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다시 만난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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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만난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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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만난 그놈.
2022.07.06.
“어머! 우리 서준이 왔구나.”
그놈을 가장 격하게 반긴 것은 우리 엄마였다. 윤희 아줌마가 아니었다.
‘주책이야, 진짜.’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놈, 지서준은 소년미를 벗어던지고 완벽한 남자의 모양을 갖췄다.
원래 좋았던 몸은 더 좋아졌다. 너른 등판은 자가번식했는지 더욱 넓어졌고 젖살이 빠져 날렵해진 얼굴은 지적인 느낌을 더해줬다. 어른 지서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엄마, 다녀왔어요.”
“그래. 어서 와. 오는데 힘들었지?”
“아니요. 그렇지도 않았어요.”
두 어머니들의 격한 환영 인사에 지서준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두 엄마는 상차림을 위해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고 옆에서 허허 웃던 승호 아저씨는 그의 손에 있던 작은 짐마저 냉큼 가져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네?”
그놈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지서준의 압도적인 후광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기가 죽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 그러네. 오랜만이야.”
왜 말은 더듬고 난리야. 또 왜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향하는가. 두 눈을 들어 당당하게 그놈을 바라보라고 뇌에서 외쳐댔지만, 본능은 그러지 못했다.
“너는 어떻게 변한 게 없냐.”
“그, 그러는 너는!”
사실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 그놈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이 오기 때문에 지서준과 싸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거늘, 여전히 내 오기는 눈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보면 몰라?”
지서준이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고는 욕실로 사라졌다.
“보면 몰라?”
나는 과장되게 그를 흉내 내면서 한껏 조롱했으나, 나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지서준이 간단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 즘 일명 ‘임금님 수라상 저리 가라’ 상차림이 완벽히 세팅되었다.
나는 그저 음식이 담긴 접시만 날랐을 뿐인데 지쳐버린 것은 왜일까.
“두 분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니에요?”
지서준이 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산뜻한 미소를 띠며 두 여사님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먹는 엄마 집밥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여기서 왜 우리 엄마가 대답했는지는 모르는데, 두 분의 마음이 그랬단다.
이 반찬에서 기웃거리고 저 반찬에서 기웃거리느라 수북했던 내 밥공기가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한 공기 더 먹어야 하나. 한 공기 더 달라고 말하면 지서준이 비웃을 것이 뻔한데……. 결정을 못 하는 사이 밥그릇에서 밥이 점점 사라져갔다.
“저 드릴 말씀 있어요.”
“그래. 편하게 말해. 무슨 일이야?”
승호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저, 자취하려고요.”
지서준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놈에게 꽂혔다.
“왜?”
윤희 아줌마가 물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서 지냈으면 해요. 야근도 잦은 직업이라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흠…… 그래. 내년이면 서른인데 부모님 집에서 지내는 것은 조금 불편하겠지.”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일 때문에 그래요.”
행여 부모님이 서운해하기라도 할까 봐 지서준이 열심히 설명을 붙였다.
사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렸다. 바로 옆 동에 살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낼 것이 뻔한데, 자취하러 나간다면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 단속을 하며 갈비 한 점을 입에 물었다.
“집은 정했고?”
승호 아저씨는 무덤덤하게 지서준에게 물었다.
“아니요. 천천히 알아보려고요. 출근까지는 3주 정도 남았으니 이제 알아봐야죠.”
“그래. 신중하게 생각하고 잘 알아봐.”
“네.”
솔직히 내심 부럽기도 했다. 언젠가는 할지도 모르는 결혼에 앞서 독립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이래저래 여건이 맞지 않아 아직도 부모님 밑에서 빌붙어 지내고 있지만.
“내일 뭐 해?”
갑자기 지서준이 나에게 물었다.
“나? 나?”
“그래. 너.”
나는 불안감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숨겼다.
“그건 왜…….”
“내일 집 알아보러 같이 가.”
“내일? 내일 나 약속 있어.”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깐깐쟁이 지서준을 따라 집 보러 다니다가는 내 황금 같은 일요일이 아깝게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무슨 약속? 남자친구도 없는 게 약속은 무슨. 오랜만에 친구가 한국에 와서 부탁하는데, 웬만하면 약속 취소해.”
친자검사를 해봐야 하나…….
우리 엄마의 말에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굳이 친자검사를 하지 않아도, 나는 김인영 여사의 딸이 분명했다. 엄마와 나는 얼굴이 친자를 나타내는 확실한 증명인 셈이었다.
“그러면 안 되지. 우리 다율이도 사생활이 있는 건데. 다율아, 서준이 신경 쓰지 말고 친구 만나.”
아. 역시. 승호 아저씨밖에 없어요.
나는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
식사가 끝나고 어마어마한 설거지가 남았다. 먹을 때는 좋았는데,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공짜로 먹고 튈 수는 없는 법.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천천히 설거지해나갔다.
승호 아저씨가 본인이 하겠다며 팔을 걷었지만, 우리 엄마가 부엌에서 쫓아 버렸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설거지라도 해야 한다며 나를 싱크대 앞에 세워둔 사람도 우리 엄마였다.
자꾸 의심은 가지만 우리 엄마는 친엄마다.
거의 다 해치웠을 때, 그놈이 물을 마신 물컵을 싱크대에 넣었다.
“빨리 가지고 오지.”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거실로 돌아가지 않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그놈.
“왜…… 왜!”
“너.”
그놈이 나를 불렀다. 다시 세차게 심장이 고동쳤다.
“내일 약속 없지?”
그놈이 알아차렸다.
세차게 고동치던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 있는데?”
“으흠. 그래?”
“응!”
“누구랑?”
“그걸 내가 꼭 말해야 하나?”
나는 지서준이 마지막에 들고 온 물컵을 수세미로 벅벅 문질렀다.
“내일 10시. 집 앞으로 나와 있어.”
“나 약속 있다니까?”
마지막 그릇까지 닦고 고무장갑을 벗으려는데 그놈이 대뜸 약속 시각을 언급했다.
“없는 거 다 아니까. 내일 10시.”
그러고는 미련도 없이 뒤돌아 거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내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구나.
자기 부모님들과 우리 엄마 사이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는 그놈을 보니 어렸을 때 기억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 하나인 거짓말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그놈은 나의 거짓말을 간파했다.
.
.
.
“우리 엄마가 그랬어! 나는 곤쥬님이라고!”
“네가 어떻게 공쥬님이야?”
“으……. 나 곤쥬님이야!”
“우리나라는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니야. 너희 부모님이 왕과 왕비가 아닌데 어떻게 네가 공주님이야. 너희 엄마가 거짓말한 거야.”
사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공주님이라 하지 않았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친구의 엄마가 친구에게 ‘우리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어린 지서준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블록을 쌓으며 무덤덤하게 나의 거짓말의 오류에 관해서 설명하던 어린 지서준.
그때부터였던가, 나의 거짓말은 단 한 번도 그놈에게 통한 적이 없었다.
.
.
.
“다율아. 거기서 뭐 해. 이리와 같이 먹자.”
승호 아저씨가 날 불렀다.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대답했다.
“네. 갈게요.”
**
아침 8시 알람에 맞춰 일어났다. 약속이 없는 날 알람에 일어나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내가 일어나는 이유가 지서준 때문이라는 것은 더 최악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사람 꼴을 만들어 현관문을 열고 나간 시각은 9시 50분.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되기에 서둘러야 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지서준이 있었다.
셔츠에 슬랙스 바지, 멀끔한 차림의 지서준은 핸드폰을 보며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지서준은 무언가 집중하거나 고민하면 미간이 애매하게 꼬깃꼬깃해지는데 지금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내가 물으며 다가가자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 늦었네.”
“내가 맨날 늦는 줄 알아?”
“응.”
가지 말까? 그냥 지금 바로 다시 집으로 올라갈까.
“회사 근처 매물이 별로 없네.”
“회사가 어디 있는데.”
그놈이 말한 곳은 우리 회사가 있는 부근이었다. 뭐. 외국계 회사가 많은 곳이니까 충분히 겹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서준이 어디 입사했는지 듣지를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알아서 뭐할까 싶어 묻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서준과 방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주말 출근길을 되짚어가는 것은 꽤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하철을 타기 싫다며 택시를 잡아탄 지서준이었다.
미리 몇 가지 매물을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부동산에서 크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짧은 설명을 듣고 직원과 함께 바로 방을 보러 나갈 수 있었다.
첫 번째 집을 보러 들어간 순간.
“우와…….”
상당히 편리한 교통망, 넓고 쾌적한 집, 이렇게 환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채광. 풀옵션. 내가 꿈에 그리던 자취방이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여, 여기는 얼마에요?”
“전세는 4억 대 초반입니다. 월세는 집주인분이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요. 월세로 원하시면 주인분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좋네요.”
옆에서 그놈이 말했다.
좋네요?
지금 4억의 전세를 지급할 능력이 된다는 것인가?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그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돈 있어?”
나는 낮게 소곤거렸다.
“있으니까 보지.”
그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후 부엌이며 베란다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놈의 아우라가 더 짙어진 이유는 돈에서 오는 여유였던 걸까. 나는 새삼 지서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지서준이 말없이 둘러보고만 있자 부동산업자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자차가 있으시면 이곳이 아주 좋습니다. 주차장 공간도 널찍합니다. 넓은 공간에 비해서 관리비도 적은 편이고요. 즉시 입주 가능합니다. 그리고 여자친구분과 지내셔도 충분히 넓은 공간이죠. 그렇죠?”
부동산 직원이 나에게 동조를 구했다. 지금 이 사람, 나를 저놈의 여자친구로 보는 건가?
“여자친구 아닙니다.”
지서준이 무표정으로 잽싸게 정정했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아하. 하하하. 그러시군요. 보통 여자친구분들이랑 보러오셔서……. 제가 오해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놈에게만 사과하는 부동산 직원이었다. 나도 기분 나쁘다고!
“다른 곳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내가 따질 시간도 없이 지서준이 말했다.
**
우리는 세 군데 더 둘러보았지만, 결국 결정했던 집은 첫 번째 집이었다.
아니. 그러면 뭐하러 이곳저곳을 둘러본단 말인가.
나는 생각보다 힘든 일정에 다리가 아파져 와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며 그놈을 흘끗거렸다.
“불만 있으면 제대로 말해.”
식당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지서준이 내 앞에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사 언제 해?”
“바로 해야지. 즉시 입주 가능하댔으니까.”
“아줌마, 아저씨 서운하시겠네.”
“…….”
대꾸 없이 이번에는 물을 따라 내 앞에 두었다.
“그럼, 회사는 언제부터 출근한다고?”
“3주 뒤.”
“회사가 어딘데?”
나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도록.
“S.T. Corporation.”
나는 너무나 익숙한 회사 이름에 내 귀를 의심했다.
“어디?”
“스펠링까지 불러줘야 해?”
친절하게도 천천히 스펠링을 하나하나 읊조리는 지서준.
맙소사.
그놈이 말한 회사는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였다. 즉 우리는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된 것이다.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