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아무 상관 없어요 (102/110)


101. 아무 상관 없어요
2023.05.17.


다음 날. 영화 개봉일에는 지호만 바빴던 게 아니다. 지호는 몸이, 혜윤은 마음이 어수선한 하루였다. 감정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알알이 맛도 제각각이었다.

하루의 시작은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들여다본 핸드폰 속엔, 지호가 새벽에 남기고 간 사랑이 있었기에.


[잘 자. 사랑해. (오전 1:20)]

 
‘사랑해’라는 말속에 담긴 절절한 미안함. 혜윤은 알 리 없었다.


“……정규헌이 누구야?”

 
그랬기에 냉큼 다른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고. 이름을 검색하자 광고에서 여러 번 본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으아…… 책 살까 말까, 30분 동안 들었다 놨다 한 날 본 거 아니야?”

 
또한 창피하기도 했다. 요즘 서점 갈 때 어떤 옷을 입었더라. 최근의 모습들을 곰곰이 곱씹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일 소중한 사람이 건넨 사랑도, 낯선 사람이 보낸 관심도. 이른 아침은 줄곧 마음이 따뜻했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일하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가려던 때.

띠리링-


[혜윤아, 나 갑자기 수업이 잡혔어. 저녁에 영화 못 볼 것 같은데. 내일 봐도 돼? (오후 2:36)]

 
딱 그때부터 다른 감정의 맛이 퍼졌다. 우준은 혜윤의 휴식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쉬움만큼 우준의 미안함도 커 보였기에, 혜윤은 얼른 답장했다. 그 마음을 더 키우지 않도록.


[괜찮아 괜찮아. 그럼 나 혼자 볼게. 궁금해서 빨리 보고 싶어. (오후 2:37)]

 
개봉 당일에 보고 싶은 욕심. 이런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나 싶었다. 답장 속도는 우준도 못지 않았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굽신굽신. 혜윤은 그 글자들에 키득거리며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걸음이 느려지더니 뚝. 엉금엉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집 앞 주차장에 세워진 익숙한 차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와, 대박.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무려 한 달 가까이 지호의 차가 세워져 있던 것이다. 마지막 하루를 자고 간 다음 날에는 봉기가 데리러 왔으니까. 그 기간 동안 차의 몰골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간 방치된 차의 앞 유리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노란 바탕에 빨간색 글씨가 무섭고 위협적이었다. 매일 매일 붙인 건지 얼핏 봐도 십여 개. 정말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산책을 가려던 걸음이 활기를 잃은 것도 동시였다. 혜윤은 우두커니 서서 지저분해진 차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속상했다.

툭- 툭-

손톱으로 떼어보려 해도 쉽지 않고. 결국 다시 집으로 들어가 젖은 수건을 챙겨 나왔다. 다 떼어냈을 땐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그러고는 부랴부랴 영화관에 갔다. 웃음기 없는 영화는 감동이 그득했다. 그 여운을 품고 돌아왔지만 집 안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다. 낮에 경비 아저씨를 못 만난 대가는 또다시 주차 금지 스티커로 돌아와 있었다.


 


“와, 진짜! 너무하네!”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욱신욱신했다.

조금 전 스크린 속 지호가 생각났다. 그곳에서 애절한 눈빛을 주고받던 두 배우가. 어디 그 모습뿐일까. 어젯밤 TV 속에서 지호를 톡톡 건드리던 여배우의 고운 손까지 떠오르고야 만다.

욱신욱신. 손끝보다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뭉툭해진 손이 영화관에서 보낸 메시지 밑에 또 하나의 말풍선을 더했다.


[지호야, 다음에 차 가져가. 외부 차량이라서 오래 못 댄대. (오후 8:55)]

 
툭- 툭-

혜윤은 또 한 번 스티커를 뗐다. 아픈 것도 참고 열심히.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지호의 답장이 일찍 올까 봐.

그럼 또 괜한 투정을 부릴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미안하다고 말하게 만들 것 같았다.

***

개봉한 지 2주가 넘은 날.

지호의 영화는 개봉 18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대체 불가’라거나 ‘독보적’이라는 표현들이 자주 보였다. 믿을 수 없는 기록을 세우고, 스스로 그 기록을 깨고. 혜윤은 내색 없이 놀라운 삶을 사는 지호가 신기했다.

물론 못 본 기간이 한 달 반 가까이 돼가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래도 이젠 마냥 서운하진 않았다. 못 만나는 시간이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우준의 참교육도 한몫했다.


‘주변에 예쁜 여배우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네 건데.’


‘응? 내 거?’


‘……안지호 네 거 아니야?’

 
지난주 혜윤의 카페에서, 우준은 반지를 내려보며 되물었다. 가만히,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뜸 턱을 치켜든 그녀였다. 몸짓처럼 당당한 목소리와 함께.


‘응! 내 거지!’


‘큭큭. 그래. 걔도 자기 거라고 티 내고 싶어서 반지 끼워준 걸 텐데. 쓸데없는 걸로 서운해할 시간 있으면 운동하러 올라와.’

 
단순한 우준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서운함을 싹둑 잘라버린 순간이었다. 그래서 혜윤은 예쁜 여배우와 함께 나오는 지호를 볼 때마다,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쟤는 내 거니까.’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는 귀여운 허세. 이런 생각으로 우쭐거리는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큰 위안이 됐다. 아니, 어쩌면 제일 큰 위안은 오늘 날짜일지도 몰랐다. 5월 31일. 오늘은 혜윤의 동화 작업 마감일이었다.


“으아…… 다 했다! 피곤해.”

 
오늘로써 바빴던 일들도 모두 끝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이 되었던 불안한 상상도 당분간 안녕이라는 뜻이었다. 이제부터는 지호의 연락을 쫄랑쫄랑 기다릴 수 있었고, 연락뿐 아니라 귀가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마지막 날이라 밤을 새운 몸이 축축 늘어졌다. 일단 잠부터 자고, 눈뜨면 어떻게 놀라게 해 줄지 생각해야지. 혜윤은 잠이 한가득한 눈으로 실실 웃었다.

지호는 지금쯤 대구에 있겠지 싶었다. 오늘은 그곳에서 무대인사를 하고 저녁에 회식한다고 했으니까. SNS에는 매일 그의 무대인사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 지호는 전보다 살이 더 빠져 있었다. 많이 지쳐 보이기도 했고.

언제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지만, 혜윤의 눈에는 가라앉은 몸과 마음이 또렷이 보였다.

특히나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더 그랬다. 날이 갈수록 고단함이 읽혔다.


‘오늘도 혼자 서점 갔었어?’


‘아니. 오늘은 백화점! 셔츠 샀어. 요즘 날씨 엄청 좋잖아. 옷도 사고 바깥 구경도 하고 그랬지.’


‘그렇구나…….’


‘지호야,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쇼핑 하자. 서로 옷 봐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아, 급한 거 절대 아니니까 나중에. 아주 아주 한가할 때.’


‘……그래. 그러자.’

 
그래서 그때마다 더 발랄한 목소리를 냈던 혜윤이었다. 제 일상도 집에서 일하거나 혼자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열심히 쫑알쫑알. 그렇게라도 힘을 주고 싶었다. 기분 탓인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한 달 넘게 저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얼른 맛있는 걸 해줘야지. 혜윤은 신난 마음을 안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

11시에 잠에서 깬 혜윤은 몇 시간째 마음이 통통 튀어 올랐다. 드디어 새벽 1시, 늘 이 시간쯤 메시지가 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전화해야지.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붙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했다. 2시가 넘어도 지호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오늘은 조금 늦어지네…….’

 
혜윤이 아쉬운 마음에 리모컨을 들었다. 운이 좋으면 낯선 채널에서 그를 볼 수 있을 테니까. TV를 켠 뒤에 하나하나 채널을 더해갔다. 그리고 겨우 몇 개의 채널을 돌아봤을 무렵,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Rrrr- Rrrr-

메시지가 아닌 전화로. 지호가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으로.

놀라서 동글동글 커진 눈이 몇 초를 보기만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아이고…… 받으시네. 작가님, 주무시고 계셨어요?

 
새벽 2시 반에 봉기와 통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그녀였다.


 

***

혜윤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새벽 3시의 적막을 비웃는 양, 20분 전 봉기의 이야기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만취요?’


‘네. 나도 이렇게 취한 걸 처음 보네. 지호 술 진짜 세거든요. 그런데 자꾸 고집을 부려요. 작가님 집 앞에 내려달라고.’


‘아…… 그럼 오세요. 제가 나갈게요.’


‘아이고, 술 취해서 축 늘어진 남자를 어떻게 부축하려고. 나도 버거운데. 그렇다고 내가 작가님 집 안에 지호를 눕혀주는 것도 조금…… 이상하잖아? 시간도 늦어서.’

 
두 사람은 회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10년을 함께해 놓고 취한 모습을 처음 봤다니. 혜윤은 그런 봉기가 놀라웠지만, 봉기의 놀라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는 지호에게 놀라고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쓰러질 거였으면서도, 회식 장소에서는 취한 티도 안 냈다고. 심지어 차까지도 꼿꼿하게 걸어왔단다. 지호의 만취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까지 보탰다.


‘그럼 제가 지호네 집으로 갈게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괜찮겠어요?’


‘네. 차로 금방이에요.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띵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윤이 익숙한 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더 익숙한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 띠. 띠. 띠. 철커덕-

문이 열리자 느껴지는 술 냄새. 현관 앞에 놓인 신발이 제멋대로였다. 지호와는 둘 다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긴장이 됐다.


‘그런데 나도 잘 몰라서.’


‘뭘요?’


‘취한 걸 본 적이 없으니까, 주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에이, 지호 성격에 주사 같은 건 없을 것 같은데.’

 
집 안으로 들어설수록 술 냄새는 진해졌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발은 굳이 침실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통유리창으로 처연한 어둠이 쏟아지는 거실. 지호는 소파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셔츠 단추가 잔뜩 풀어져 있는 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은 그게 전부다. 혜윤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이 소파에 닿을 듯이 가까워지자 울컥 반가움이 터졌다.


“……진짜 지호 맞네.”

 
무려 한 달 반 만에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찬연한 달빛이 내린 얼굴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진동하는 술 냄새도 잊고, 멍하니 그를 눈에 새겼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미 속눈썹을 잔뜩 괴롭히고 있는데도 안 불편한가 보다.

혜윤은 소파에 걸터앉아 살금살금 머리카락을 빗겼다. 손길이 더해질수록 선명히 보이는 얼굴이 청아했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어서 더 그런가 싶은 순간.


“아…….”

 
혜윤이 작게 입을 벌렸다. 지호가 스르륵 눈을 뜬 채 그녀를 바라봤기에. 그의 한쪽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붙고 있었다.


‘에이, 지호 성격에 주사 같은 건 없을 것 같은데.’


‘응? 성격이랑 주사는 아무 상관 없어요.’

 
작은 가슴속에 봉기의 마지막 말이 되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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