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회사에 등장한 그놈. (9/97)


9화. 회사에 등장한 그놈.
2022.07.31.



“넌 뭐 하러 나왔어?”

나는 깨진 유리조각을 버리며 그놈에게 물었다.


“너 눈치 없는 건 29년 동안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심각한 건 몰랐네.”

저놈의 미간을 언젠간 다리미로 벅벅 문질러 펴주리라.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 한마디 하는 그놈의 얼굴을 보며 든 생각이다.


“왜 나왔냐고! 뭐 볼일 있어서 나온 거 아니야?”

“너 때문에 나왔지! 내가 뭐 때문에 나왔겠어?”

“나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왜 나 때문에 나왔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저만치 가버리는 그놈을 쫓았다.

정말로 지서준은 나 때문에 나왔는지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정말로 나 때문에 나온 거냐 열심히 물었지만, 지서준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놈에게 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자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 심각하게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들 뭐 해요?”

내가 묻자 윤희 아줌마가 내 앞으로 어디서 났는지 배달 책자를 쓱 내밀었다.


“이삿날에는 짜장면이지, 너희는 뭐 먹을래?”

요즘은 배달 앱으로 모든 메뉴가 주문이 가능했다. 생각보다 편리하다며 두 부모님을 모아놓고 강의까지 했건만, 여전히 부모님들은 배달 애플리케이션이 배우 어색하다며 아직도 전화로 주문하시곤 했다.


“나도 짜장면 먹을래요.”

나는 자주 사용하는 배달 앱을 켜 부모님의 메뉴를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지서준은 기계치가 꽤 크나큰 발전을 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지서준은 툭하면 내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부끄럽고 쑥스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그날 밤 이후.

내가 알던 지서준이 아닌 다른 지서준으로 자꾸만 다가와 점점 그놈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지서준의 손길이 어색해 쓱 피하고 장바구니에 담긴 중국 음식을 계산했다.

그리고 나는 지서준에게 말했다.


“내 계좌로 돈 부쳐.”

 

**

중국 음식을 해치우고 부모님들을 따라 집으로 가려는 날 붙잡은 지서준.

나에게 뭐 시킬 일이 있다며 부모님을 내보낸 지서준은 부모님들이 돌아가고도 마저 뒷정리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정리하는 그놈을 그냥 바라만 보았다.


“뭐 시킬 일 있다며, 뭐 해야 하는데?”

“잠깐만 얌전히 기다려.”

꼭 강아지에게 말하는 것 같아 잠깐 기분이 안 좋았지만, 딱히 화낼 말도 아니었기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책 정리를 하는 지서준의 옆으로 갔다.


“뭔 책 정리를 그렇게 열심히 해? 아저씨가 다 꽂은 거 아니었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 유심히 살피며 하나씩 위치를 바꾸고 있는 지서준이었다.


“자주 읽는 책, 그렇지 않은 책 위주로 다시 정리해야 해.”

음. 나와는 맞지 않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영어로 되어 있는 책들을 외면하고 다시 소파로 가 앉아 벌러덩 누웠다.

주말이 가고 있었다. 아까운 내 주말이여.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며 빈둥대기를 20분. 그제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책 정리를 끝냈는지 지서준이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며 나에게 말했다.


“일어나. 나가자.”

“어디 가게?”

나는 상체를 반만 일으켜 지서준을 보았다.


“영화 보러.”

“영화?”

갑작스럽게 무슨 영화를 본다고…….

내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자 지서준은 소파로 다가와 내 팔을 잡고 벌떡 일으켰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조만간 영화관에서 내린대. 그전에 보러 가야지.”

지서준이 미국에서 온 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다며 지서준 때문에 보지 못했다고 툴툴거렸다. 그걸 기억한 모양이다.

내가 지서준의 몇 가지 없는 장점 중 밥을 맛있게 먹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점이 세심함이었다. 꽤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도 선을 넘지 않았고, 타인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지서준네 오피스텔 근처는 인프라가 굉장히 잘 되어 있어 굳이 차를 타고 가지 않아도 영화관에 갈 수 있었다.

15분 정도를 걸어 도착한 영화관. 지서준이 영화표를 구매하고 팝콘과 콜라를 내 품에 안겼다.


“너는 더운데 왜 카디건을 가지고 나왔어?”

나는 지서준이 사준 팝콘을 오물거리며, 한 손에 들린 카디건을 보았다.


“여름에 영화관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서 추워.”

본인에 관해서도 세심한 놈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끝날 것 같지 않은 광고가 끝나고 대피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내 무릎 위로 그놈의 카디건이 살포시 올라왔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지서준을 응시하자 지서준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잡고 스크린으로 다시 돌려놨다.

생각해보니 그놈과 영화관을 갈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교복 재킷, 어느 날은 코트,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카디건이었다.

어렸을 때는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은 그 녀석과 나의 10년의 공백 때문일까, 아니면 하룻밤의 일탈 때문일까.

내 고민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다 보니 순식간에 몰입해서 봤다. 그렇게 쿠키 영상까지 보고 나서 영화관을 나오는 길. 지서준에게 카디건을 돌려주며 말했다.


“고맙다.”

 

 

**

3주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놈은 종종 나를 불러내 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은 이틀 연속 불러대는 지서준에 짜증이나 쓸데없이 불러내지 말라고 투덜거렸다.

나의 말에 그놈은 정색하며 ‘계속 만나봐야 결정하기 편할 것 아니야!’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 그 후로 나는 지서준이 부르면 큰 불만 없이 만나러 나가곤 했다.

그놈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

같이 있는 시간이 꽤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른 적도 있었다.

물론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항상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 예전처럼 장난치다 빈정이 상해 싸우고 만나자마자 각자 집으로 향한 적도 있었고, 내가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여자들이 벌떼처럼 달려와 지서준을 괴롭혔다.

심지어 내가 있는데도 버젓이 다가와 그놈에게 추파를 던지던 여자도 있었다.

그놈과 사귀면 이런 일들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질 일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그놈에게 짜증을 부린 적도 있었다.

어제는 일요일에 그놈과 가고 싶었던 전시회를 다녀왔다.

크게 싸운 일도 없었고, 그놈의 해박한 지식에 상당히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좋았다, 싫었다 들쭉날쭉한 3주를 보냈다.

그리고 시작된 월요일 아침.


[나는 오늘 첫 출근.]

회사 출입구에서 사원증을 태그 한 뒤 그놈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잊고 있었다.

워낙 많은 일이 몰아치기도 했고, 당장은 회사 일과 그놈의 일만으로도 벅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놈과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서둘러 주위를 훑어보았다.

다행인지 그놈이 출근하는 첫날, 같은 사원증을 목에 걸고 로비에서 마주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사무실로 들어가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그놈의 메시지에 답장을 남겼다.


[파이팅.]

사실, 그놈에게 속 시원히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노라 고백하면 좋겠지만, 그건 잠깐의 행복일 뿐이었다.

그놈과 같은 회사에 다니다가 나와 그놈이 친한 사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골치 아픈 일이 왕왕 발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문 대리님! 대박. 대박 사건이요! 우리 평양냉면 먹으러 가다가 로비에서 봤던 그 잘생긴 남자 있잖아요? 그 남자 우리 회사 사람인가 봐요! 어떡해! 어느 부서일까요? 여자친구는 있을까요?”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참 활달한 백인하 씨였다. 백인하 씨는 지서준 목격담을 줄줄이 쏟아댔다.


“그, 글쎄요?”

“왜. 기억 안 나세요? 기억이 안 날 수가 없는 얼굴인데…….”

만약 내가 여기서 그놈과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밝힌다면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거나, 소개해 달라는, 그런 난처한 부탁이 이어질 것이다.

‘그냥 소개해 버리고 그놈이 알아서 하도록 둬!’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러기라도 하면 지서준이 나를 탈곡기에 넣어 영혼의 쌀알이 한 톨도 남지 않도록 탈탈 털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지금 지서준은 나와 유예기간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 기간이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나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여지자 조잘거리던 것을 멈추고 백인하 씨가 자리에 앉아 화장품 파우치를 꺼냈다. 파우더를 꺼내 예쁘장한 얼굴에 콕콕 찍어 바르며 나에게 말했다.


“그 사람도 언젠간 출장은 가겠죠? 그럼 우리 부서에 올 일이 생길 거고……. 그렇죠?”

“그렇겠죠? 하하.”

 

 
나는 더는 지서준을 대화 주제로 삼고 싶지 않아 재빨리 컴퓨터를 켜 스케줄을 확인하는 척했다.

우리 부서는 회사 특성상 외국으로 출장 갈 일이 많아서 임직원들의 해외 출장을 컨설팅하고 서포트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트래블 코디네이터로 다국적기업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부서였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부서기도 했다.

즉, 지서준이 해외 출장이라도 잡힌다면 회사에서 부딪칠 확률 백 퍼센트라는 얘기였다.

그전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숨어다닐 작정이었다.

각오를 다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빠르게 위기가 찾아왔다.


[점심 먹자.]

나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그놈에게 온 메시지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출근 첫날. 회사 동료들과 식사를 하며 친분을 쌓거나 해야지. 나랑 먹겠다고? 도무지 이놈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늘 첫날이잖아. 회사 동료랑 먹어.]

[밥은 내가 먹고 싶은 사람이랑 먹어야지. 저번에 같이 갔던 국밥집 가자.]

아.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떼어 논담.


“문다율 씨. 아무리 점심시간이 다 됐어도 너무 대 놓고 핸드폰 만지는 거 아니야?”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하기로 한 플랜은 나왔나?”

“네. 지금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그놈을 떼어낼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



“회사 후문으로 가면 유명한 김밥집 있거든? 거기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조금 한적한 공원 있어. 거기에 있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나는 로비의 대형 미술품에 몸을 숨기고 그놈을 주시하며 전화를 했다.


-내가 너희 회사로 갈게. 회사 이름 불러봐.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너 길도 잘 모르잖아. 내가, 내가 갈게.”

그놈이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말에 식겁해 단호히 말하자 생각보다 쉽게 그놈이 단념했다.


-알았어. 빨리 와

그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놈의 뒷모습을 보다가 미술품 뒤에서 나왔다.

거리를 유지하느라, 혹시 주변에 아는 사람은 있는지 주위를 살피느라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긴 했지만, 그게 대수일까.

간신히 그놈과 만나기 직전.


“트래블 코디 문다율 대리 맞죠?”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내가 돌아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회사의 한 연구팀의 팀장이었다. 그의 목에는 당당하게 우리 회사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래요. 오랜만이네. 내가 요즘 출장을 안 가니 통 만나질 못했네.”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을 때, 갑작스러운 내전으로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때 연구팀 팀장님은 현지에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꽤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 회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중? 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식사라도 하죠?”

“저기……. 저는…….”

내가 팀장님에게 거절하려 막 입을 열었다.


“문다율?”

그놈이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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