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못 믿은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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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못 믿은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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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못 믿은 대가
2023.05.28.
[잔혹사는 무슨. 아기 늑대의 행복한 일대기 같은데. (오전 7:27)]
숙취를 잊은 손가락들이 행복을 적어 보냈다. 기억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 탓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새벽에 제집에 왔다는 건. 그녀의 오늘이 꼬인 채로 시작됐을 것 같았다.
자느라, 또 일하느라. 종일 핸드폰을 꺼두겠구나 싶은데 대뜸 메시지 앞의 숫자가 사라진다. 지호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잘못 봤나 싶어서. 그리고 그 순간.
Rrrr- Rrrr-
화면을 밝히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루에 수십 번씩 떠올리는 이름을 조금 더 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안 꺼놨네?”
-……응. 일 거의 마무리했거든. 이제 우리 시차 없다.
쏟아지는 졸음에 웅얼웅얼. 흐릿한 목소리만으로도 찢기는 듯한 두통이 싹 날아가고야 마는 놀라움이란. 지호는 잠시 침대에 앉아 그 기분을 누렸다.
-속은 괜찮아? 술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응. 괜찮아. 그런데 어제…… 아, 오늘이구나.”
-기억 잘 안 나?
“……응.”
미안함만큼이나 걱정도 컸다. 스스로 기억을 잃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는 건 꽤 두려웠다. 최악일까 봐.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혜윤은 토닥토닥 마음을 다독였다.
‘걱정 마. 얌전히 자길래 이불만 덮어주고 왔어.’라면서. 이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툭 치워버리는 혜윤이었다.
미안함도 걱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니까. 지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고마움을 돌려 전했다.
“이번 책에는 왜 글쓴이 장혜윤이라고 안 적었어? 책 제목만 있고.”
-아…… 내용이 너무 잔혹해서. 내 이름 못 밝히겠잖아.
“큭큭. 대체 어디가 잔혹하다는 걸까.”
시무룩한 감정까지 섞인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공기가 잔뜩 들어간 웃음소리가 제게도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흐흐, 원래는 엄청 무서워. 매니저님이 일찍 오셔서 그 부분이 생략된 거지.
“그랬어?”
-응. 감금당하고 폭행당하고. 늑대가 몰래 도망치려다가 잡히고.
지호의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댔다. ‘어때? 무섭지?’ 같은 말은 정말 무서우리만큼 사랑스러웠다. 침대 위에 올려둔 <아기 늑대> 속 토끼의 그림. 당근을 꼭 쥔 채 ‘나! 너구리!’를 때리려는 토끼를 유심히 봤다.
저 손으로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지. 당근도 겨우 쥐고 있는 솜뭉치 같은 손으로. 늑대가 도망칠까 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감시했다는 거고. 상상이 선명해질수록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아…… 너무 좋네.”
-뭐가?
“감금에 폭행에. 다시 잡히기까지 한다며.”
생각할수록 만족스러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중에 꼭 생략된 부분까지 들려달라고 해야지 싶었다. 제 만족스러움이 혜윤은 무서웠던 것 같지만.
-지호야.
“응?”
-……너 변태야?
텅 빈 침실에 끅끅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그러다가 웃음이 가라앉은 자리엔 한 뼘씩 보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 있었다.
지호가 방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늘 스케줄이 끝나면 12시. 내일 첫 스케줄은 점심에 생방송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그 역시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새벽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니었기에, 적어도 아침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으로 찾아가야지 싶은데.
-내일은 몇 시에 나가? 같이 아침 먹을까? 내가 가서 해 줄게.
꼭 혜윤이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생각은 읽었지만 마음까지는 못 읽은 것 같았고.
“아니야. 끝나고 내가 갈게. 혼자 오는 거 그만 해.”
잠깐이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런 자만이 문제라는 건, 늘 뒤늦게 깨닫는 게 문제였다.
-그럼…… 아침에 올래?
“응?”
-오늘 밤에 오지 말고. 내일 아침에.
“왜?”
지호의 당황이 짧은 한 글자마다 가득했다. 가벼운 1차 거절은 그럭저럭 여유롭게 되물었지만.
-그냥…… 뭐…….
“그냥 뭐, 그다음 말이 궁금한데.”
-밤에 오면 한 침대 써야 되잖아. 한 달 정도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뭐?”
묵직한 2차 거절엔 조금도 태연한 척을 할 수 없었다. 서늘한 공기가 소름 끼치게 뺨을 쓸고 가는 느낌.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소리에도 그 기운이 옮아간 듯 어색했다.
“……왜?”
한쪽은 딱딱하게 굳은 소리를 내는데, 반대쪽은 부들부들 망설이는 소리를 냈다.
-다이어트하려고. 살 조금 뺄 때까지는 안…… 그러고 싶어서.
“혜윤아…… 네가 뺄 살이 어딨어?”
지호는 보이지도 않는 혜윤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만 볼 수 있는 거라고 통통거렸기에, 마음에도 없는 동의를 건넸다.
***
‘진짜 그 이유야? 그런 거면 알았으니까 밤에 갈게. 안 건드리면 되잖아.’
‘건드릴 거잖아.’
‘……응.’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어서 솔직히 이실직고한 그였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아침에 오게 되었는데, 낮과 밤은 문제가 아니었다. 혜윤의 집 현관문 앞에 서자마자 가슴이 뻐근했다.
‘아침 식사 됩니다!’라고 붙여 놓은 깜찍한 글씨. 이런 놀이는 매일 어디서 배우는 걸까.
더군다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렇게 초롱초롱 올려보는데. 어떤 남자가 몸이 안 끓겠어.
“큭큭. 진짜 아침 먹으러 왔네?”
“그러게.”
혜윤은 못 본 사이에 더 맑아진 느낌이었다. 피부 결도 계절을 타는지, 여름의 싱그러움이 이마와 두 뺨 위에서 뛰노는 것 같았다. 요리하는 뒷모습도, 가끔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저를 힐끔 돌아보는 얼굴도.
점점 가슴만 뻐근한 게 아니었다.
10시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밥을 먹고, 못 했던 대화도 하고. 얼토당토않은 다이어트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할 참이었다. 대체 무슨 살을 뺀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안 건드리기로 한 약속은 오래 지킬 자신도 없었기에.
스스로 계획을 접고 다시 손을 내밀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다짐했다.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딱 한 마디 말로써.
***
“……못 믿겠어.”
된장찌개 한 입, 밥 한 입. 그사이에 벌써 저 말이 두 번째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혜윤은 익숙한 꽃받침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한여름도 아니건만 눈빛이 8월의 정오처럼 쨍쨍 빛났다. 맛있다는 말만 하면 혜윤은 한껏 미간을 찡그렸다.
솔직한 밤의 대가라는 걸 지호는 알 수 없었다.
“진짠데…….”
지호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간이 세지 않은 나물 반찬들 사이에 빨간 낙지볶음. 그랬기에 그 맛과 식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직접 한 거야?”
“…….”
“혼자 먹기 아까운데.”
“…….”
“큭큭. 뭐지?”
음식을 꿀떡 삼킨 지호가 눈을 꾹 접었다.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대답 없는 꽃이 꽃받침 위에서 탐정 놀이를 하고 있었기에. 샅샅이 저를 살피던 눈빛은 도톰한 입술이 열릴 때도 한결같았다.
이젠 무슨 말을 할지 너무 잘 알겠고.
“……못 믿겠어.”
혜윤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지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웃음은 참아보겠지만, 참지 못할 것 같은 감정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한데.
지호가 수저를 내려놓은 채 혜윤을 흉내 냈다. 자신은 꽃이 아니었기에 한 손으로만 턱을 괴고는 뭉근한 눈빛을 보냈다.
“대체 왜 그렇게 못 믿겠어…… 자꾸 그런 표정으로 사람 힘들게 할 거야?”
“……그 말도 못 믿겠어. 못생겼다는 뜻이겠지?”
깜찍한 툴툴거림에 입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 아니, 애가 타는 느낌. 그가 저도 모르게 시계를 찾았다. 곧 8시를 앞두고 있었다.
시간도 가고, 마음도 가고.
“혜윤아, 나 스케줄 하나 취소해? 못 믿겠다는 말이 이렇게 흥분되는 말이었나…….”
눈앞의 꽃은 본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하늘하늘 유혹해대고.
“그 말도 못 믿…… 으앗!”
쾅! 후다닥!
불현듯 두 사람의 움직임이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식탁 의자를 넘어뜨리고 달려든 지호처럼, 동시에 혜윤도 거실로 뛰었다. 본능적으로 잡히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한 이유였다.
그래봤자 겨우 소파까지밖에 못 갔지만.
양쪽 손목을 잡힌 와중에도 달아나려는 움직임이 반동을 만들었다. 의도치 않게 소파에 던져지듯 눕게 된 혜윤의 몸 위로 지호가 겹쳐 올라갔다. 틈 없이 맞붙은 몸. 이번에야말로 정말 못 믿을법한 남자의 열기가 날것처럼 생생히 전달됐다.
상체를 지탱한 지호의 팔에 불뚝불뚝 힘줄이 내돋쳤다.
“이제는 좀…… 믿겠어?”
품 안에 갇힌 혜윤에게 온화한 미소가 내렸다. 살갗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한없이 조급하게 구는데도 목소리와 미소만큼은 정반대였다.
한낮처럼 쨍하던 혜윤의 눈빛에도 솔솔 바람이 부는 듯했다. 작은 대답에서 여름 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났다. 살랑살랑, 망설임이 그득그득한.
“……응.”
지호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힘없는 대답처럼 눈가의 가장자리엔 여전히 못 믿겠다는 속내가 비쳤다. 그게 귀여웠다.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식탁으로 다가가 넘어진 의자를 정리했다.
소파에 누워 있던 혜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못 믿겠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두 번은 봐줄 것 같지 않으니까 자극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그 생각만 되뇌고 있을 때, 식탁 근처에 서 있는 지호가 목소리를 냈다.
넓은 어깨를 따라 제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등. 늠름한 뒷모습이 보기는 좋았는데, 들리는 이야기가 조금씩 제 상황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형, 라디오 꼭 메이크업할 필요 없잖아. 영상 찍는다 해도 뭐, 굳이.”
혜윤이 또록또록 눈을 굴렸다. 대충 감이 잡혔을 땐, 어느 틈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호였다. 분명 핸드폰 속 봉기에게 하는 말인데도 마치 제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살짝 휘어진 눈이 혜윤을 은은하게 바라보았다.
“응. 그럼 한 시간 더 늦게 와. 11시까지. ……더 늦어도 괜찮고.”
혜윤이 입 안의 살을 꼭 깨물었다.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도 제게 꽂힌 그의 시선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잠깐의 짧은 달리기로 헝클어진 머리가 혜윤의 발그레해진 뺨을 괴롭히고 있었다.
지호의 손이 살살 그 머리카락들을 정리했다.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저만 바라보는 혜윤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다. 눈으로 말고, 입으로 말할 기회를.
“뭐 할 말 있어?”
“……잘못했어.”
꼬물꼬물하는 목소리에 방울방울 맺힌 간절함. 지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붙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기던 손끝이 자연스럽게 가는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이.
“잘못이야 이제부터 내가 할 거고.”
빠르게 눈을 굴리던 혜윤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지만, 몇 번 뛰어보지도 못한 채 붙잡히고 말았다. 솔직한 밤의 대가만큼, 못 믿은 대가 또한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