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유느님과 넥스트 레벨.
(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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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유느님과 넥스트 레벨.
2022.08.07.
“백인하 씨는 그런 소식은 도대체 어디서 들어요?”
호기심 반, 놀라움 반으로 그녀에게 묻자 쑥스러운 듯 웃으며 백인하 씨가 말했다.
“워낙 제가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듣는 것도 많네요. 아! 오늘 대리님이 시키신 일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왼손으로 어설프게 충성하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하하. 알겠어요. 그럼 오늘 안에 테크 연구팀 국내 세미나 트래블 플랜 가이드라인 초안 잡히는 거로 알고 있어도 되겠죠?”
“앗. 그건…….”
그녀는 내 말에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갔다.
백인하 씨가 입사 후 맡게 된 가장 큰 플랜으로 국내 출장이기는 했지만, 인원이 많아서 꽤 큰 트래블 플랜이었다.
금세 몰입하는 백인하 씨의 뒤통수를 보고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유느님이라…….
실제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눈에 띄는 외모였기 때문에 몇 번 사내에서 마주친 기억이 선명했다.
남자 사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고, 그런 그녀가 지서준을 좋아하다니……. 뭔가 굉장히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질투?
나는 내 감정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다가 질투라는 단어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다음 날. 오늘따라 유달리 출근하기 싫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도 출근하기 싫은 마음이 내 몸에 무겁게 추를 달았다.
출근해서 조금이라도 꿉꿉한 기분을 떨쳐내고자 휴양지 사진을 보고 있었다.
“대리님!”
백인하 씨가 호들갑 떨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 회사에 사내커플이 생긴 것일까. 백인하 씨가 저렇게 등장하는 날이면 대부분 그런 소식들이었다.
“대리님! 어제 제가 말했던 것 있잖아요.”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는지 그녀가 숨이 찬지 쌕쌕거리며 말했다.
“어제? 어제 뭐요?”
“아이참! 유느님이랑 지서준 연구원님이요!”
설마……. 둘이 사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지서준에게 듣지 못했는데?
“두, 두 사람 사귄대요?”
긴장감에 살짝 내 목소리가 떨렸지만, 백인하 씨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아니요! 그게…….”
그녀가 아직 빈자리가 많은 사무실을 둘러보다 나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유나라 씨, 차였대요!”
“네?”
이건 또, 이것대로 충격적이었다.
“왜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또 슬픈 이야기인데……. 지서준 씨가 여자친구가 있대요…….”
응? 그놈이 여자친구가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혹시…….
나는 까마득한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
.
.
“여기 문다율이 누구야?”
교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엉덩이가 보일락 말락 한 치마에 터질 것 같은 교복 재킷을 입고 한껏 부풀어진 샤기컷 헤어를 한 2학년 언니가 들어오며 말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시에 나로 향했다.
“너야?”
나는 공포감에 대답도 못 하고 멀뚱멀뚱 바라보자 그 2학년 언니가 내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씹냐? 너냐고 문다율이.”
“네? 네…….”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 언니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기가 찬 듯 웃었다.
“난 또, 지서준 여자친구라길래 얼마나 대단한지 보러 왔더니, 너야?”
“네?”
나는 그 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도 나쁜가 보네……. 자꾸 멍청하게 네? 네? 거리네?”
나는 그녀의 말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지서준 여친이라며.”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쪽 입꼬리만 올려 코웃음 치던 그 언니가 내 책상을 발로 뻥 찼다.
“꺅.”
나는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선생님!’을 외치며 복도로 향했고 그 모습을 보던 그 언니는 내게 말했다.
“너, 내가 지켜본다.”
그리고, 그 언니는 졸업할 때까지 정말 나를 지켜봤더랬지.
.
.
.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알고 보니. 선배들의 잦은 부름과 고백으로 진절머리를 치던 그놈이 ‘1학년 2반 문다율이 내 여자친구요!’ 하고 선포해 버렸고, 그 이후로 저 언니를 포함해 전교의 여학생들이 나를 보러오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 왜 그 사건이 머리에 떠오르는지. 불안함 마음을 감추고 백인하 씨에게 물었다.
“여자친구가 누구래요?”
“그야 저도 모르죠……. 누군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풀이 죽어 어깨가 처진 그녀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힘없이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당장 그놈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제 고백받았고, 고백한 여자를 뻥 차며 했던 이야기를 오늘 아침, 내가 물어보는 것은 조금, 아니 아주 말이 안 됐다.
“하……. 불안하다. 불안해.”
기도하듯 중얼거리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S.T에 퍼졌다.
워낙 화제성 높은 두 사람이었다.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인데 그녀가 꽤 노골적으로 지서준에게 관심을 표했고, 고백 장소가 자그마치 회사 옥상이었단다.
회사 옥상의 공중정원은 S.T 사원들의 가장 만만한 쉼터이자, 마을의 정자 같은 곳으로 실제로 많은 사원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곳에서 고백했으니, 이렇게 빨리 소문이 번진 것이겠지.
같은 여자로서 그녀가 안타깝기도, 대단하기도 했다.
점심시간, 오랜만에 백인하 씨와 나가서 먹기로 했다. 항상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주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다른 여사원들과 함께 로비에서 나가는 인사팀의 ‘유느님’ 유나라 씨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나라 씨네요?”
옆의 백인하 씨도 그녀를 발견했는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같았으면 창피해서 사무실에서 나오지 못했을 텐데……. 대단하네요.”
나는 얄궂은 표정으로 유나라 씨를 보는 백인하 씨에게 보았다.
“창피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유나라 씨 잘못도 아니고, 사무실 밖으로 안 나올 이유도 없어요.”
내 말에 백인하 씨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아.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에요.”
“알아요. 그래도 여기는 로비니까 말조심하는 게 좋겠죠? 우리 부서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 자주 부딪치는 부서기도 하니까.”
“네…….”
내게 혼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백인하 씨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의기소침해져 대답했다.
“자. 빨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늦장 부리면 웨이팅 시간만 늘어날 뿐이에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
퇴근할 무렵, 그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문문. 오늘 시간 괜찮으면 오피스텔로 올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놈의 오피스텔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유나라 씨를 뻥 걷어차며 말한 여자친구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흔쾌히 알겠다 대답했다.
어디 들를 곳이 있다며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그놈의 연락에 망설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으. 이 깔끔함 보소.”
마지막 오피스텔을 정리했을 때보다 더욱 깔끔해진 그놈의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깔끔하면 같이 살 여자가 피곤하지…….”
나는 그놈의 흠을 잡으며 소파에 앉았다. 지서준의 오피스텔에는 TV가 없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를 20분.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늦어! 배고프잖아!”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내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지서준의 손에는 작은 케이지가 들려 있었다.
“뭐야?”
“아. 고양이. 준모가 잠깐 일이 생겼다고 봐달라고 해서.”
준모는 지서준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와도 아는 사이였다.
“고양이?”
지서준은 케이지를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나는 고양이 케이지에 납작 엎드려 케이지 안을 보았다. 흰 바탕에 검정 무늬가 매력적인 녀석이었다. 낯선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귀, 귀여워……. 발에 장화 신었어?”
나는 감탄을 연발하며 고양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름이 뭐래?”
씻고 나오는 그놈에게 재빨리 물었다.
“똘이 장군.”
“이름이 그게 뭐니……. 남준모 센스하고는…….”
“그러니까.”
나와 지서준은 한참을 남준모의 흉을 보았다.
지서준은 서둘러 화장실을 설치하고 밥그릇에 사료도 부었지만, 똘이는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케이지 안에서 나올 생각 없는 똘이를 보고 있는데 지서준이 물었다.
“뭐 해서 줄까?”
“요리하게?”
“어. 나도 배고프네. 그리고 케이지에서 좀 떨어져. 낯선 장소에 예민해져 있는데, 네 얼굴 보면 더 무서울 것 아니야.”
나는 지서준을 노려보았다. 지서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부엌에서 요리조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서준의 말대로 내 얼굴 때문에 겁을 먹은 거라면, 피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케이지에서 떨어져 식탁에 앉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서준의 등.
“요즘 회사는 어때?”
나는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묻기 위해 일단 밑밥을 깔았다.
“요즘 내 회사 생활이 궁금한가 봐? 자주 묻는다? 뭐, 그냥 그렇지.”
역시나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놈. 그럴 줄 알았지.
“거기도 여자 사원들 많아?”
그제야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날 보는 지서준이었다. 표정으로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물었다.
“아니……. 인기 많겠다 싶어서.”
내 말에 다시 요리하는 데 집중하며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귀찮아.”
누군가 듣는다면 굉장히 지탄받을만한 발언이었으나, 나는 어렸을 적부터 지서준을 봐왔고,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고백이라도 했어?”
“…….”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지서준이었다.
“받았네. 받았어. 맞지?”
내 말에 버섯을 썰던 손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짚으며 지서준이 물었다.
“뭐가 궁금한데?”
“……고백받아서 뭐라고 했어?”
내가 묻자 마저 버섯을 썰며 말했다.
“여자친구 있다고 했어.”
“너 여자친구 있어?”
내가 잠깐의 틈도 없이 바로 물었다. 하지만 지서준은 답할 생각도 없이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예쁘게 썰어진 채소와 마늘을 넣고 달달 볶았다.
고소한 냄새가 오피스텔에 퍼져나갔다.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뚝딱뚝딱 요리하던 그놈이 내 앞에 맛있어 보이는 오일 파스타를 내려놓았다.
허기짐에 파스타 면을 입에 넣다 문득 내 질문이 처참하게 씹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너 여자친구 있냐니까?”
혹시 이놈이 고등학생 때처럼 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극히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정말로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나한테 미안해서 말을 안 하는 것인지. 안개처럼 스멀스멀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나는 입에 음식물 든 채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지서준을 배려해 재빨리 파스타를 씹어 넘긴 후 물었다.
포크로 면을 휘휘 저으며 지서준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없어.”
“그,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어?”
“생길지도 모르니까.”
“…….”
아직 유예기간인 나를 지칭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아닌 언젠가 미래에 생길 여자친구를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답변에 답답해졌다.
“너, 너 고등학교 때처럼 막 엉뚱한 소문 내면 가만 안 둔다.”
“뭐? 내가 너랑 사귄다고?”
“그래! 그때 내가 얼마나 괴롭힘당한 줄 알아?”
“누가 너 괴롭혔어?”
그놈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뭔가가 내 머릿속에서 ‘펑’하고 터졌다.
“몰랐어? 막 선배들 찾아와서 괴롭히고, 화장실에도 불려가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식판 들고 가다가 일부러 발 걸어서 나 넘어지고!”
내 말에 점점 눈이 커지는 지서준이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누가?”
“누구라면 네가 알아?”
나는 억울한 마음에 포크를 들어 파스타 면과 새우를 콕 찍어 입안에 한가득 넣었다.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던 지서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
“푸훕!”
나는 입안에 있던 면과 새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그것들. 그 면과 새우는 예쁜 지서준의 얼굴에 살포시 안착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지서준과 나는 미동도 없었고, 오피스텔에는 무거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지서준 얼굴에 면발이 지서준의 콧바람에 팔랑이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것일까. 그래. 이건 그냥 내 망상에 불과해. 나는 그렇게 자기합리화했다.
“야옹.”
어느새 케이지에서 나온 똘이가 작게 소리를 냈다.
헛것이 아니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