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아기 늑대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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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아기 늑대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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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아기 늑대 잔혹사
2023.05.24.
어떻게든 품 안으로 당기려는 힘이 애처로워 혜윤도 똑같이 지호를 끌어안았다. 손바닥으로 넓은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그렇게 꼭 잡지 않아도 어디 안 간다고.
“내가 널…… 왜 버려. 내 건데.”
늘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웠던 허세였지만 지호는 그 말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피식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지호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미안. 빨리 네 옆으로 못 가서.”
“…….”
“약속 못 지켜서 상처받는 사람 없게 하려다 보니까…… 이렇게 늦어진다. 미안해.”
혜윤의 손이 우뚝 멈추고야 말았다. 그렇게 솔직한 말들을 쏟아냈으면서도, 제일 하고 싶었을 말 한마디를 못 하는 게 안쓰러웠다. 하물며 꿈속이라 믿는 이 순간조차.
혜윤이 빠르게 지호의 뺨을 감쌌다. 애타는 마음은 마주한 시선을 누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온기로만 당겼을 뿐인데도 곧장 제 입술에 닿는 지호를 보면, 그 역시 같은 마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열고 여린 살들을 촉촉하게 적셔 나갔다. 입 안으로 번지는 술기운이 지독하게 얼얼했지만 최대한 담아오려 했다. 그 안에 조금이라도 녹아 있을 불안과 걱정들을. 지호는 그 노력을 얌전히 받아내기만 했다.
마음을 녹이는 움직임과는 달리, 뜨겁게 달라붙는 소리가 습하고 야했다. 천천히 떨어지는 두 입술의 번들거림도. 단추가 모두 풀린 셔츠는 느리게 부풀고 가라앉는 남자의 가슴을 조금도 가려주지 못했다.
혜윤의 시선이 천천히 그 위를 향한다. 달빛을 받은 지호의 입술이 제가 남긴 흔적으로 투명하게 윤이 났다. 줄곧 제 모습을 담고 있었을 눈빛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영화 보면…… 이럴 때 남자 주인공이 하는 말 있잖아.”
입도 맞췄고, 시선도 맞았고. 그가 내내 하고 싶었을 말을 재촉했다. 엷은 미소를 따라 지호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사랑해.”
그제야 혜윤이 방긋거렸다. 만족스러운 끄덕임이 그의 가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이럴 때 여자 주인공도 하는 말 있을 텐데.”
미안하고 불안했던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빠르게 장난이 고여들기도 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혜윤이 고개를 설설 저었다.
“여자 주인공은 말보단 행동이야.”
그러고는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잠시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사랑해.’라는 말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행복. 지호가 꿈이라고 믿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
혜윤은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지호의 숨결을 바라봤다.
짧은 입맞춤으로 곧 누리게 될 잠결에도 온기를 넣어주고는 살살 머리를 빗겼다. 그러자 지금처럼 새근새근 잠이 든 지호였다.
‘오늘은 못 데려다줘서 미안.’
잠드는 순간 지호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마 그는 꿈속에서도 저를 챙겨준 것 같았다.
“우리 지호, 미안한 것도 참 많네…….”
쓰담쓰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조금 더 그 얼굴을 손끝에 새긴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
“와…… 몇 시지.”
다음 날 아침. 지호는 눈을 뜨는 동시에 몸을 번쩍 일으켰다. 날카로운 칼끝이 관자놀이 주위를 무자비하게 찌르는 느낌.
경험한 적 없는 두통에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그뿐이었다. 빠르게 시계부터 찾았다.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스케줄에 맞게 일어난 것 같아 일단 안도했다. 그러자 서서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에서 잔 건 알겠는데, 이불은 무슨 정신으로 덮을 수 있었을까.
술로 인해 기억을 잃은 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슥- 슥-
그때, 다이닝룸에서 기척이 들렸다. 여전히 펴지 못한 인상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만큼 가까워지는 몸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그렇게 마셔 놓고 7시에 눈이 떠져? 진짜 존경스럽다.”
봉기가 혀를 내두르며 지호를 훑고 있었다. 핸드폰도 차에 두고 내려서 못 일어나겠지 싶었건만. 딱 그가 오기로 한 시간에 눈을 뜬 지호에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소파 앞에 멈춰 설 때까지 봉기는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해장할 겸 국이라도 한술 떠. 작가님이 계란국 끓여놓고 가셨나 보다.”
“……작가님? 혜윤이 왔었어?”
“너 기억 하나도 안 나?”
“…….”
그리고 봉기의 소름을 이어가는 건 지호였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왜 혜윤이 오게 된 건지, 이제 겨우 아침 7시건만 언제 왔다가 돌아가기까지 한 건지.
다 떠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했으면서 어떻게 단 한 순간도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했다. 도려낼 듯한 두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끝없는 자책을 누비는 얼굴이 심각했다. 봉기가 그 얼굴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안에는 지호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어제 차에 두고 내렸더라. 피곤해서 가자마자 주무신다고 했으니까 연락은 나중에 해 봐.”
지호의 손이 느리게 주억대는 고개를 따라 했다. 천천히 핸드폰을 건네받다가 대뜸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자라났다. 그러자 엄지손가락이 빠르게 혜윤의 흔적을 찾아낸다. 도착한 지 30분밖에 되지 않은 메시지였다.
[침대 위에 두고 갈게. 딱 2시간 밖에 없었다는 걸 감안해 줘야 해. (오전 6:37)]
“……응?”
반가운 이름 아래 적힌 아리송한 문장. 봉기가 들려주는 기억 너머의 시간과 혜윤이 남긴 30분 전의 이야기. 지호는 아침부터 어지러웠다.
슥- 슥-
그래도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침대 위에 두고 간다고 했으니까.
“씻고 먹게?”
“……응.”
지호는 대충 대답을 남겨둔 채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침대에 다다랐을 땐, 두통이고 어지러움이고 모두 잊은 채 미소가 번졌다. 정확히 뭔지 몰랐음에도 그랬다.
침대 위에 반으로 접어놓은 종이 몇 장. 보이는 한 면엔 커다란 토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쫙 찢어진 양쪽 눈꼬리가 위로 가파르게 올라붙은 게, 건방진 입 모양과 잘 어울렸다.
“큭큭. 이게 뭐야.”
결국 시끄럽게 웃고야 만다. 토끼의 얼굴 밑에 적힌 글자를 봤으니까. 그 글자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반으로 뚝 접어놓은 이 종이 뭉치가 책이라고. 그것도 아주 유명한 책의 속편이라고.
지호가 천천히 어설픈 책을 들어 올렸다.
<아기 늑대 잔혹사 : 계략 토끼의 실체>
그러니까 이 토끼가 계략 토끼라는 거지. 지호가 입술을 맞물며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표지를 넘기기 직전에는 토끼의 한쪽 귀 위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를 눈여겨보기도 했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적힌 19라는 숫자를.
이 와중에도 ‘얼마나 야하길래?’ 싶은 기대가 드는 건 답도 없지 싶었다.
[뚜벅뚜벅. 오늘도 늑대는 초록 숲을 지켜야 했어요. 이젠 집을 나설 때마다 훌쩍거리는 토끼를 달래는 것도 익숙해졌답니다.
“울지 마, 토끼야. 대신 올 때 당근 많이 사 올게.”
“흑흑. 유기농으로 2상자.”
“응. 걱정 마.”
토끼는 생각보다 입이 까다로웠어요. 먹기도 많이 먹었고요. 우는 토끼를 홀로 남겨둔 채 일을 나가는 건 항상 미안했지만, 어쩌겠어요. 먹고 살려면 별수 없지.]
“큭큭. 말투 좀 봐. 무슨 동화가 이래.”
평소 혜윤의 동화에서는 본 적 없는 말씨였다. 2시간밖에 없었다더니 정말 막 지어낸 이야기인 걸까. 그런데 시간도 없었다면서 왜 동화를 썼을까. 꼬리를 무는 의미 없는 호기심들은 남겨두고 서둘러 책을 넘겼다.
[“얘들아!”
“느, 늑대구나. 먼저 가볼게. 안녕!”
늑대는 언제부턴가 동물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길게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늑대는 이 숲 저 숲을 지키느라 바빴거든요. 시간이 곧 돈이니까요.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겼답니다.
바보.]
“응?”
저야말로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겨야 했다. 마지막에 적힌 ‘바보.’라는 말이 꼭 토끼가 늑대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그러니까 장혜윤이 안지호에게.
꿈틀대는 눈썹을 따라 묘한 즐거움이 흘렀다. 그의 손가락이 여유롭게 다음 장을 찾았다.
[동물 친구들은 정말로 늑대를 피하고 있었어요. 바로 토끼 때문이었죠.
“너! 한 번만 더 늑대한테 말 걸면 한 대로 안 끝날 줄 알아!”
“미안해. 잘못했어.”
사실 토끼는 질투심 많은 당근 폭력배였어요. 늑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물들을 당근으로 때리고 다녔으니까요. 너구리 양쪽 눈에 멍든 것 좀 봐요. 숲의 모든 동물들은 토끼의 실체를 알고 있었답니다.
“늑대야, 넌 토끼에게 속고 있는 거야. 토끼가 얼마나 힘도 세고 무서운데.”
“아니야. 토끼는 연약해서 내가 지켜줘야 해.”
용기 있는 동물 친구가 늑대를 설득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늑대에게 토끼는 사랑스러운 초록 숲 1등 울보였으니까요.
진짜 바보.]
“이거 진짜…… 나한테 하는 소리지?”
지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젖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멋스러운 미소를 보이다가도 금세 키드득댔다.
바로 옆장, 토끼가 당근으로 너구리 머리를 때리는 그림이 있었기에.
그림에 자신이 없는지 동글동글 꼬리를 꼬아놓은 화살표가 ‘나! 너구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아주…… 그림도 자기처럼 그려요.”
지호가 손가락으로 토끼를 톡 건드리며 한 장을 더 넘겼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울지 마, 토끼야. 이번에는 당근이랑 또 뭐 사 올까? 전에 느티나무 가방 가지고 싶어 했잖아.”
“흑흑. 클로버 신발도.”
“응. 알았어. 돈 많이 벌어서 꼭 사 올게.”
그렇게 오래오래. 늑대는 토끼에게 속고, 착취당하며 살다가…….]
그림도 없고, 여백은 많고. 그런데도 왜 줄임표로 끝을 늘였을까. 제일 밑바닥에는 작게 ‘다음 장에 계속.’이 적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스러운 한 장을 넘겼다. 그러고는 대번에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빨갛게 19를 써놓은 이유가 여기 있구나 싶었다.
텅 빈 마지막 장에는 인상적인 결말 한 줄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죽었답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었어요. -끝-]
“뭐? 이렇게 끝난다고?”
지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다시금 책을 되돌렸다. 혹시 중간에 한 장을 빼먹었나 싶었지만 차곡차곡 잘 이어 읽은 게 맞았다. 마지막 장 결말이야 당연히 바뀌었을 리 없고.
설마 하는 생각에 책을 뒤표지 쪽으로 뒤집어보자 그곳에 작은 실마리가 적혀 있었다. 깨알만 한 글씨가 깨알 같은 웃음을 주기도 했고.
[매니저님 오셔서 빨리 끝내버림! 결말만 알려주면 되지 뭐.]
“큭큭. 미치겠다.”
황당한 웃음이 실실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혜윤이 그리도 강조하던 결말로 다시 돌아가 봤다. 단호한 결말이 어이없었지만, 그것보다 더 기막힌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게. 결말이 너무 마음에 드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었어요.’라는 문장의 섬뜩함도 잊은 채, 지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잔혹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