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내가 여자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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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내가 여자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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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내가 여자로 보여?
2022.07.24.
“지서준! 여기야! 나 여기 있어!”
나는 팔을 마구 휘저으며 나의 존재를 알렸다.
“너 거기서 뭐해?”
학생들은 갑자기 남자의 등장에 당황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틈을 타 바닥에서 일어나 와다다 달려 지서준 옆으로 갔다.
“뭐야. 아줌마, 남자친구도 있었어?”
학생 무리에 속해 있던 2명의 여학생은 지서준을 발견하자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던 키 큰 학생이 인상을 와락 구기더니 내 지갑을 바닥에 툭 던졌다.
저거, 저래 봬도 명품 지갑인데……. 내가 얼마나 아끼는 지갑인데…….
바닥에 뒹구는 내 짐들과 지갑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너 지금 고등학생들한테 삥 뜯기는 중이었어?”
지서준은 한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조금은 창피해 말끝을 흐리자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학생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갑 다시 줍지?”
“뭐래.”
지서준이 지갑을 가리키며 주우라 말하자 남자들 몇몇이 킥킥대며 비웃었다.
“아저씨. 아줌마 데리고 가요. 그 고운 얼굴에 흉터 생기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학생들?”
내 지폐를 쫙 펴 팔랑거리며 키 큰 놈이 비열하게 웃었다.
저 얼굴이 어떻게 고등학생이니. 지서준 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 30대 동네 양아치 같았다.
“아저씨, 우리랑 놀래요? 엄청 잘생겼다. 모델인가? 아저씨 모델이에요?”
똥짤막 한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지서준에게 추파를 던졌다.
나는 물론이고 지서준, 그리고 여학생들을 제외한 남학생들 모두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보아하니, 말로는 안 되겠네.”
지서준이 말했다.
싸울 건가? 지서준 쟤네들이랑 싸우려고?
지서준이 아무리 운동을 잘한다 해도, 저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그놈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지서준은 내가 잡은 팔을 툭 하고 풀었다.
“나는 법적인 절차를 아주 좋아해. 내가 아깝게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경찰, 변호사, 검사, 판사들이 일을 해결하거든.”
지서준이 핸드폰을 들어 112를 찍더니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흔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코웃음 치더니 지서준에게 말했다.
“우리 아직 어려서 처벌 안 받아요. 청소년 보호법도 몰라요?”
“그래. 너희가 처벌은 안 받아도 적어도 너희 학교랑 부모님께 연락은 가겠지. 나는 너희를 귀찮게 하는 것만으로도 목적 달성이야. 그리고 저기, 저 CCTV 보이지?”
지서준이 놀이터 입구 CCTV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고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거기 경찰서죠?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성인 여성 한 명을 협박하고 금품을 갈취했는데요…….”
지서준이 경찰에 연락하자 갑자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야. 가자. 가.”
한 명이 다른 아이들을 재촉하자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거지 같네.”
내 돈을 들고 있던 학생이 바닥에 지폐를 흩뿌리며 다른 학생들을 따라 놀이터를 벗어났다.
“괜찮아?”
멍하니 학생들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서준이 다가와 물었다.
“겨, 경찰은? 온대?”
“경찰? 신고 안 했는데?”
“뭐?”
“쟤네 조금만 겁주면 그냥 갈 것 같아서 신고 안 했어. 경찰서에 신고하면 나만 귀찮아져.”
그러더니 내 주위에 지폐들을 하나둘 줍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쟤들이 때리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딱 봐도 그런 배포도 없어 보이던데 뭐. 뭐 해. 안 주울 거야?”
겁도 없네.
요즘 청소년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미국에 가더니 겁도 상실했나. 총으로 위협하는 나라에서 살다가 저런 아이들 보면 귀여워 보이려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서준이 없었으면 그 녀석들에게 끌려가 담배까지 결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게 다 네 가방에서 나온 거야?”
바닥에 마구 흩뿌려져 있는 나의 소지품들을 보더니 지서준이 미간을 좁혔다. 저렇게 미간을 가만두지 않는데, 주름 하나 없는 것 보면 피부도 타고난 녀석이다.
“어……. 다 내 거야.”
나는 쭈그리고 앉아 내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가방에 넣었다.
“쓰레기는 왜 다시 집어넣어!”
한 깔끔 떠시는 지서준이 경악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버, 버릴 거야.”
아까 학생들보다 저렇게 난리 치는 지서준이 더 무서웠다. 학생들 멀리 갔나? 가지 마. 다시 와.
놀이터 입구를 살피는 나의 손에 있던 가방을 지서준이 낚아챘다.
내 가방을 빼앗아가더니 가방 안에서 마구 손을 휘저어 쓰레기를 찾았다.
“입 닦고 난 휴지는 제때 안 버릴래?”
입 닦은 휴지 아니고, 코 푼 휴지인데. 지서준은 휴지, 사탕 껍데기, 영수증 등을 찾아내 꼬깃꼬깃 둥글게 만들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 왜. 그냥 가방에 두지.”
“가방에 다시 넣기만 해. 집에 가는 길에 휴지통 보이면 거기다 넣어.”
다시 가방에 들어오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놈이 알고 있었다.
“집 앞에서 기다린다더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세탁소에 옷 맡기러……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있어.”
“응?”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
못 들은 척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못 들은 척하지? 문다율,”
이놈이!
내가 눈을 흘기자 지서준이 내 볼을 잡아 쭉쭉 늘이기 시작했다.
“내가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거늘, 놀이터에서 뭐 하고 있었을까? 어?”
“으아니. 그거시 아이고.”
“뭐가 아니야. 네가 여기 놀이터에 올 일이 뭐가 있어.”
“그네가. 그네가 타구 시퍼 가지고.”
“오. 그네가 타고 싶었어? 그럼 타야지.”
내 볼에서 손을 떼더니 나를 붙잡고 그네로 향했다. 그리고 나를 그네에 앉혔다.
“꽉 잡아라.”
나를 태운 그네가 땅에서 점점 높아졌다.
“내려줘! 내려줘, 지서준.”
놀이기구라면 회전목마만 겨우 탈 수 있는 나였다. 어렸을 적, 같이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그네가 높아지면 앙앙 울어대던 나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몸이 붕 떠오르자 겁이 났다.
“꽉 안 잡으면 떨어져.”
나는 눈을 꼭 감고 그넷줄을 꼭 잡았다.
“꺄악.”
밑으로 훅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내 몸이 흔들렸다. 몇 번 왔다 갔다 했을까. 갑자기 그네가 뚝 멈췄다.
실눈을 뜨고 내 상태를 확인하니 내 앞에 지서준이 그넷줄을 잡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왜 나 피하는데?”
지서준은 무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깊은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안 피했는데?”
“그네 한 번 더 탈래?”
“아, 아니!”
“똑바로 말해. 너 왜 나 피하는데.”
“그, 그게…….”
말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내 앞에 있는 놈이 그넷줄을 더 꽉 잡았다. 그네와 지서준에 막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었다.
“기억이……. 났어.”
“뭐?”
“그날 밤! 기억이……. 난다고.”
되묻는 지서준이 짜증이나 크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후에는 다시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피하는 거야?”
나는 지서준의 질문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지서준은 말이 없었다. 바닥을 보던 시선을 옮겨 그놈을 보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넷줄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옆 그네에 앉는 지서준.
“아무렇지도 않다며. 합의하고 잔 거니까,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며.”
지서준이 말했다.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다 기억이 안 났어.”
“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이가 없겠지. 한 입 갖고 두말하는 내가 나도 바보 같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네 앞에 놓여 있던 작은 돌멩이를 발로 뻥 찬 지서준이 나에게 물었다. 돌은 데굴데굴 굴러 저만치 떨어졌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사귀자니까?”
이놈이 또 미친 소리를 한다.
“너 나 안 좋아하잖아!”
“그게 꼭 중요해?”
“중요해!”
지서준은 이를 악물더니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친구도 하지 마? 아는 척도 하지 마?”
아랫배가 울렁거렸다.
지서준이 저렇게 나에게 화내는 모습은 윤희 아주머니의 병을 숨겼을 때 이후로 처음 봤다.
“아니…….”
“그러면?”
“나, 나한테 시간을 줘!”
“시간?”
나는 지서준에게 솔직히 말해야 했다. 그 방법만이 지서준을 이해시키고 빨리 화를 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널 보면 그냥 지서준이야.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니던 지서준이라고……. 그런데 그날 밤, 그러니까, 그날만 떠오르면 네가 다른 사람 같아.”
지서준의 짙은 눈이 더욱 짙어져 보였다.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런 마음으로 너와 사귄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
지서준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알았어. 시간을 줄게. 얼마나 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아야지. 내가 알아?”
나는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지서준을 노려봤다.
“아. 알았어. 넉넉히 3달. 됐지?”
3달이라……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4달.”
이번에는 지서준이 가자미눈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알았어. 3달.”
우리는 그렇게 3달의 여유를 갖기로 했다.
놀이터를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
다리가 긴 지서준이 앞서가고 나는 그 뒤를 쫓았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확인하더니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지서준이었다.
항상 그랬었다.
등교할 때, 하교할 때.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뒤처져 있는 나를 발견하면 속도를 늦춰 나와 거리를 좁혔다.
학생 때가 생각이 나면서 나는 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술이 원수지. 술이 원수야.
그런데, 만약 내가 지서준과 사귀다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서준.”
“왜.”
“만약에 너랑 사귀다가 헤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말에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나를 내려봤다.
“안 헤어져.”
“뭐? 그런 게 어딨어. 연인 사이에 마음이 식으면 헤어지는 거지.”
“나는 너랑 사귀면 어중간한 마음으로 만나지 않을 거야.”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야?”
“어.”
너무 황당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놈은 연애도 쉽고 결혼도 쉬운가?
“너는 뭐가 그렇게 쉬워? 결혼은 아무나랑 해도 돼?”
“네가 아무나야?”
지서준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또 질문 있어?”
지서준이 삐딱하게 서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저놈 주위만 밝아 보이는 것은 가로등 때문이겠지.
“너는……. 내가 여자로 보여?”
나는 목 주위에만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내 질문은 초여름 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날 밤. 너는 나한테 확실히 여자였어.”
지서준의 말이 선선한 밤의 공기를 헤쳐 나에게 닿았다.
“그리고, 난 너랑 잔 거 후회 안 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두세 걸음 걷다 나를 돌아보았다.
“빨리 와.”
나는 멈췄던 발을 움직여 지서준의 옆으로 갔다.
놀이터에서 지서준이 쥐여준 쓰레기 뭉치가 아직도 내 손 안에 있었다.
저만치 쓰레기통이 보였다. 나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다.
쓰레기가 있던 손을 왼쪽 가슴 부근에 가져다 댔다. 빨리 달리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벌떡벌떡 뛰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