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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비와 당신의 이야기 (107/110)


106. 비와 당신의 이야기
2023.06.04.


혜윤은 대답 없이 밀고 들어오는 지호를 지켜봤다. 신발을 벗고 옷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제가 손님인 양 어색하게 뒤를 따랐다.


“전에 약속했던 거 기억나? 일주일에 하루쯤은 같이 지내자고.”

 
혜윤이 굼뜬 걸음처럼 느리게 생각을 휘저었다. 그러자 3월의 끄트머리에 새긴 약속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혜윤아, 우리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같이 지낼까?’


‘하루?’


‘응. 점점 바빠지니까 하루쯤은 정해 놓으려고. 당연히 더 볼 수 있으면 좋지만.’

 
아마 지호의 해외 촬영 일정을 이야기하던 밤 같았다. 그 이후로 몇 번은 잘 지켜지다가 흐지부지되어버린 기억. 한 달쯤 ‘지호네 집’ 도장 모으기에 열심이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작은 끄덕임을 지켜보던 지호가 옷방에 가방을 내려놨다.


“어제 세어보니까 오늘까지 7번 못 지켰더라고.”

 
그러고는 천천히 뒤돌아 혜윤을 마주한다. 애매하게 말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그였다. 더 말이 필요하냐는 듯이, 혹은 자신의 눈빛을 읽으라는 듯이. 혜윤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그럼…… 7일 동안 여기 있겠다고?”

 
정말 완벽하게 읽어냈다며 칭찬 같은 미소를 보이는 지호였다. 혜윤의 입이 주먹만큼 벌어졌다.

***

함께했던 7일은 내내 비가 왔다. 거센 장마는 비를 쏟아내지 않는 잠깐마저도 쉽게 기세를 꺾지 않았다. 그래서 단 하루도 햇빛이 쨍한 날이 없었다. 첫날에는 어두운 날씨가 아쉬웠지만, 갈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장점이었지만.


‘지호야, 우리 조금…… 사람 같지 않아.’


‘큭큭. 그게 무슨 말일까.’


‘음…… 약간 짐승 같잖아. 조금만 눈 맞으면 막…….’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하나 싶을 때, 지호는 늘 그렇듯 품 안으로 저를 끌어당겼다. 마치 꼭 붙어 있으라고 빚어놓은 사람들처럼, 두 몸의 곡선이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게 신비로웠다.

비 오는 날이 주는 운치라는 건 굉장했다. 너무나 사소한 시선 하나에도 불꽃이 일었다. 운치만으로 부족할 땐 지호가 직접 불씨를 심어주기도 했다. 어디를 어떤 식으로 어루만질 때 민감하게 구는지 잘 아는 남자였다.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이상이었다. 나아가서 이쪽이 더 애원하게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내 입이 이런 말을, 이런 소리를 낼 줄 알았구나. 꼭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거침없이 술술.

7번의 밤을 함께하기로 했지만, 그 숫자는 넘어선 지 오래였다.


‘으아! 쫄딱 젖었어!’


‘그러게. 너무 야하다. 빨리 집에 가자.’


‘……우리 지호 정말 큰일이다.’

 
일요일에는 영업을 안 하는 카페에 들렀다. 얄궂은 말을 하는 지호를 타박했지만, 반박까지는 할 수 없었다. 젖은 옷이 척척 달라붙은 남자의 몸은 이렇게나 야한 거구나. 상상력이 더해져서인지 벗은 것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서 순간 반성하기도 했다. 나야말로 진짜 짐승이네. 애매한 곳만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순간 등 뒤로 젖은 몸이 밀착됐다. 축축하고, 뜨뜻하고, 야릇한 기분이 물기를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여기 일요일은 아무도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안 돼.’


‘응? 뭐가 안 되는데?’

 
바짝 긴장한 목에 습한 호흡을 묻으며 제 대답을 유도하는 게 조금 얄미웠지만, 마음의 동요는 남자 쪽이 더 심할 것 같았다.

잠시 턱을 낮추자 가슴의 굴곡이 젖은 옷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지성인이다.’를 다섯 번쯤 외우면서 이상한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른 놀이만큼이나 7일 내내 제일 많이 곱씹은 건, 지호의 일상이었다. 정확히는 작년까지 이어지던 지호의 일상.


‘커피 쿠폰을 몰라?’


‘응. 귀엽다. 명함인 줄 알았어.’


‘그럼 이건 알아? 진동벨.’


‘에이, 그건 알지.’


‘사용해 본 적은?’


‘……지금 처음 만져보는데.’

 
집에서는 지호가 저를 손쉽게 다뤘다면, 밖에서는 그 반대였다. 혜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호의 삶이 신기했다. 정말이지 처음인 게 너무나 많았다.

모두가 경험한 적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그에겐 일상이듯, 보통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이 그에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럴 때마다 놀라워하며 웃다가, 점점 측은해졌다. 그러고는 귀여워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별것 아닌 걸 알려줘도 엄청난 것처럼 반응해 주는 게 신났다. 아마 지호 역시 그런 저를 귀여워한 것 같았다.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도,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지호가 가진 미지의 영역이란 건 모든 곳에 존재했다.


‘이 과자 몰라? 작년에 엄청 유명했었잖아. 매일 여기저기 품절이었고.’


‘그렇구나.’


‘안 먹어봤어?’


‘응. 이름도 지금 알았어.’

 
선생님처럼 우쭐거리며 앞장을 섰다. 그러다가도 두 가지 과자 봉지를 들고 고민할 때면, 지호는 한 손으로 두 봉지를 모두 낚아채 카트에 넣었다. 서로의 고민을 아주 손쉽게 해결해 주는 최고의 짝꿍이 된 기분.

언젠가 꼭 가보기로 한 맛집은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았다. 평일에, 비까지 쏟아졌으니까. 그래도 잠깐의 웨이팅은 필요했다.


‘아, 여기 이름이랑 연락처를 적어야 되는 거구나.’


‘아니야! 내 번호 적을게. 다른 사람들이 너인 줄 다 알잖아.’


‘알면 좀 어때.’

 
서슴없이 자기 이름을 적으려는 모습에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번호를 아무도 모른다던 여배우들의 이야기. 더군다나 지나는 직접 제게 들려주기까지 했었다. 지호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냐면서.


‘괜히 번호 알려지고, 모르는 사람들이 연락 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응?’


‘모르는 사람이 너한테 연락하는 거 싫어서.’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은 조금 감동이었다. 번호를 다 적기 전에 들어오라는 손짓은 너무나 반가웠지. 얼른 지호의 손에 쥔 펜을 빼앗고는 쓱쓱. 적은 번호와 이름에 선을 그었다.

혼자 다닐 땐 아무도 못 알아봤지만, 지호와 함께라면 정반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호를 알아봤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있는 제게도 시선이 꽂혔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도리어 힐끔거렸던 순간들.

그럴 때면 유심히 지켜보던 지호가 성나지도 않은 마음을 달래려 들었다.


‘불편하면 나갈까?’


‘지호야, 나 지금 어때? 아주 못 생기진 않았지?’


‘너무 예뻐서 문제지. 그래서 다들 쳐다보잖아.’


‘응. 그럼 됐어.’

 
그게 중요한 거라며 흡족하게 끄덕이면 지호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안 예쁘게 볼까 봐 걱정인 거냐는 질문에는 힘차게 끄덕. 강한 긍정을 보였다. 그 움직임에 또 키득키득.

사실 훑는 시선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상쇄시킬 만큼 그의 웃음이 듣기 좋았다. 자꾸 욕심이 났다. 더 즐겁게 해 주고 싶다고. 이 사람의 웃음소리가 내게 행복이라는 걸, 7일 동안 수십 번은 깨달은 것 같았다.

스파게티를 먹으며 들은 지호의 일상이란 건, 정말 무서울 정도로 단조로웠다. 배우 생활을 한 10년을 단 2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일하고, 운동하고, 기절하듯 자고. 운이 좋아 계절에 두어 번 쉬는 날이 생기면 그날은 운동하고, 자고.

돌돌 말아둔 스파게티를 접시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섬뜩하리만큼 고단한 10년이 식욕을 앗아갔기에. 그저 애틋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호가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제 입에 쑥 넣어주었다.

스테이크와 함께 딸려오는 장난에 마음이 풀렸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돈이 얼마나 많겠어, 내가.’


‘큭큭. 그렇게 이어지는 거야?’


‘응. 설렁설렁 착취하지 말고 지독하게 해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알았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는 손길도, 그 순간의 눈빛도, 모든 게 달콤했다. ‘감금은 언제 해? 하긴 할거지? 기대된다.’ 같은 말에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한집에 머문 7일을 내내 붙어 있던 건 아니었다. 이틀은 또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지호의 집에서 놀라게 해 줄 마음에 퇴근을 기다린 적은 있었지만, 이런 기분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광고 촬영이라 늦게 끝나. 집에 오면 새벽이나 내일 아침일 것 같은데.’


‘밥 꼭 챙겨 먹으면서 해.’


‘응. 먼저 자.’


‘……알았어.’

 
집을 나서는 현관 앞, ‘먼저 자.’라는 말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뭘까. 낯설고 어색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몇 번을 되뇌어보다가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흘려보냈지만 며칠 뒤엔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지호가 일찍 스케줄을 마친 날이었다. 혜윤도 그날로 약속을 몰아 잡고는 밖에서 만나 함께 귀가하던 날.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갈까?’

 
이 말에 흘려보냈던 감정이 다시 밀려들었다. 운전하는 옆모습을 찬찬히 훑다가 시선이 부드럽게 굴러가 닿은 곳은 제 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였다. 묘한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부부 같아서.

그때 막연하게 멀리 두었던 장면들이 눈앞으로 훅 다가왔다. 정말 결혼하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어쩌면 이젠 막연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한데.


‘왜?’


‘응? 아, 아니야.’

 
한참 보는 시선을 지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냉큼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을 느꼈다는 건 그 안에 깃든 제 생각까지 읽었다는 게 분명했다. 지호의 목소리가 조금 즐겁게 들렸다.


‘결혼하면 이것보다 훨씬 좋을걸.’

 
곁눈으로 힐긋 보기에, 말없이 이마를 가렸다.

그렇게 정말 빠른 7일이 지나갔다. 불편할 줄 알았던 일주일은 오히려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했다. 하다못해 이렇게 흐린 날씨까지 마음에 쏙 들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밤, 살짝 아쉬움을 들려줬다.


‘와, 벌써 7일이 다 갔네…… 내일 혼자 있으면 조금 허전할 것 같아.’


‘내일? 나 내일 안 갈 건데.’


‘응?’

 
전혀 모르겠다며 눈만 끔벅거리자 지호가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잠시 후,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이 제 손 위에 올려졌다. 많이 봐서 익숙한 모양새. 카페의 커피 쿠폰이었다.


‘쿠폰? 전에 가져왔었어?’


‘응. 좋은 시스템인 것 같아서.’


‘뭐가?’


‘10번 오면 1번은 그냥 주는 거라며. 그래서 계산해 봤는데…….’

 
지호가 제 팔에 바짝 붙어 앉아 커피 쿠폰을 내려봤다. 10개의 텅 빈 커피잔 모양들을 순서대로 톡톡 건드리면서.


‘이번에 7번 잤고, 4월에 3번은 같이 있었잖아. 부모님 뵌 날, 벚꽃 본 날, 화보 찍은 날도 같이 있었으니까…….’


‘큭큭. 미치겠네, 진짜.’


‘그러면 10개 완성. 이거 쓸 수 있는 거지?’

 
하나를 알려주면 10배의 감동으로 돌려주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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