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넌 그게 되니? (8/97)


8화. 넌 그게 되니?
2022.07.27.


도대체 그 말은 다 뭔가. 그날 밤만 여자였다는 건가. 아니면 그 후로도 쭉 내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한 지서준의 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리는 머리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내 마음 같지 않았다.

나는 그놈을 좋아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고도 진정되지 않는 두근거림. 혹시 내가 그놈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참을 고민했다.


“아, 아니야.”

나는 분명 지서준을 남자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내 옷장 속 더스트 백에 고이 들어가 있는 내 명품 가방, 내 아기들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빨리 나와서 저녁 먹어!”

엄마가 소리쳤다.

대충 옷만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식탁에 앉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다 엄마에게 잔소리 폭탄을 맞았다.

밥해주는 고생스러움을 모른다, 그럴 거면 나가 살아라, 너 같은 딸 낳아봐야 내 심정을 이해한다.

항상 듣던 소리라 큰 타격은 없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씻고 침대에 누워 애착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을 잠깐 되돌아보았다.

그놈과 지냈던 세월 중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시점은 어린이집부터였다.

초등학교를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해,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아주 징글징글하게 붙어 다녔다.

그놈의 후광에 가려져 춥고 어두운 음지 생활을 보냈지만, 마냥 암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둘이 있을 때는 나름 즐거웠다.

대화도 잘 통했고(물론 이것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취미도 비슷했으며, 일단 너무 편했다.

두근거림?

그런 심장 이상 박동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다.

그랬는데, 그놈과 하룻밤을 보내고 내 심장이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 안 깊숙이 있는 사진 앨범을 꺼냈다.

몇 권이나 되는 분량의 사진은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빼곡하게 차 있었다.

모두 승호 아저씨의 취미 덕분이었다.

내 사진의 절반 이상이 그놈과 함께한 사진이었다. 아기 때는 함께 벌거벗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어렸을 적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한 앵글에 담길 만큼의 거리는 유지했다.

고등학교 때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잔뜩 익살스러운 표정의 지서준이 있었다.

그 사진은 고등학교 들어가고 입학 첫날, 등교 전 일찍이 그놈과 떨어져 학교에 가려던 계획을 무참히 짓밟힌 날이었다.

새벽같이 나서다 집 앞의 그놈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등에 담이 결려 체육 시간에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얼마나 그놈을 욕했던지.

잠깐의 추억 여행을 끝내고 앨범을 닫아버렸다.

내 인생의 3분의 2는 함께했던 그놈.
 


“나는 너랑 사귀면 어중간한 마음으로 만나지 않을 거야.”

 
집으로 돌아오던 길, 그놈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앨범을 훑어보면서 알 수 있었다.

앨범에 함께했던 시간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빛바랜 사진처럼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사이 항상 지서준이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당연하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쌓아온 추억의 의미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서준도 그렇겠지.


 

**

지서준이 이사하는 날. 왜 나까지 불렀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윤희 아줌마, 승호 아저씨와 함께 차를 타고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는 왜 가는 거야?”

엄마에게 귓속말하자 엄마가 내 두툼한 허벅지를 콱 꼬집었다.


“아. 아파!”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엄마가 내 입을 막고는 ‘호호’ 웃었다.


“엄살은 세계 1등이야. 1등.”

“아이고, 다율 엄마. 다율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역시, 언제나 내 편인 승호 아저씨였다.


“없긴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지. 얘는 꼭 서준이 일이라면 나 몰라라 하니까 괘씸해서 그렇죠.”

“다율이가 저렇게 말해도, 서준이 생각을 얼마나 하는데. 그렇지 다율아?”

이번에는 엄마의 말에 윤희 아줌마가 반박하며 나에게 물었다.

아줌마에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 거짓말 한 스푼을 보태기로 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내 말에 우리 엄마를 뺀 3명의 어른이 호탕하게 웃었다.

지서준의 짐은 미리 그곳에 가 있었고, 짐 정리가 다 되면 오라는 그놈의 말을 싹 무시한 채 어른들이 출동하는 길이었다.


“남자 혼자서 정리하면 얼마나 깔끔하게 한다고……. 엄마들 손이 닿아야 괜찮아지지.”

“그럼요. 그럼요.”

승호 아저씨가 우리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지서준이 싫어할 텐데…….”

가끔 오버하는 부모님들의 행동에 지서준은 항상 거부감을 보여왔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그저 투정으로만 보이는 듯했다.

그놈의 불만은 고스란히 나에게 넘어오곤 했다.

지도 못 말리는걸, 나보고 어떻게 말리라는 말인지.

한참 수다를 떨며 가니 금세 그놈의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몰래 그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어른들 지금 지하주차장.]

초인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짐 좀 정리되면 오시라니까.”

문을 열자마자 투덜거리는 놈이었다.

저런 애가 뭐가 그렇게 예쁜지, 어른들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들 손이 닿아야 빨리 정리가 되지.”

그 말을 남기고는 우르르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3달의 유예기간을 준 후 1주일 만의 첫 만남이었다.

어른들 뒤꽁무니를 쫓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이 한가득 있었다.


“미국에서 온 짐들도 있어서, 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 앉아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어른들이 앉을 수라도 있게 박스를 한곳에 모아두는 지서준이었다.

박스를 옮길 때마다 꿈틀거리는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거두기까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나는 깨달았다.

생각보다 지서준의 몸이 꽤 내 스타일이라는 것을.

나는 혹시 변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야!


“문다율!”

“아닌데?”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저절로 뇌에 있던 글자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나는 혹여 내 생각이 들킬까 재빨리 몸을 돌려 집을 구경하는 척했다.


“이미 봤던 집, 구경은 더해 뭐해. 빨리 너도 정리해.”

내가 지서준의 등 근육에 빠져 있을 때 어른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박스를 하나둘 해체하기 시작하고 정리를 시작했던 모양이다.

멀뚱히 서 있던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던 엄마는 재빨리 나에게 박스 하나를 건넸다.


“내가 쉬는 날, 이삿짐 정리하게 생겼어?”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엄마가 쥐여준 박스를 뜯었다. 그곳에는 지서준의 알록달록한 양말과 속옷들이 담겨 있었다.

하필 줘도 속옷 박스를 넘겨주나.

다른 박스를 달라기도 뭐한 것이 아빠와 승호 아저씨는 무거운 박스를 지서준과 함께 정리하고 있었고, 엄마와 아주머니는 주방에 자리 잡고 그릇과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지서준이 드레스룸으로 정한 방에 앉아 박스에 있는 속옷들을 하나씩 꺼내 개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 다양도 하구나.”

나는 무념무상으로 속옷을 하나씩 개키며 남자들의 속옷 디자인이 생각보다 참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하학적 무늬와 알록달록 색의 향연이 끝나고 막 동물원에 진입할 무렵.


“야. 너 뭐 해!”

내 손에 있던 얼룩말이 사라졌다.


“이제 다 정리했어. 빨리 내놔. 이거 정리하고 양말도 해야 해.”

“됐어. 그만해.”

“내놓으라니까.”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내 손으로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주 바람직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만흐라고.”

어른들이 있으니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그저 어금니만 꽉 깨물고 나에게 경고하는 지서준이 조금은 웃겨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내놔. 이제 막 동물원 속옷들만 끝나면 되니까. 여기 어흥이도 있네. 어흥.”

“진짜. 그만해라.”

“어잇. 얼룩말을 꽤 좋아하시나 봐요. 다른 속옷들에 비해 조금 늘어나 있네.”

 
그때 내 입안으로 뭔가 ‘쑥’ 들어왔다.

같은 박스에 있던 양말이었다.


“푸핫. 퉤퉤퉷. 뭐 하는 짓이야!”

“다시 한번 말해봐. 다른 양말 맛도 보여줄 테니까.”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 나는 그저 눈에만 힘을 줄 뿐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양말을 물었던 입안이 텁텁했다.


“변태처럼 속옷 그만 조몰락거리고 나가.”

“나 나가면 엄마가 또 일 시킬걸?”

“그럼, 그 일 하던가.”

지서준의 경고에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 나 지서준이 일하지 말래.”

“일을 얼마나 대충대충 했으면 서준이가 그런 말을 해?”

“아이참. 왜 자꾸 다율이 일 못 시켜서 안달이람. 다율아. 그냥 소파에 가서 앉아 있어.”

엄마의 말에 삐치고 아줌마의 말에 풀렸다.


“다른 일이라도 주세요. 같이 해야 빨리 끝나지.”

나는 서둘러 정리하고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그럼 아줌마 옆에서 그릇 좀 옮겨줄래?”

혼자 사는 놈이 뭔 놈의 그릇이 많은지……. 꼼꼼하게 포장된 그릇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얘 미국에서 혼자 살았던 거 맞아요? 뭔 그릇이 이렇게 많아.”

내가 마지막 남은 그릇의 신문지를 펼치며 윤희 아줌마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변이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혼자 사는 남자는 그릇이 많으면 안 돼?”

지서준이었다.

옷방 정리를 끝마쳤는지 주방 앞에서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서 있었다.


“누가, 뭐라나…….”

“호호호. 아줌마가 보내준 것도 많아.”

우리가 투덕거리자 윤희 아줌마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미국에 갔을 때, 요리를 꽤 열심히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끼던 그릇도 보내주고 그랬더니 이렇게 접시가 많네.”

지금은 쉬고 있지만, 요리 연구가였던 아줌마는 그릇이 꽤 많았단다.

미국 유학 간 지서준이 요리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에 아끼던 그릇 몇 가지를 보냈다며 몇 가지를 보여주셨다.

지서준은 그 접시를 곱게 포장에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고.


“아이고. 우리 서준이 누가 데려갈까 몰라. 누군지 몰라도 복 받은 거야.”

그 소리에 마지막 박스를 풀고 박스 정리까지 마친 승호 아저씨가 불쑥 목소리를 높여 대화에 참여했다.


“다율이 달라니까요. 그러네.”

‘쨍그랑.’

나는 승호 아저씨의 말에 마지막 그릇을 놓치고 말았고, 그릇은 산산조각이 되어 깨지고 말았다.


“어, 어떡해. 죄송해요.”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깨진 그릇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냥 둬. 덜렁대다 다치지 말고.”

지서준이 내 팔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래. 다율아. 어디 안 다쳤어? 다치지 않았으면 괜찮아. 서준아. 빗자루 있어? 빗자루 좀 가져와. 청소기도.”

윤희 아줌마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 덜렁이가 오늘은 얌전한가 했다. 아이고…….”

우리 엄마는 나를 끌어다 소파에 앉히고 지서준에게 빗자루를 받아 깨진 그릇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율이만 안 다쳤으면 됐지.”

윤희 아줌마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더욱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엄마와 지서준이 순식간에 사고 현장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나는 아줌마와 지서준에게 연거푸 사죄했다. 지서준은 말이 없고 아줌마는 계속해서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달랬다.


“깨진 그릇은 제가 버리고 올게요.”

나는 지서준의 손에서 깨진 그릇이 담긴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서준이 운동화를 신으며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동네방네 우리가 무슨 일 있었다고 말하고 다니지 왜.”

“뭐?”

“뭘 그렇게 당황해. 우리 아빠가 그런 소리 한두 번 해?”

“그건…….”

지서준의 말이 맞았다. 나는 승호 아저씨 말에 당황했고, 손에 힘이 풀리며 그릇을 놓치게 된 것이다.


“어른들한테 알리고 싶어?”

“미쳤어?”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엘리베이터 층수가 올라오는 것만 바라보는 지서준.


“너는 그게 돼?”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봤다.


“넌 그게 되냐고. 없었던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

말없이 나만 바라보던 지서준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렸지만, 우리 둘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되는 것 같아?”

이놈은 그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층수가 빠르게 바뀌었다.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네가 내 속옷 만지작거렸을 때 그냥 내버려 뒀어.”

‘띵.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안내음이 들리고 지서준이 내렸다.


“뭐 해? 빨리 안 나오고.”

바보같이 멍하니 있던 나는 지서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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