, 손가락이 제멋대로 그녀의 메시지를 따라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자기도 모르게 남자들 마음 흔들고 다니면 어떻게 해야 해? 나중에 만나면 같이 살아야 되나? (오전 1:13)]

 
보내놓고도 웃음이 났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러고는 다시 기사로 돌아가 남은 이야기들을 읽었다. 정확히는 혜윤과 관련된 부분만.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세요. 그래서 서점에 있는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걸지도 모르죠. 자주 생각해요. 오늘도 마주치면 말 한번 걸어봐야지 하고. 그런데 희한해요. 그런 생각만 하면 그날은 안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읽을수록 얼굴이 뻣뻣하게 굳고야 만다. 남배우의 설렘 같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두어 번쯤 읽을수록 마음을 건드리는 단어 때문이었다.

‘서점에서 3번을 봤는데 3번 다 혼자 책을 읽고 계셨거든요.’ 같은 문장 속 ‘혼자’라는 단어.

혼자.

이 두 글자가 가시처럼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 얼마 전 혜윤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오르자 할퀴어진 이곳저곳이 쓰라렸다.



‘와, 혼자 고민 많았겠다. 그리고? 서점 갔다가 뭐 했어?’


‘응. 저녁에는 민주랑 약속이 있었는데…… 민주 남자친구가 회사 앞으로 데리러 왔다더라고. 그래서 약속 취소하고 집에 왔지.’


‘아…… 그럼 종일 혼자 지냈겠네.’

 
그 통화 속에서도 혼자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었다. 씁쓸한 제 목소리를 달래려는 그녀에게서도 또 한번 되풀이되었고.


‘큭큭. 괜찮아. 나 외동이라 혼자 있는 거 엄청 익숙해.’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씩씩해서, 너무 미안했다. 지호가 이를 질끈 물었다. 깊은 한숨은 삼키고, 대신 짙은 진심을 빠르게 보냈다.


[갑자기 너무 보고 싶다. (오전 1:20)]

 
잠들기 전, 그녀가 읊조린 말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곳에 더 큰 마음이 하나 더 보태진다.


[잘 자. 사랑해. (오전 1:20)]

 
지호가 무거운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에, 홀로 책을 읽고 있는 서점 속 혜윤이 그려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점점 미안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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