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2.
(4/97)
4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2.
(4/97)
4화. 그놈과 아찔한 실수 2.
2022.07.13.
“뭐야.”
잔뜩 찌푸린 채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렸다.
“야! 움직이지 마!”
그놈이 상체를 들어 올릴 때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이불이 스르륵 내려갔다.
나는 잽싸게 이불을 덮어주며 소리쳤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머리 울리잖아.”
지금 골이 울리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울게 생겼는데.
“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왜 너랑…….”
내가 더듬거리며 그놈에게 물었다.
내가 묻자 미간의 주름을 더욱 깊게 파며 그놈이 말했다.
“정말 기억 안 나?”
“기, 기억?”
나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국밥집에서 다디단 소주를 연거푸 들이부었고,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오자 내가 그놈에게 2차를 외쳐댔다.
그놈은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내가 국밥집 옆의 편의점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머리를 헝클이며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기억 안 나냐고.”
내가 머리를 움켜잡고 생각을 하는 도중 지서준이 다시 한번 물어왔다.
“잠, 잠깐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봐.”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4캔에 만 원’이라는 글자에 홀려 맥주를 종류별로 골라 담아 계산을 했었지.
아마 안주도 필요하다며 캔 땅콩과 김을 나중에 추가로 더 계산했다.
그 후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내 앞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지서준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다음은……. 그다음부터 기억이 없네.
“기억이 안 나.”
“장난해? 빨리 다시 생각해 봐.”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다시 머리를 싸매고 기억하려 애썼지만, 거기서부터는 까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 나…….”
“하…….”
내가 울먹이며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지서준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진짜! 옷 좀 입어!”
나는 갑작스러운 광경에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닫는 소리가 이었다. 그 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씻으러 간 건가?
나는 이불을 빼꼼히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놈의 살덩이는 보이지 않았다.
지서준이 들어간 곳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조금씩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29년.
자그마치 30년의 세월이었다.
나보다 이틀 먼저 태어난 지서준은 내가 태어난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였다.
그러니까 친구로만 29년하고 반을 보낸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그놈과 내가 남자와 여자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문다율. 기억해 이 멍청이야! 기억하라고!”
나는 주먹으로 머리를 ‘퍽’ 소리가 나도록 쥐어박았다.
“그렇게 때려서 되겠어?”
언제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 가리고 머리칼의 물기를 흩트리며 그놈이 나왔다.
“옷 왜 안 입고 나와!”
“내가 옷이 어딨어!”
그걸 왜 나한테 묻는단 말인가. 나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억울하고 분했다.
어떻게 나랑 잘 수 있는 건지. 누군가는 좋아하지도 않는 이성과 밤을 보낼 수 있다고 들었다.
나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마음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놈의 친구가 아닌가.
나는 그놈의 친구도 아니었던 건가. 그냥 저놈의 부하였던 것일까.
서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너 뭐해.”
“뭐…… 흡. 뭐 하긴……. 흐읍.”
“너 울어?”
30대를 코앞에 두고 남자와 잠자리 후 침대에서 우는 모습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비집고 나오는 눈물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야.”
지서준이 이불을 쭉쭉 잡아당겼다.
“잡아당기지 마!”
나는 당황하며 이불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놈의 힘은 강했다.
‘팍’ 소리와 함께 나는 이불과 함께 끌려가 그놈의 가슴팍에 안착했다.
“야!”
나는 볼에 닿은 단단한 감촉에 놀라 서둘러 몸을 일으켜 뒤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그놈이 내 얼굴을 꾹 잡고 놔주지 않아 어정쩡하게 이불을 몸에 두르고 잡혀 있어야 했다.
“우냐고.”
“…….”
지서준의 표정은 아주 위험했다. 약 30년간의 경험상 봤을 때. 지금 지서준은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아, 안 울어.”
“그럼 이건 뭐야.”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쓸더니 물기가 옮겨간 엄지손가락을 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콧물이야.”
“너는 콧물이 눈에서 나와?”
이럴 때는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지. 꼭 저렇게 정정해야 속이 풀리는 놈이었다.
“네가 같이 자 달라고 매달렸으면서 왜 우는 건데.”
“내가?”
지금 지서준이 뭐라고 하는 거지? 누가 누구한테 매달렸다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너,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그렇게 막말하는 거 아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
“그야…….”
사실 지서준은 나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저 똑똑한 머리로 나를 완벽하게 속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했지. 항상 들키면서 지치지 않고 해댔다.
“내가 정말…… 정말로 그랬어?”
“어.”
대답이 아주 단호했다.
“왜?”
“왜? 왜에에?”
내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간신히 그놈의 손에서 내 얼굴을 빼냈다.
“그, 그래. 내가 너한테 하자고 졸랐다고 쳐. 그러면 네가 거부하면 됐잖아.”
오랜만에 똑똑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내가 술에 취해 그놈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룻밤 보내자고 매달렸다고 치자. 그러면 멀쩡한 그놈이 거부했으면 되는 문제였다.
물론 모든 것은 내가 정말로 그놈에게 덤볐다는 가정하였다.
“너. 정말 기억 안 나?”
자꾸 답답한 소리만 해대는 지서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난다고!”
“하.”
지서준은 두통이 오는지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잘 들어. 내가 좋은 말로 설명하는 건 단 한 번뿐이야.”
나는 왠지 모르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술에 취해서 내 옷에 토한 것도 기억 안 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옷에 토해놓고 냄새난다며 저리 가라고 했던 것도 기억 안 나겠네?”
아. 내가 그랬구나. 그래서 저놈의 옷이 없던 거구나…….
“어찌어찌 수습해서 간신히 호텔로 데리고 왔더니 네가 ……하면서 나한테 ……라며 ……했던 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겠지? 응?”
“거, 거짓말.”
“기억도 안 난다면서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 그야…….”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이 이렇게 분하고 원통할 수가. 그놈이 말한 내용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 여태까지 술 먹고 다니면 남자들한테 그러고 다녔어?”
“아니야!”
“정말이야?”
“진짜야……. 낯선 곳에서 깨어난 것도…… 남자친구 아닌 사람하고 잔 것도 처음이야!”
다시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려던 찰나. 호텔 룸으로 지서준의 옷이 도착했다.
문을 열어 옷을 받아든 지서준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일단 씻고 옷부터 입어.”
**
씻고 욕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곱게 개켜있는 내 옷과 속옷이 보였다. 그걸 보고 다시 귀 끝이 붉어졌다.
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돌아가 갈아입고 나오니 처음 집에서 출발할 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서준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응.”
지서준이 앞장서 나갔다. 나도 3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그놈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호텔 로비에서 택시는 금방 잡혔다.
[11시 53분]
어두운 택시 안 차에 딸린 시계에는 그렇게 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와 지서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간이 애매하게 꼬깃꼬깃하게 만든 지서준은 팔짱만 낀 채 차창 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느리게만 흘러가던 시간이 지나고 택시는 나와 그놈의 집 중간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놈이 붙잡았다.
“너 몸은 괜찮아?”
“응?”
“격했던 것 같아서.”
나는 그놈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콱 막아버렸다. 그리고 행여나 주위에 사람이 있나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렸다.
“조용히 좀 해.”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두려운 내 행동이 애처롭지도 않은지 내 손을 치우는 지서준이었다.
“몸 괜찮냐고.”
“조금 아픈…… 아니! 괜찮아!”
나는 말을 끝내고 후다닥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삐삐삐삐삑.
눈 감고도 누를 수 있는 아주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자 얼굴에 잔뜩 오이를 얹은 김인영 여사가 나를 반겼다.
“늦게 들어오네? 지금까지 서준이랑 같이 있었어?”
“아니!”
“아이 깜짝이야!”
내 큰 소리에 김 여사가 화들짝 놀라며 오이 몇 개를 얼굴에서 떨어트렸다.
“어디서 큰 소리야!”
지금 엄마의 소리가 더 크다는 걸 엄마는 알까. 하지만 엄마와 실랑이할 힘이 없었다.
“미안, 엄마. 나 너무 피곤해. 그만 들어갈게.”
뒤통수에 욕 몇 마디가 날아와 꽂혔지만, 지금 그딴 것 따위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익숙한 향기가 코로 들어오자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미쳤네. 미쳤어. 정말로 미친 것 맞네.”
그렇게 ‘미쳤다’라는 소리만 100번은 넘게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
“망했다.”
나는 잠을 설쳤던 탓에 알람을 듣지 못했고, 지각이 확정되었다.
왜 깨워주지 않았냐는 나의 투정에 엄마는 쌍심지를 켰고, 그 결과 나는 조금 더 빨리 준비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준비했어도, 지각은 피할 수 없었다. 헐레벌떡 뛰어나와 콜택시를 타려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문다율.”
“야.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나 지각.”
지서준의 부름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 주세요.”
“네. 갑니다.”
저만치에서 지서준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
오늘은 정말 최악이었다. 월요일인 것도 최악이었지만 지각했던 탓에 팀장님의 갈굼은 엄청났다.
“문다율 대리. 후배도 있는데 창피하지 않아요? 1시간이나 지각하다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정신이요?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내가 정신이 있을 리가. 30년 지기 친구와 잤는데, 어떻게 제정신이겠습니까. 팀장님.
나는 고개를 숙여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하고 나서야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 대리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내 직속 후배 백인하 사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문 대리님 이거…….”
그녀가 내 책상에 슬며시 놓은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 청포도 맛 사탕이었다.
“인하 씨…….”
내가 감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인하 씨였다.
나는 청포도 맛 사탕을 입에 물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으면 출장이 잦아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에 맞춰 준비해야 할 것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지각한 탓에 몇 가지 일 처리를 하지도 못했는데 금세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아침밥도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쥐고 백인하 씨와 구내식당으로 향하다가 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너희 회사 근처로 갈게. 점심시간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