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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남자가 되어버린 그놈 1. (5/97)


5화. 남자가 되어버린 그놈 1.
2022.07.17.



“인하 씨. 먼저 식당으로 갈래요?”

“네? 왜요?”

눈을 똥글똥글 뜨며 인하 씨가 물었다.


“잠깐 통화 좀 하고 갈게요. 먼저 가서 먹고 있어요.”

“음…… 빨리 오셔야 해요. 혼자 밥 먹는 것 어색해요.”

아쉬운 듯 빨리 와야 한다며 다시 말하고는 인하 씨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인하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핸드폰을 들고 잽싸게 비품실로 튀었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얼마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놈이 전화를 받았다.


“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너희 회사 근처야.”

“우리 회사? 내가 회사 이름을 말해줬던가?”

나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놈에게 회사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었다.


“아니. 네가 말했잖아. 너희 회사 내가 다닐 회사 근처라며, 일단 S.T Corporation 앞에 왔어.”

맙소사. 회사 바로 앞에 와 있다는 말에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미 이곳까지 와있는 그놈을 돌려보내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회사 앞에서 치워버려야 하는데…….


“거, 거기 말고 역 1번 출구에서 드러그스토어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은 카페 하나 있거든? 거기서, 거기서 기다려. 내가 빨리 갈게.”

“카페 이름이 뭔데.”

지서준에게 카페 이름을 알려주며 잽싸게 회사 로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기다릴지도 모르는 백인하 씨에게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메시지를 남겼다.

로비에 도착해 커다란 조형물 뒤에 숨어 구석구석을 살폈다. 평소에 이런 애물단지가 없다며 욕하던 커다란 미술품이 나를 숨겨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놈이 서 있으면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주변 여자들의 시선만 쫓아가도 그놈이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그놈의 모습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내가 가 있으라던 카페로 향했다.

역 가까이 있지만, 구석에 있어 아는 사람만 아는 카페였다. 회사 사람들에 치여 혼자 있고 싶을 때 가끔 찾는 곳이었다.

나는 서둘러 목에 걸린 사원증을 빼 가방에 넣었다.

딸랑.

내가 들어가자 카페 사장님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들르시네요?”

“네. 오랜만이죠? 하하.”

나는 사장님께 인사하며 카페를 둘러보았다. 카페 구석에 그놈이 여유롭게 커피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어디서 무게를 잡아.

나는 눈을 흘기며 커피를 주문하고 그놈의 앞에 가 앉았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인기척이 들리자 책에서 눈을 뗀 그놈이 나를 보고 책을 덮었다.


“몰라서 물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었잖아……. 퇴근하고 만나도 되고…….”

나는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카페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없었다.


“너 아직도 기억 안 나?”

“…….”

그렇게 보챈다고 기억이 날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있잖아, 그 말 진짜야? 내가 그랬다는 그……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랬다는 거.”

“맞아. 한 치의 거짓말도 없어. 왜. 다시 한번 말해줘?”

나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대체 술 취하면 나타나는 또 다른 나는 이놈에게 뭘 원했던 걸까.


“일단…… 피임은 했어.”

으아아아악!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하는 거지?

나는 화들짝 놀라 그놈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팔이 짧아 닿지 않았다. 팔이 짧아 슬픈 짐승이었다. 그놈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나는 어제 정말 짐승이었으니까.


“왜. 중요한 문제 아니야?”

그야 그렇다만…….


“그,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표현은 자제하면 안 되나? 응?”

나는 그놈의 입을 막지 못하니 내 귀라도 막아보겠다며 손바닥으로 내 양 귀를 꾹 누르며 말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내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귀를 막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를 받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빨대를 컵에 꽂아 신경질적으로 마구 휘저었다. 얼음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핑핑 돌아갔다.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

그놈이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


“일단 이 일에 대해서 마무리 짓고 싶어서.”

“무슨 마무리…….”

지서준의 예쁜 입에서 어떤 살벌한 말이 나올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만히 그놈의 입술만 응시했다. 그때.
 


“야! 지서준! 네가 잘생겼으면 얼마나 잘생겼다고……. 뭐. 밥 잘 먹을 때는 조금 예뻐 보이긴 하더라. 요놈의 예쁜 주둥이.”

 
뭐야. 방금 뭐가 기억난 거지?

잠시 뒤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는 기억들.
 


“야. 노아. 은나?”

 
‘야. 놔. 안 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지서준은 주둥이가 잡힌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 그놈의 예쁜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 내 손가락을 바라봤다.

기억조작인가? 아니면 나의 욕망의 영상화?

잠깐 회피를 시도했지만 떠오른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다. 내가 지서준의 입술을 붙잡고 흔들었다고? 내가?


“자, 잠깐. 혹시 내가 네 입술 잡고 흔들어 댔어?”

“기억나?”

말도 안 돼.

방금 떠올랐던 기억이 진짜였다니.


“왜 안 말렸어?”

평소의 지서준이라면 나를 밀치고도 남았을 인간이었다. 자기 주둥이를 잡고 흔드는 나를 가만히 뒀을 리가 없었다.


“안 말리긴, 네가 안 놓길래 내가 네 입술을 마구 잡아당겼지. 그런데 너 웃더라? 변태야?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팔에 소름이 돋아”

말을 끝낸 지서준이 자기의 팔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놈의 팔에는 정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지서준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돼. 머리에서 경고가 울려 퍼졌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나 먼저 간다.”

“앉아.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또 다른 경고음이 머리에서 울렸다. 내가 만약 지서준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에서 나간다면, 음…… 상상하기도 싫군.

나는 주춤주춤 의자에 다시 앉았다.


“보아하니 전부 기억이 난 것 같지는 않고……. 물론 문다율은 기억이 나도 발뺌하고도 남지만.”

모두 맞는 말이니 반박은 하지 않았다.


“나도 술에 취해 있었는데……. 그렇다고 너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아니야.”

나는 목이 바짝바짝 말라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네가 죽자사자 덤볐다고는 해도…… 일단 끝까지 거부하지 못했던 건 내 잘못이 맞아. 미안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이 커피에 술이라도 들어있었던 걸까.


“지금 미안하다고 한 거야? 지서준이?”

“그래. 미안하다고.”

“다시, 다시 말해봐.”

내 말에 눈에 힘을 주는 그놈이었다.


“계, 계속 말해…….”

내가 꼬리를 내리자 다시 눈에 힘을 풀더니 테이블에 한 손을 올려놓고 검지를 까닥거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우리 만나 보는 건 어때?”

나는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저놈이…… 저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너무 놀라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도 못 하고 입만 뻥긋대는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쉰 그놈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머리가 망가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였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나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코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커피를 들이켜 목을 촉촉이 적신 후 입을 열었다.


“너는 나 안 좋아하잖아.”

“……좋아해.”

“친구로 말고, 여자로.”

“…….”

“그냥 네 행동에 책임지고 싶어 하는 말이라면 나는 사양할게.”

내 말에 뭐가 불만인지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굳이 책임질 필요 없어. 너도나도 성인이고…….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합의하고 같이 밤을 보낸 거라면 더더욱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야.”

쿨한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아닌 누군가와 잠을 잔 것은 처음이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지서준을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을 보낸 이유로 사귄다 한들, 그놈도 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안 사귄다고 너랑.”

똑똑한 놈이 왜 못 알아듣는 담. 이제 거의 바닥이 드러난 커피를 빨대로 열심히 끌어올렸다.


“그럼…… 너랑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그냥 평소처럼 지내는 거지.”

나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지서준.

아. 불안했던 거구나. 나와의 사이가 변할까 봐 불안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득달같이 회사 앞까지 달려왔겠지.

지서준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이지만 그렇다고 지서준과 친구의 연을 끊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놈과의 관계는 늘 그랬다.


“일어나. 나 아직 밥도 못 먹었어. 아침도 못 먹고 나왔는데 네가 여기까지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먹고 들어가게 생겼잖아.”

민망한 마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서준에게 서두르라며 졸랐다. 내가 재촉하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책을 들어 가방에 넣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와 사람이 북적이는 큰 길가로 나갔다.


“밥 안 먹어도 돼?”

“시간 없어. 그냥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빵 사서 먹을 거야.”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막 그놈과 헤어져 몸을 돌렸을 때.


“조심해!”

전동킥보드가 내 옆으로 휙 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운동신경이 아닌 지서준이 나를 감싸고 옆으로 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위험하게 뭐 하는 짓입니까?”

지서준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전동킥보드를 탄 사람은 영혼이 1그램도 담기지 않는 사과를 남기고 다시 휙 사라졌다.


“괜찮아?”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꽤 놀랐는지 여전히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으, 응. 괜찮아.”

“괜찮기는…… 너 얼굴 하얗게 변했어.”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나 보다. 지서준이 등을 토닥이자 긴장이 풀리며 몸의 힘도 풀어졌다.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여전히 분한지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지서준이었지만, 손길만큼은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서준, 서준아. 잠깐만……. 응?”


“후…….”

 
또다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갑자기 움찔하자 지서준은 등을 토닥이던 것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왜, 어디 아파? 아까 부딪치기라도 한 거야?”

그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파?”

 
이것은 다른 기억이었다. 툭툭 끊어진 짧은 영상들이 머릿속에 채워졌다.


“아니야!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점심시간 끝나간다. 나 먼저 간다! 너도 조심히 들어가!”

나는 내 팔을 잡은 그놈의 손을 쳐내고 몸을 돌려 재빨리 회사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홧홧했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그 전의 지서준과 지금의 지서준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지서준은 달랐다.

지서준은 남자였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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