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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너를 그리는 시간 (110/110)


109. 너를 그리는 시간
2023.06.14.


지호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양한 감정들이 그 위에 오묘한 표정을 그렸다.


“왜. 지호 씨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

 
노배우의 깊게 팬 팔자주름에 의문이 고였다. 까딱 기우는 감독의 고갯짓에도 같은 마음이 비쳤다. 대답을 바라는 눈빛의 온기들이 몹시도 온온했다.


“그렇진 않은데…… 제 생각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낮은 울림을 주는 목소리에 두 남자는 비슷한 끄덕임을 보였다. 길지 않은 대답 속에서 지호의 깊은 속내가 읽혔기에. 감정을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들려주는 진심이란 건, 두 남자의 가슴에도 감동을 일게 했다.


“떨어져 있는 게 마음 쓰이나 보네.”

 
노배우의 가느다란 눈에 긍정을 대신하는 옅은 미소가 담겼다. 그가 유독 수려한 얼굴을 몇 초쯤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호 씨, 우리 여기까지 20시간쯤 걸린 거 알지?”

“네?”

“우리 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본 나라랬잖아, 첫날. 기억 안 나?”

“아, 그랬죠.”

 
새삼스러운 이야기에 지호가 흥미롭게 반응했다. 그때쯤엔 감독의 시선 역시 지호와 함께였다.


“생판 외딴 나라에 말 통하는 사람이라곤 여기 있는 사람들뿐인데…….”

“…….”

“지호 씨는 지금 우리랑 누구 얘기만 해? 응? 말수도 없는 사람이.”

 
‘생각은 또 얼마나 하겠어. 온종일 하겠지.’라는 말 뒤에 서글서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호와 감독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감독은 힐끔 눈을 돌려 지호를 살피기도 했다. 그 틈으로 노배우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렇게 애틋한데 잠깐 떨어져 있는 게 뭐가 대수야. 여자친구가 그 속 다 알 거야. 괜한 거로 자책하지 마.”

“……감사합니다.”

 
연륜이 담긴 위로에 지호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땐 그 못지않은 연륜이 들리기도 했다. 감독의 목소리에 얄궂은 장난이 비쳤다. 꿈틀거리는 입꼬리가 낭만이 아닌 현실을 들려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떨어져 있는 것도 좋다? 간절히 바랄 때도 있어.”

“에이, 아직은 모를 때야. 몰라야 하고.”

 
지호를 제외한 두 사람이 키득대며 비슷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유부남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눈짓 같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이런 말 하게 돼서 미안한데…… 그래도 빨리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던 때, 감독이 쥐고 있던 웃음을 똑 끊어냈다. 즐거움이 가라앉은 얼굴에 망설임이 역력했다. 10분 내내 받기만 하던 위로를 그제야 되갚는 지호였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키스신 하나만 추가하고 싶은데. 아, 너무 말 꺼낸 타이밍이 최악이지?”

 
감독의 위엄도 잊은 채 힐끗 눈치를 살피는 얼굴. 이번엔 세 사람 모두 웃을 수 있었다. ‘절대 딥하지 않아. 아주 가볍게. 약속해.’ 분위기 좋을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절절했다.

웃음이 터진 이상 영 최악의 타이밍도 아니었다.


 

***

그날 밤. 지호는 혜윤에게 추가된 서사와 장면들을 털어놨다. 하필 이 시간이 혜윤에겐 막 눈을 뜬 아침이었기에, 미안함이 컸다. 하루를 씁쓸하게 시작하려나 싶은 순간, 짧은 코웃음 뒤로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작품이고 일이잖아.

“와…….”

 
졸음을 칭얼거릴 것 같은 귀여운 목소리가 어른스러움을 들려줬다. 그래서 곧장 감탄이 터졌지만.


-……나 돌멩이 좀 차고 올게.

“큭큭. 돌멩이는 발 아프니까, 나중에 나 뻥뻥 차.”

 
더불어 즐거움까지 챙겨주는 혜윤이었다. 핸드폰 너머의 살랑이는 웃음소리가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그 다행스러움이 오래가진 못했다.


-대신 다치지만 마. 그건 정말 정말 싫으니까.

“…….”

 
졸음을 한 겹 걷어낸 목소리가 단호했다. 지호가 제 팔을 내려봤다. 욱신욱신. 그럭저럭 괜찮던 통증이 불현듯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다쳤다는 것보다 더 싫은 건, 말해 주지 않는 거겠지. 지호가 조용히 혜윤의 마음을 헤아렸다.


-……지호야, 왜 대답이 없어?

 
하지만 상대를 헤아리려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읽는다는 여자는, 어느덧 말 없는 공백에 흐르는 희미한 숨결마저 읽어낼 수 있었다. 되묻는 목소리에 절절 끓는 불안과 걱정. 지호는 고백과 동시에 달래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팔을 조금 다쳤어.”

-뭐?!

 
그리고 얼른 말을 이을 참이었다. 정말 조금 다쳤다고, 거기에 네가 챙겨준 약 때문에 싹 나았다고. 하지만 그 생각들은 소리를 입을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이 너무나 빠르고 거셌기에.


-팔 어디를! 얼마나? 솔직히 말해봐. 조금 아니지? 어쩌다가 다친 건데? 병원은 갔고? 대체 언제 그런 거야?

 
다다다다 쏘아대는 목소리가 앙칼졌다. 그런데 희한했다. 어째서 이렇게나 듣기 좋은 건지, 꼭 단잠을 부르는 산들바람 같았다. 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붙었다. 대답 없이 걱정을 주워 담기만 하는 그였다.

그랬기에 혜윤은 잠시 말을 멈춰야만 했다.


-……많이 아파?

 
억울한 목소리를 타고 온 그녀의 애틋함이 지호의 귓가에 흘려들었다. 그가 살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혜윤의 아침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누워 있다가 벌떡 침대 위에 앉았겠지. 아빠 다리를 하고 울상인 얼굴로 제 대답을 기다릴 테고. 그 얼굴이 떠오르자 스스로도 상상 못 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어울리지도 않는 시무룩한 목소리와 함께.


“응…… 많이 아파…….”

 
정말이지 못된 놈이 확실했다.


-하아…… 나 너무 속상하다.

 
응석을 부리는 목소리가 제 생각에도 꽤 그럴싸했다. 혜윤의 한숨이 어쩐지 뜨끈뜨끈한 기분이었다.


-……빨리 보고 싶어.

 
이어지는 말까지도 한결같았다. 그래서 슬금슬금 웃음이 났다. 더 하면 안 되지, 정말 울 것 같은 목소리니까. 지호가 행복이 번진 입술을 혀로 축였다.


-왜 또 대답이 없어. 지금도 아파서 그래?

“……좋아서.”

-뭐?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다다다. 솔직히 털어놨기에 그 역시 끅끅 소리 내 웃을 수 있었다.

뭐가 좋냐면서 삐악삐악하다가도 아프지 말라는 말은 젖은 목소리를 냈다. ‘아, 듣기 좋다.’라는 말에는 또다시 삐약삐약.

지호는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몇 번 더 칭얼거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12월의 두 번째 토요일. 혜윤은 몇 달 만에 지호의 집을 찾았다. 지호가 돌아오기로 한 다음 주, 그 전에 집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주인 없이 몇 달을 비워놓은 집은 아무래도 휑하겠지. 그런 예상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 각오로는, 이렇게까지 쏟아지는 먹먹함을 막아낼 수 없었다.


“와…….”

 
혜윤은 가만히 거실을 바라봤다. 그러자 언젠가의 목소리가 적막 한가운데 되울렸다.


‘항상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거든요. 어둡고, 고요하고.’

 
<아기 늑대>를 선물하던 날, 지호의 목소리였다. 홀로 지낸 시간을 측은하게 보던 눈빛, 그 눈빛을 읽어낸 그의 대답까지.


‘아니. 그렇진 않았어. 그냥 빛이 없고 소리가 없는 것뿐이었지.’

 
그의 말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란 게 어떤 건지 소름 끼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진공 상태인 양 아무런 빛도, 소리도 없는 곳. 어쩌면 검은색의 음산한 연기가 보일 것만 같은.

고작 8시밖에 안 됐음에도 집은 어둠에 잡아먹혀 있었다. 새하얀 벽과 바닥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항상 더 늦은 새벽에 들어왔겠지.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집 앞으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봉기뿐일 테고. 이 견고한 성에, 성을 가득 메운 우주 속에 홀로 있었겠지.


“……지호야, 매일 이 집에서…… 혼자 뭐 했어?”

 
혜윤의 혼잣말이 적막한 우주 속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넓은 집에 그의 얼굴이라고는, 서재에서 침실로 자리를 옮긴 아빠와의 사진이 전부였다. 그러니 어둠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겠지.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혜윤이 집 안의 모든 불을 켰다. 이제 막 켠 보일러가 느릿느릿 바닥을 데웠다. 냉혹한 어둠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

12월 2일에 끝날 예정이었던 촬영은 2주가 더 늘어나고 말았다. 어쩌면 해를 넘길 수도 있을 거라 했지만, 다행스러웠다. D-3. 어느덧 귀국일은 3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호는 촬영이 멈출 때마다 눈앞의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붉은 사막은 이국적인 걸 넘어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기분을 안겼다. 새로운 곳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그럴 때마다 늘 같은 감상을 되감았던 것 같았다.

너무나 똑같은 생각의 반복이었기에, 이젠 그 생각들이 문장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오늘은 낯간지러워도 종이에 옮겨 적어야지 싶었다. 먼 거리를 핑계 삼아 입으로는 못 전할 마음을 전해 주기로.

촬영이 끝난 밤. 침대에 기대앉은 지호는 대본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렸다. 그러고는 거리낌 없이 펜을 움직였다. 가벼운 인사를 시작으로 이제 곧 돌아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썼다. 이 편지와 자신 중 누가 먼저 도착할지 궁금하다는 장난기도 함께.

그리고 그 뒤엔, 3개월 넘게 숨 쉬듯이 되풀이했던 생각들을 적었다.

[……여기 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감탄했을까.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우와, 했겠지. 지호야, 저기 봐. 작은 손가락으로 열심히도 이곳저곳을 가리키면서.

매일 이런 생각을 반복해. 그러다 보면 우스운 생각도 들어. 여기엔 네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없는 것 같다고. 온통 너만 있는 것 같아.

언젠가 내 외로움을 안타까워했던 너의 얼굴이 기억나. 물론 그때의 내 대답도 전부. 괜찮았다고 했었잖아.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응. 진짜 그랬으니까.

그런데 혜윤아, 이젠 조금 자신이 없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손가락이 홀린 듯이 글자들을 적어냈다. 어떨 때는 하루에도 서너 번쯤 되풀이한 마음이었기에 머리를 거칠 필요가 없는 문장들이었다.

[사랑해.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곧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두 번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머쓱한 마음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핸드폰 속으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앨범 속에는 봄에 함께했던 화보의 미공개 컷들이 가득했다. 지호의 손끝이 말갛게 웃고 있는 혜윤의 얼굴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



[지호야, 귀국 축하해! 오늘은 꼭 집에 가서 쉬어! 우리 집 오지 말고. 꼭! 꼭! 집에 가서 쉬어! 알았지? 꼭이야! (오후 11:23)]

 
새벽 1시, 트리 장식이 가득한 공항 한구석에서. 지호가 몇 시간 전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구구절절한 메시지가 크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 지금 너희 집에 있어!’라고. 이 이상은 힘들 줄 알았는데, 더 귀여워질 수도 있는 거였구나.


“집으로 가는 거지? 작가님 댁에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응. 집으로 가.”

 
지호의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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