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보이는 라디오 (106/110)


105. 보이는 라디오
2023.05.31.


지호는 마이크 앞에 앉아 라디오 부스를 둘러봤다.

보통 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스태프가 이렇게나 많은 걸까. 와서 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볼 수 있는 거라서 보이는 라디오인가. 그 역시 라디오는 처음이었기에 잘 알지 못했다.

진행자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그녀의 안내를 따라 시선을 함께했다. 눈앞의 원고를 보다가 건너편의 모니터를 응시했다. 너무 빠른 움직임이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건지 몰랐는데, 지금 들어오고 있는 메시지라고 한다.

보통 때엔 이런 속도가 절대 아니라고. 소개할 메시지는 따로 보여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친절한 안내에 웃으며 고개를 숙이면, 그녀는 그때마다 잘하던 말을 버벅거렸다.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했던 ‘아, 너무 떨려.’라는 말이 진심 같았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저희 방송이 딱 점심 시간대라서.”

“아침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요. 1시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요! 제가 잘 부탁드리죠. 오늘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지호는 손부채질과 함께 얼굴이 빨개지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움직임을 따라 찰랑이는 머리카락도 그렇고, 열이 오른 뺨도 그렇고. 조금이나마 비슷하다는 핑계로 오늘 아침의 혜윤을 떠올렸다.

붉게 꽃물을 들인 두 뺨, 몸을 따라 침대 위에서 파도를 치던 갈색 머릿결, 끝내 품 안에서 쌕쌕거렸던 숨소리. 어떤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이 하는 모양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했다.

불과 몇 시간 전, 들썩이던 가슴이 잠잠해질 때쯤엔 매듭짓지 못한 대화를 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을 테니까, 방식을 조금 바꿔서.


‘정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도와줄게.’


‘운동 가르쳐 주려고?’


‘아니. 같이 하려고, 지금처럼. 이것도 큰 운동이잖아.’


‘으아…….’

 
바르작거리던 몸짓을 똑 멈추기에, 그녀의 몫까지 냉큼 챙겼다.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자 배시시 웃는 미소. 어느 결에선 놀란 듯 움찔했는데 그때마다 저 역시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이어트 목적인 거면 제대로 해야지. 열심히, 꾸준히.’


‘…….’


‘운동은 도저히 못 할 것 같은 순간에도 ‘한 번만 더, 하나만 더.’하는 거거든. 그런 정신으로 도와줄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다이어트 안 할게.’

 
드디어. 다 포기한 듯이 품 안으로 폭 파고드는 몸이 좋았다. 그러다가도 ‘응. 지금이 예뻐.’라는 말에 반짝 저를 올려보던 눈빛. 오늘 여러 번 봐왔기에 곧장 읽혔다.


‘왜? 또 못 믿겠어서?’


‘아니야! 나 완전 믿어! 진짜야!’


‘큭큭. 혜윤아, 뭘 그렇게 무섭게 믿어.’

 
덜컥 겁을 먹고는 도리어 믿어달라는 눈빛이 절절했다.

지호가 원고 위에 올려진 손을 내려봤다. 손끝에 남아 있는 보송한 살결의 촉감. 다 날아가지 않길 바라며 살짝 주먹을 쥐었다.

감질나고, 안달 나고.

얼마만큼 붙어 지내야 이런 서운함이 사라질까. 헤어지는 순간마다 품었던 의문은 오늘도 반복됐다.

***


 


“제대로 갖추고 왔어야 하는데 너무 편안하게 왔어요.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세요! 민낯에 모자까지 안 써주시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부스 밖에 난리 난 거 보이시죠? 청취자분들만 흥분한 게 아니에요. 라디오국 여자 스탭들 다 오셨어요.”

 
지호가 부스 밖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가벼운 고갯짓만으로도 흥분으로 절절 끓는 분위기가 배가되었다. DJ는 늘 보던 사람들의 낯선 모습이 신기했고, 지호는 모든 게 신기했다. 그의 시선이 작은 카메라에 멈추어 선다.


“그럼 지금 이 모습이 생방송처럼 나가는 건가요?”

“그렇죠. 지호 씨는 보이는 라디오를 전혀 모르시는구나. 아…… 그런데 지호 씨, 조금 전에 메이크업 안 했다는 말이 문제였나 봐요.”

 
지호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생방송’과 ‘문제’라는 단어들의 조합이라면 그럴 만했다. 의문스러운 눈길이 DJ를 향해 직선으로 꽂혔다. 남자의 예민한 눈살이 여자에겐 관능적으로 보였다. 한 여자뿐 아니라 이곳의 모든 여자들에게.

DJ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심장이 내려앉은 느낌에 입술이 떨렸다.


“저, 접속자가 너무 폭주해서! 이런 식이면 서버 다운될 수도 있다네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볼만한 얼굴은 아니니까 청취만 부탁드립니다.”

“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제가 딱 한 마디만 할게요. 여러분, 제가 본 연예인 중에 제일 화면발 안 받는 분이세요. 후광이 나요.”

 
지호가 나긋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이어진 라디오는 주로 영화 관련 이야기였다. 벌써 개봉 3주 차, 누적 관객 750만 명. 볼 사람은 거의 본 상황이었기에 개봉 초기에 했던 인터뷰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조금 더 편안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DJ의 능숙한 진행에 지호 역시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별일 없으면 실수 없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별일도 아닌 게 실수가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잠시 광고 시간에 자리를 비운 DJ가 PD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부스 안에 앉아 있는 지호를 보며. 광고가 끝나갈 무렵에 들어온 그녀가 원고를 탁탁 고쳐잡았다. 사인과 함께 다시 시작된 방송. 살짝 격앙된 목소리가 울렸다.


“자, 2부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지호 씨, 대체 광고 나갈 때 뭐 하셨어요? 제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잖아요.”

“아…… 저 그냥 앉아 있었는데.”

 
빤히 들여다보는 얼굴 속에 미묘한 감정변화. 예고 없던 질문이 의문스러운 지호였다. 은근한 눈길로 DJ를 재촉하자 대뜸 그녀의 눈과 입이 굵은 호선을 그렸다.


“보이는 라디오 서버가 다운됐다고 합니다. 난리가 났다는데요?”

 
지호는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댔다. 해명을 요구하는 끈덕진 시선을 알고 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10분 동안 한 게 없었기에. 그때, 모니터를 통해 또렷한 글자들이 두 사람을 향했다. PD가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그가 잊고 있던 그의 10분이었다.

[지호 씨 통화하면서 영화 찍으셨음!]

그 짧은 문장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혜윤과 5분 남짓 통화를 했던 평범한 장면이었다.


‘2주면 영화 홍보도 끝이니까. 전에 말했던 거 다 해보자. 쇼핑도 하고, 맛집도 가고.’


‘오오, 좋아! 재밌겠다!’


‘음, 이런 말은 잘 믿네?’


‘……갑자기 못 믿겠어.’

 
당분간 혜윤이 제일 즐길 것 같은 못 믿겠어 놀이에 웃었던 기억. 그냥 웃은 게 전부인데 왜 사람들이 몰릴까 싶은 지호였지만, 직접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날 인터넷 여기저기에는 ‘누가 봐도 장혜윤이랑 통화 중.’이라는 제목과 함께 짧은 영상이 퍼져나갔다.

영상 속의 남자는 본인이 말할 땐 즐거워 보였고, 말없이 핸드폰에 귀 기울일 땐 사랑에 빠져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얼굴이었다.

***

6월의 중순. 오늘로써 지호의 영화는 개봉한 지 한 달째였다. 공식적인 영화 홍보 일정도 모두 마무리가 되는 날. 지호와 봉기는 단독 무대인사를 마치고 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조용한 엘리베이터에 스타일리스트까지 단 세 사람. 봉기는 잠시 다음 일정을 떠올렸다. 그러자 낯선 기분이 코웃음을 타고 빠져나간다. 다음 주는 인터뷰 3개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녹음이 하루, 광고 촬영이 하루.

스케줄은 이틀이 전부였다.


“뭔가 색다르네.”

 
차로 향하는 걸음을 따라 봉기의 작은 감탄이 떨궈졌다. 앞서 걷던 지호가 슬쩍 뒤돌았다.


“뭐가?”

“연초부터 너한테 보여준 시나리오가 100개야. 예전 같았으면 벌써 대여섯 개는 조율 들어갔을 텐데…… 지금 양규영 감독 작품 하나만 고른 거잖아.”

 
스타일리스트의 말 없는 끄덕임까지. 모두가 지난날의 일정을 아는 탓이었다. 하루에 4시간을 자면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었던 날들, 그렇게 10년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봉기와 스타일리스트 모두 널널한 일정이 생경했다.

피식거리는 걸 보니 지호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차기작까지 이렇게 텀 두는 게 처음이라. 나만 어색해?”

“큭큭. 꼭 하고 싶은 작품까지는 없는 것 같아서.”

“전에는 할까 말까 싶은 작품들도 다 했던 거고?”

“……약간?”

 
세 사람은 조금 우스운 감정을 느끼며 차에 탔다. 봉기는 동선에 맞춰 스타일리스트를 먼저 내려 준 뒤, 지호의 집으로 향했다. 단둘만 남은 차 안에서 봉기의 시선이 꾸준히 룸미러를 찾았다.

거울 속 지호는 살이 빠진 듯했다. 두 달을 몰아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말에 잠깐 쉬고 왔을 때도 얼굴이며, 몸이며 말도 못 하게 좋아졌던데. 이번엔 또 어떨까. 지호의 휴식이 누구보다 기대되는 봉기였다.

금요일 밤의 도로는 평소보다 여유로웠다. 오늘내일로 거센 장마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힘을 발휘한 것 같았다. 빠르게 도착한 지호의 집 앞, 봉기가 차에서 내린 지호를 돌려세웠다.


“참, 이걸 깜빡했네.”

“뭘?”

 
지호가 운전석을 돌아봤을 땐,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봉기를 볼 수 있었다. 뭉툭한 손가락치고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게 재밌었다. 손은 손대로, 입은 입대로. 지호에게 줄 선물에 들떠 있었다.

봉기의 콧구멍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아니, 전에 보니까 효과가 좋더라고. 홍삼보다 분노.”

“참 나.”

 
단번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아버린 지호였다. 설설 고개를 저었지만 봉기는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빠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푹 쉬고 오라고 전보다 센 놈으로 줄게.”

“뭐가 또 있어?”

“집에 가면서 봐. 몇 시간 전에 올라온 거라 신선해. 싱싱한 분노랄까?”

 
핸드폰을 내려놓은 봉기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잘 쉬라는 말을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지호의 핸드폰을 턱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차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쯤, 지호는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걸음이 느려지다가 뚝 멈추고 만다.

[정규헌 “서점에서 장혜윤과 대화, 정말 연예인 보는 느낌”]


“와…… 이건 홍삼이 아니라 산삼 수준인데.”

 
그의 혀끝이 입 안을 깊숙이 찔렀다. 봉기의 말대로 피로와 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오늘부터 본격적인 장마라는 뉴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혜윤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아침이 아니라 밤 같아서. 하늘은 비를 쏟아낼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조명을 좀 더 밝혀야 하나. 긴 어둠이 우울을 불러올까 창밖을 볼 무렵.

띵동-

조명 말고 진짜 빛이 문을 두드렸다. 지호를 2주 만에 다시 보는 날. 문을 향하는 발걸음이 들뜬 마음에 총총거렸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올 테니까 집 안에서 놀아야지 싶었다. 책을 읽고 영화도 보면 좋겠지. 아, 해물파전을 만들어 볼까. 너무나 평범한 상상에 솔솔 웃음이 새어나갈 때쯤.

철커덕-

문을 연 혜윤이 지호를 빤히 바라봤다. 천천히 문밖의 남자를 훑던 그녀의 첫마디에 황당함이 가득 차 있었다.


“지호야…… 진짜 집이 사라진 거야?”

 
한나절 놀다 갈 사람이 짐가방을 챙겨 오기도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혜윤을 향해 지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