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1.
(3/97)
3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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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1.
2022.07.10.
망했구나. 나는 망했어.
그놈과 같은 회사에 다니다니. 바닥이 툭 꺼지며 내 몸도 같이 꺼진 것 같이 힘이 쭉 빠져버렸다.
“반응이 뭐가 그래?”
“응? 아, 아니야. 처음 들어보는 회사네. 하하. 하하하.”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왔다. 이왕 거짓말한 것, 숨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숨어다녀 보기로 했다.
내가 속해 있는 팀 특성상 안 마주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나는 늦게 맞는 매를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 녀석과 얽히는 것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았다.
“너는 어디 회사 다니는데?”
지서준이 팔짱을 끼며 오만한 눈빛으로 물었다.
“나? 나야 뭐…… 너는 들어도 몰라. 작은 회사야…… 작아…… 작지.”
“홈페이지도 없어? 검색해보면 알겠지.”
“어! 홈페이지도 없어! 가족이 운영하는 아주 화목한 회사야. 아주, 가족! 같은 회사지. 들어는 봤나? 응?”
당황하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지서준의 짙고 선명한 눈썹 하나가 올라갔다.
“아주머니가 너 회사 어디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김인영 여사가 내가 취업했을 때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불경기에 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며 한동안 한껏 어깨를 펴고 다녔었지.
몰랐는데 미국에 있는 지서준에게까지 전화를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난 지서준의 머리가 내 회사 이름을 떠올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국밥 나왔습니다.”
불안감에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다.
지서준이 먹고 싶다고 했던 국밥집으로 데리고 왔다.
빨갛고 맛있어 보이는 국밥이 보글보글 끓어댔다. 밑반찬으로 나온 부추, 겉절이, 섞박지가 조화롭게 자리했다.
나는 섞박지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며 말했다.
“배고프지? 빨리 먹어. 여기 엄청 맛있어.”
나는 내 앞에 앉은 놈이 더는 생각하지 못하도록 잽싸게 음식을 권했다.
이곳은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집이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맛집이었는데 조금 먼 거리임에도 이 맛이 떠올라 자주 오고는 했다.
지서준은 한식을 매우 좋아했다. 입맛은 참 토속적인 놈인데, 어떻게 미국에서 10년 동안 있었는지…….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지서준은 정확히 8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한 것이다. 중간에 한국으로 들어와 군 복무를 했다.
그때 나는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바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바람에 마주치지는 못했다.
도피가 섞인 외국 생활이었다.
군대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휴가라는 제도가 있었다. 휴가에서 나올 때면 그놈에게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 지서준이 상당히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너도 빨리 먹어.”
지서준은 나에게 권한 후 한 숟가락 푹 퍼 입으로 가져갔다. 참 맛있게도 먹는다.
깨작깨작 먹지 않는 지서준은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지서준이 먹는 모습을 보니 허기짐을 느껴 나도 빠르게 수저를 들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다행인지 그놈이 내가 다니는 회사를 떠올리기를 그만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이니 느긋하게 국밥을 즐겼다.
국밥을 즐기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술 생각. 나는 그놈의 의사는 묻지 않고 소주를 주문했다.
국밥에는 소주지. 빠지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주중 점심시간에 맞춰 이곳에 왔을 때는 소주를 시키지 못했었다. 그게 매번 아쉬웠었다.
“낮부터?”
“국밥을 두고 소주를 먹지 않으면 그건 반칙이야.”
“너 도대체 나 없는 동안 뭐하면서 지낸 거냐.”
고등학교까지만 같이 붙어 다녀 지서준과 술 마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보여주기에는 지서준은 조금 무서웠다.
아마 또 다른 나를 지서준이 20대 때 만났다면 나는 지금까지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식당 이모님은 말없이 소주 한 병과 소주잔 두 개를 우리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너도 마실래?”
나는 소주병을 마구 흔들어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저 나를 보며 저작근 운동만 열심히 하던 지서준이 내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채 갔다.
그러더니 시원하게 소주 뚜껑을 열어 나의 잔에 졸졸졸 따랐다. 그러고는 나에게 소주병을 넘겼다.
“소주 마셔본 적 있어?”
“응.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나는 지서준에게 받은 소주병을 기울여 그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그렇구나. 좋은 경험 했네.”
심드렁하니 대답하며 지서준의 소주잔에 소주를 채웠다. 병을 내려놓고 소주가 영롱하게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뭐 해?”
“짠해야지!”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려 내 잔에 건배했다.
“크흐하아. 좋다.”
나는 한입에 소주를 털어놓고 국밥을 안주 삼았다. 이 맛이지. 나는 만족의 고갯짓을 했다.
“진짜. 아저씨야? 그 반응은 뭐야.”
칠색 팔색하며 그놈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이런 반응이 정상 아니야?”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잔을 머리에 털지 않아서? 그것 때문에?
“아니……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러던데?”
“참나. 그 여자들은 어떻게 마시는데?”
내가 묻자 지서준은 말없이 비어있는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한입에 털어 넣더니 그저 콧잔등만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짧게 ‘하.’ 숨을 내뱉는 그놈이었다.
설마, 지금 재연한 건가. 대체 어떤 여자들이랑 술을 마신 것인지 내가 다 궁금해졌다.
“진짜 그렇게 여자들이 마셨다고?”
“어.”
재현을 끝낸 지서준은 국밥을 마구 퍼먹으며 말했다.
헛웃음이 마구 흘러나왔다. 내가 살다 살다 저런 소리를 다 듣는구나. 어이가 없어 내가 끅끅거리며 웃자 더욱 인상을 쓴 지서준이었다.
“내가 너 연애 자주 해보라고 했지?”
내 말에 지서준이 먹던 것을 멈추고 숟가락을 ‘탁’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잠깐 연애 이야기를 꺼낸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 아니…… 그거 다 불여우들이 하는 짓이야. 여자애들이 여우 짓 하는 것도 모르면서……너는 여자들이 많이 들러붙으니까 제대로 된 애들을 만나려면…… 보는 눈을…….”
나는 지서준의 눈빛에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연애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지서준은 엄청나게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내가 연애 얘기를 꺼내면 가장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노려보다가 나를 골탕 먹였다.
골탕 먹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점심시간 전교생이 있는 식당에서 일부러 내 앞에서 밥 먹기, 여자애들 앞에서 어깨동무하기, 체육대회 때 농구 경기를 하다가 갑자기 달려와 아는 척하거나 소지품 맡기기 등등 아주 악질이었다.
그놈이 그런 짓을 하고 가면 온종일, 아니 일주일은 넘게 여자아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행동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한 행동이었다.
그때 생각을 하니 팔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그런 지서준에게 내가 오늘 연애 얘기에 대해 꺼낸 것이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나.
지서준을 향한 경계의 날이 무뎌졌나 보다. 10년이 그렇게 만들었나.
짧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변명하기를 포기하고 체념한 듯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오늘 소주가 다네…….”
앞에 있는 지서준이 쓴맛이라 그럴까, 오늘따라 소주가 매우 달았다. 빈 소주병이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마셔주던 지서준이 갑자기 나의 소주잔을 빼앗았다.
“그만 마시지?”
“왜. 우리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너 내일 출근 안 해?”
“에잇! 그런 재수 없는 이야기를.”
나는 지서준의 손에서 다시 소주병을 빼앗았다. 소주병을 가져가 다시 내 잔에 졸졸 따라 부었다. 찰랑거리는 모양새가 아주 많이 보기 좋았다.
“너, 실수하면 가만 안 둔다.”
“딸꾹. 흡. 딸꾹.”
나는 지서준의 경고성 짙은 말에 딸꾹질을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딸꾹질을 할까.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졌다.
그래서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이 집은 머릿고기도 잘하네.
그래서 술이 더 술술 들어갔다.
**
“아. 죽겠다.”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 죽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칼칼한 목이라도 축여야 살 것 같아 간신히 눈을 떴다.
여기…… 어디지?
나는 너무나 낯선 천장에 잠깐 뇌가 정지했다.
“미친…….”
정지했던 뇌가 삐거덕삐거덕 돌아가며 내가 어떤 상황인지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몸이 시원한 것이 머릿속에서는 ‘너 지금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려 확인만 하면 되는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후하. 후하.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눈을 찔끔 떠 이불을 들춰 보았다.
“미쳤네. 미쳤어. 문다율 아주 완벽히 미쳤어.”
예상대로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울긋불긋한 자국들은 뭐란 말인가. 나 누구랑 잔 거야? 누구랑?
그때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업.”
나는 잔뜩 움츠리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신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내 옆에는 나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누워 있었다.
누구야. 나 도대체 누구랑 잔 거야.
이불을 뻥뻥 차대고 싶었지만 내가 알몸이라는 사실이 겨우 내 발을 잡아 두었다.
바닥에는 옷가지들과 속옷이 나뒹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입고 도망갈까.
땀을 흘려 몸이 찝찝한데 조용히 씻고 나갈까.
그러다 옆에 있는 남자가 깨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아, 안녕하세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라도 해야 하나.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나저나 옆에는 누가 있는 거지? 너무나 뒤늦게 든 생각이지만 용기를 내고 고개를 슥 돌려 확인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잔뜩 성이 나 있는 등이었다.
넓기도 넓다. 태평양 같은 등은 쩍쩍 갈라져 남성미를 뽐내고 있었다. 그의 태평양에는 가뭄이 든 것 같았다. 내가 잔뜩 끌어간 이불 때문에 그의 나신은 엉덩이 바로 위까지 드러나 있었는데, 그 부분이 참 아찔했다.
아주 좋았다.
내가 이런 남자를 어떻게 침대까지 끌고 온 거지? 의아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의아함이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몸매는 미남인데 얼굴은 어떨까. 지서준의 영향으로 딱히 잘생긴 얼굴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궁금한 마음에 이불을 꼭 끌어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나의 외침에도 인상만 찌푸릴 뿐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우려 손을 가져다 댔다 화들짝 놀랐다.
단단한 맨몸이 손끝에서 닿았다. 나는 이불에 벅벅 문질러 이상한 느낌을 지우려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야. 일어나. 야!”
내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자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구기며 눈을 떴다.
지서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