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쿠폰 활용법
(108/110)
107. 쿠폰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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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쿠폰 활용법
2023.06.07.
7월이 되자 지호는 본격적으로 영화 준비에 들어갔다. 혜윤은 언젠가 ‘타고난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다던 여배우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지호는 조금도 힘든 내색이 없었다. 매일 10시간 넘게 이어지는 혹독한 수련을 측은해하면 ‘다들 이 정도는 해.’라면서 도리어 저를 달랬다. 더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하다면서.
7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데이트를 했다. 제일 한적한 날에 맛집을 가고, 카페에 가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밤거리를 걷고. 입 안처럼 가슴도 온통 달콤하고 든든했던 날들. 그런 데이트를 멈춘 건 8월이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우준의 말 때문이었다. 운동으로 몸을 만드는 것의 의미를 너무 몰랐던 탓이었다.
‘단기간에 몸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너랑 맛집을 돌아다니는 거면…….’
‘아…… 그럼 나랑 밥 먹은 다음 날은 더 많이 운동하겠네?’
‘그렇다기보다는…… 너랑 밥 먹으면 하루 이틀 운동한 거 다 날아가는 거지. 고생한 거 전부 원점으로.’
‘와, 오늘 커피가 달다.’ 시원한 카페모카를 쪽쪽 빨아 먹는 우준이 정말 달게 웃었다. 반면 바짝 입안에 쓴맛이 돈 혜윤은 곧장 지호의 집으로 갔다. 혹시나 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땐, 꼭 이 집과 비슷했다.
“와…….”
넓은 공간이 시원하게 휑했다.
브로콜리와 파프리카, 당근, 오이 같은 야채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본가에서 보내주시던 반찬도 보이지 않았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닭가슴살만 한가득했다.
하루의 데이트를 위해, 나머지 날들은 이 맛없는 닭가슴살조차 줄여가며 먹었을까. 다시 냉장고를 열었을 때 보이는 덩어리 야채들까지 속상했다. 또 ‘다들 이렇게 먹어.’라면서 저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지호는 평소처럼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도 참다 보니 익숙해졌다. 운동을 하고 돌아왔기에 대충 밥을 먹고 쉴 생각이었다. 먹는다기보다는 쑤셔 넣는다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었으니 놀랄 수밖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던 야채들이 한입 크기로 잘려 있었다. 작은 용기에 알록달록 예쁘게 섞여서 한 번씩 먹기 좋게. 문에는 본 적 없는 발사믹 드레싱도 보였다.
그리고 정말 본 적도 없어서, 정체도 모르겠는 주황색 액체도. 투명한 용기에 점성 있는 죽이 담겨 있었는데, 작은 메모도 함께였다.
[지호야, 요즘은 토끼도 당근을 삶아 먹는대.]
아기자기한 글씨가 당근 수프 데워먹는 법까지 안내하고 있었다. 지호가 짧은 메모를 보며 히죽거렸다. 바로 옆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란 말풍선 안에 ‘생당근 맛없어!’라고 써놓은 게 귀여웠다.
“……못 살겠네, 장혜윤 때문에.”
냉동실 속 켜켜이 쌓인 닭가슴살에도 똑같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올여름은 집밥 먹기 놀이하자! 다음 주에 맛있는 닭가슴살 요리해 줄게.]
지호가 닭가슴살 하나를 꺼내며 입술을 맞물었다. 아직 요리 선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식욕이 돌았다.
***
8월. 쨍쨍한 여름이지만 잡지 속 세상은 벌써 가을이었다. 아직 물들지도 않은 낙엽의 빛깔이 그 안에 가득했다. 옷의 색깔만큼이나 모델의 그윽해진 눈빛, 한층 명도가 낮아진 표정들.
혜윤은 그중 제일 마음에 드는 한 권을 들었다. 당연히 지호가 표지 모델인 잡지였다. 잡지 코너를 기웃대는 일. 이젠 그녀가 서점을 찾는 이유라고 봐도 무방했다.
“누군데 이렇게 잘생겼대?”
저도 모르게 터진 진심에 퍼뜩 고개를 올려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못 들은 걸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지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종이일 뿐인데도 꾹꾹 힘주어 문지르는 건 아플까 봐 싫었다.
여러 장 넘긴 끝에 발견한 지호의 가을 화보는 간단한 인터뷰와 함께였다. 간략하게 옮겨놓은 인터뷰의 말투들이 어색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대충 적어 놓았어도 지호의 목소리와 말투를 입혀서 상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눈과 귀에 선한 사람이니까. 언제든, 어디서든.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연초에 세운 목표는 이뤄졌는지? “아직. 노력 중이다.”
어떤 목표인지 물어봐도 될까? “나중에 이루게 된다면 말하고 싶다.”
벌써 데뷔 10주년이다. 배우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뭘까? “데뷔작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게 어설펐지만 그래도 지금의 안지호를 만들어 줬으니까.”
오, 의외다. 사실 <23센티미터>를 꼽을 줄 알았는데. 너무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라 답을 피한 건가? “물론 그 작품도 소중하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데뷔작을 말하고 싶다.”
또 1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특별한 남편의 모습이길 바란다.”
특별한 남편? 보통은 평범한 남편 혹은 아내를 소원하지 않나? “물론 나도 그렇지만 어차피 평범하긴 힘들 것 같아서.”]
글자로 적히지 않았지만 분명 저 말을 하면서 피식 웃었을 것 같았다. 그 웃음에 상대방은 더 가슴 떨려 했겠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 혜윤은 그 행복을 누리며 잠시 ‘특별한 남편’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혹시 10년 뒤가 아닌 가까운 미래의 모습인 건가?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을 두 번이나 하다니.” (일동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 속의 ‘가까운 미래’라는 단어는 조금 더 오래 바라봤다.
그 단어를 보자 가까운 과거가 떠올랐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함께했던 7번째 밤. 귀여운 커피 쿠폰으로 선물 같은 하루가 더해졌던, 그 밤의 기억이었다. 그 과거 속에 ‘가까운 미래’가 있었다.
그 밤, 지호는 또 한 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엔 꼬깃꼬깃해진 쿠폰이 한 장 더 있었다.
‘나 이제 쿠폰 한 장 남았는데. 이건 좀…… 큰 거 걸어도 되나?’
‘큰 거?’
‘응. 제일 큰 거.’
언제 두 장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귀엽다는 생각으로 방긋 웃으며 그를 볼 때쯤, 한순간 지호의 눈빛이 훅 깊어졌다. 그에 걸맞은 목소리에 잠시 가슴이 내려앉았던 기억.
‘이거 10개 다 채우면 결혼하자.’
‘…….’
7일 내내 귀가 얼얼하리만큼 들었던 굵은 빗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가 지나자 다시금 쏴아.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리를 되찾고서야 계속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냉큼 꾹 닫고는 지호를 바라봤다.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 절실했다. 다시 한번 깨끗하게 비워진 쿠폰을 내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엄청 신중하게…… 자야겠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침을 꿀꺽 삼켰을 땐, 빗소리를 가볍게 압도하는 남자의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큭큭. 진짜 미치겠네. 혜윤아, 설마 내가…… 그런 걸로 10번 채우자고 하겠어? 결혼인데?’
‘아…….’
갑자기 밀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진짜 짐승은 나였구나. 어색한 기분에 가렵지도 않은 턱을 살살 긁었다. 눈만 또르르 굴리며 괜히 궁금하지도 않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와, 비 엄청 많이 온다.’
바보 같은 입은 누가 봐도 할 말 없는 사람인 걸 티 내기도 했다.
‘와, 장혜윤 엄청 야해졌네. 그런 생각만 하고.’
‘……그러게. 그래도…… 나 좋지?’
‘응. 그래서 더 좋지.’
어색하게 떠듬떠듬 묻는 말에 지호가 바짝 고개를 낮췄다. 기울어진 시선을 타고 제 얼굴에 닿는 눈빛이 진짜 간지러웠기에, 이번엔 정말로 뺨을 긁적였다.
‘같이 살고 싶을 만큼 너무 좋다 싶을 때, 한 번씩 찍어 줘. 정말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을 때.’
힘 조절을 못 한 손이 뺨 위에 붉은 선을 만든 것 같았다. 지호가 서둘러 그 손을 내려주며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소중히 매만지는 손짓이 부끄러워 다시 턱을 낮췄다. 떨궈진 시선이 자리를 잡은 곳엔 이전에 놓쳤던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쿠폰 밑에 적힌 작은 글씨들.
[쿠폰의 사용기한은 발행일로부터 6개월입니다.]
이미 쿠폰 하나를 사용하기까지 한 능력자였으니, 이 문장도 읽었겠지. 혜윤의 눈망울이 곱게 떨렸다.
‘그럼 오늘부터 6개월 안에 10개 모으겠다는 거야?’
‘응. 노력해야지.’
‘그 안에 못 모으면? 그럼…… 포기하는 거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봤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나는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걸까. 그것도 헷갈렸는데.
‘아니지. 카페 가서 또 쿠폰 훔쳐 와야지. 다시 시작하게.’
지호의 대답에 활짝 웃음이 터진 걸 보면, 이런 대답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 ‘몇 장 더 챙겨올걸.’ 같은 말이 너무 진심이라서 더 웃음이 터졌다. 웃음 같은 행복이.
6개월 안에 도장 10개, 그리고 결혼. 잠시 이 말들을 되새겼다. 결혼은 하룻밤을 함께하는 것보다 훨씬 큰 거니까. 정말 정말 큰 사건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목소리에 자잘한 망설임을 불어 넣었다.
‘찍었다가 지우는 건 안 되지?’
‘와……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큭큭. 그냥 궁금해서.’
생각보다 너무 서운한 표정에 오히려 제가 놀랐었다. 그래서 얼른 장난이라고, 오히려 두 개씩 찍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려 했지만 지호가 훨씬 빨랐다.
훨씬 빠르고 진지했지.
‘응. 지우는 건 안 돼. 그래서 도장은 신중히 찍는 거잖아. 여러 번 고민하고, 따져보고, 되돌리지 못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 때.’
‘지호야, 누가…… 커피 쿠폰에 도장을 그렇게 무섭게 찍어.’
절절 끓는 제 눈빛이 결국 키득키득. 그때야 서운한 얼굴이 다 장난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지 싶었지만, 금세 다행스럽지 않은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6개월 동안 반 이상을 못 보내.’
‘……응. 그래도 한번 해 볼게. 최선을 다해서.’
‘그냥 다녀와서 하는 건 어때?’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쿠폰을 건넨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알 것 같은 마음이 정말 정답이라는 건, 곧 이어지는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신 6개월짜리 노력 말고, 평생 할 수 있는 노력만 보여줄게.’
조금 전 그 말은, 아마 하지 않았어도 들렸을 것 같았다. 어떤 눈빛은 말보다 더 선명하고 큰 소리를 냈으니까. 그래서 꼭 울 것 같은 감동을 주기도 했으니까.
‘일단 지금 하나 찍고 시작하자.’
‘아…… 이런 말에 약하구나. 알았어.’
‘우와아아!’
도장 대신 하트를 그리려던 손이 절반만 만들고는 멈추어 섰다. 뾰로통하게 째려보는 눈빛에도 ‘지우는 건 안 돼.’라면서 얼른 마저 그리라고 재촉하는 그였다. 한껏 쏘아 본 뒤에야 하트 하나를 그렸다.
그렇게 9월까지, 혜윤은 5개의 하트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