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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의문의 여자친구. (12/97)


12화. 의문의 여자친구.
2022.08.10.



“야옹.”

다시 한번 똘이 장군이 울어댔다.

그 소리가 얼음 땡과 같은 효과였는지,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서준은 얼굴에 붙은 파스타 면을 손으로 치워 식탁에 휙 던져버렸다.


“미안…….”

나는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놈에게 사과했다.

내 사과에도 그놈은 전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깔끔쟁이 지서준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몰래 오피스텔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도망갈 새도 없이 지서준이 세수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먹던 파스타 그릇을 들어 음식물 찌꺼기 함에 버렸다.


“야! 아직 반도 안 먹은 걸……. 아깝게.”

나는 깜짝 놀라 지서준을 말리려 했지만,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 있기로 했다.

나는 지서준의 눈치를 보며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파스타를 다시 입에 넣어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놈의 탓도 반은 있지 않나?

저 콧대 높고 도도한 지서준이 사과를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혹시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부엌에서 말없이 정리하고 있는 지서준을 보며 열심히 턱을 놀렸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는지 행주를 팡팡 털어 널고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졸졸 따랐다. 그리고 내 앞에 놓는 지서준.


“나, 이거 먹고 뭐 할 일 있어?”

불안한 마음에 음료수를 보다 지서준에게 물었다.


“아니. 마시라고. 또 내뱉지 말고.”

“응? 으, 응…….”

나는 음료수를 마시면서도 그놈의 눈치를 끝없이 살폈다.

내가 마지막 한입까지 닥닥 긁어먹을 때까지 지서준은 내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빈 접시를 가져가 그것마저도 깨끗이 설거지를 마쳤다.


“화 많이 났어?”

내 말에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 안 났어.”

거짓말.

저렇게 기분 나쁜 티가 팍팍 나는데, 화가 안 났다니.


“앞으로는 입 꼭 다물고 먹을게……. 네가 갑자기 사과하니까 깜짝 놀라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사과하는 게 놀랄 일이야?”

“그야……. 10년도 지난 일 갖고 사과하니까…….”

“…….”

지서준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똘이 장군이 밥그릇에 놓인 사료를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나는 몰랐어.”

“뭐?”

“내가 한 거짓말 때문에 네가 괴롭힘당했다는 거……. 오늘 네가 말해서 알았어.”

응? 몰랐다고? 내가 말을 안 했던가?

나는 1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당장 어제 먹은 점심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마당에 그 일이 기억이 날 리 없었다.


“그랬어? 내가 말 안 했나?”

“응. 너 말 안 했어.”

“아닐 텐데……. 내 성격에 너한테 징징대지 않았나?”

“징징대는 건 매일 했는데, 그 일 때문에 괴롭힘당했다는 얘기는 안 했어.”

그랬구나. 내가 매일 징징대기는 했구나.


“다시 한번 미안하다.”

“됐어. 뭘. 다 지난 일이에요.”

나는 지서준의 사과에 괜히 쑥스러워 똘이 장군 밥 먹는 것을 더욱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나 오늘 왜 부른 거야?”

이제야 왜 저놈이 날 불렀는지 말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똘이 장군.”

“응?”

“너, 고양이 좋아하잖아. 똘이 장군 보라고.”

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하지만, 엄마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었고,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반려묘를 키울 수 있냐며 엄마가 결사반대했다.


“똘이 보라고 날 부른 거야?”

“응.”

나는 지서준의 말에 배시시 웃고는 똘이 장군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료를 충분히 먹었는지, 나와 지서준의 눈치를 슬슬 보며 거실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겼다.


“주인 안 닮았나 보네. 쑥스러움이 많은 걸 보면.”

“그러게. 남준모 안 닮았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똘이 장군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자고 간다고 편한 옷을 내놓으라며 귀찮게 굴었겠지만, 지금은 유예기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쉽지만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지서준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나를 따라 나와 내가 택시 타는 것까지 지켜보던 지서준이었다.

택시가 멀어지면서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지서준이 점점 작아졌다.


 

**

아직까지 지서준에게 들키지 않고 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지서준과의 유예기간은 2달이 남지 않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아직 현재의 내 심정은 ‘모르겠다.’이다.

정말로 모르겠다.

친구 같다가도, 아닌 것 같고, 남자 같다가도, 아닌 것 같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머리를 굴리니 지끈지끈 두통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두통의 다른 원인.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서준에 관한 소문이었는데, 유나라 씨가 차였다는 소문 이후, 그 원인이 지서준이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 퍼져나가며 온갖 추측성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지서준의 여자친구는 유명한 연예인이었다가, 재벌 집 손녀에서, 미국에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가 근래에는 돈 많은 아줌마라는 소문까지.


“문 대리님. 도대체 지서준 연구원님의 여자친구는 누구일까요?”

“그게 궁금해요?”

“네!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아줌마라고 하는데……. 그건 좀…….”

구석진 구내식당에 자리 잡아 식사했다. 요즘 회사 사람들의 대화 주제의 50프로는 지서준의 이야기. 내 앞에 앉은 백인하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 할 일도 없어. 왜 그렇게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대요?”

내가 짜증을 듬뿍 담아 투덜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연구지원팀 팀장님 여자친구는 궁금하지 않잖아요.”

막 40대가 넘긴 연구지원팀 팀장님은 우리 회사의 대표적 싱글이었다.


“근데 지서준 연구원님이 그 유명한 우리 회사 유느님을 여자친구 때문에 뻥 찼다고 하니까……. 궁금하긴 하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국을 퍼먹었다.


“문 대리님은 안 궁금하세요?”

“네. 저는 안 궁금해요.”

내 말에 입을 쭉 내밀며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백인하 씨였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내려가는 발길이 가벼웠다.

오늘은 금요일. 즉 내일은 휴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버티면 사랑하는 주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에 대리님은 뭐 하세요?”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함께한 고주연과 도이라를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얼마간 바쁘다며 튕기던 친구들이 드디어 나를 만나주겠다며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린 것이다.

괘씸한 놈들.

이번에도 날 퇴짜놓으면 똘이 장군을 만나 뵈러 가려 했다. 괘씸한 친구들과의 약속에 장군을 아뢰는 것은 다음날로 미뤘다.


“엄청 오랜만에 만나나 봐요. 대리님 표정 엄청 밝아졌어요.”

백인하 씨가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네. 엄청 친하죠.”

나도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



“문다율. 오랜만.”

도이라가 미리 카페에 나와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일찍 왔네?”

“어. 고주연 잔소리 듣기 싫어서.”

“하하.”

지서준과 만나보고 싶어 나를 이용하던 애들이 많았다.

도이라와 고주연은 유일하게 지서준을 핑계로 다가온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상처받고 훌쩍이던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 준 내 친구들.


“고주연은 조금 늦는다던데?”

“뭐?”

항상 약속시간에 늦는 도이라가 오랜만에 일찍 나온 날. 오히려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고주연이 늦어진다는 소식에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고주연이 도착하고, 한참을 잔소리하던 도이라. 누가 보면 한번도 안 늦은 사람 같지만, 우리 중 가장 지각 대장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어제 만난 것처럼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SNS에서 유명한 식당에 방문해 생각보다 맛없는 음식에 실망하고 나와 자주 가던 호프집으로 향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해. 우리가 언제부터 핫플레이스 따라다녔다고.”

주연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래도, 사진은 건졌어.”

나는 핸드폰에 찍힌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을 보여주자 고주연이 콧방귀를 뀌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게 제일 싫어.”

고주연이 말하자 도이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동조했다.

차가운 맥주잔의 맺힌 이슬이 또르르 흘러가는 모습을 보다가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말에 지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너희한테 말할 거 있어.”

“뭐?”

고주연과 도이라가 나와 지서준의 유예기간에 대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먼저 시작점부터 설명해야겠지.

나는 내 앞에 맥주를 한입에 털어놓고 입을 열었다.


“나, 지서준이랑 잤어.”

“뭐?”

역시나, 주연이와 이라는 격하게 반응했고, 나는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내가 술을 먹고…….”

내가 어떻게 지서준과 그렇고 그런 일이 생겼는지 설명을 했다. 설명이 끝나자 도이라가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슬며시 가져갔다.


“너는 술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고도 오늘 술이 술술 넘어가디?”

“주종을 바꾸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내 말에 머리를 쥐어 뜯는 고주연이었다.


“그래서, 그 유예기간이란 게 얼마나 남았다고?”

“1달하고……. 3주? 남았나?”

우리 자리에 있는 치킨이 식어가고 있었다.


“너는 지서준 어때?”

도이라가 내 술잔을 꼭 움켜쥐고 물었다.


“어떠냐니?”

“너희 태어나서부터 친구였어. 그런데 그렇게 삽시간에 남자로 보이고 그래?”

“지서준이 남자지……. 여자냐…….”

나는 괜히 치킨을 포크로 콕콕 찔러댔다.


“이거, 아직 지 마음도 잘 모르네.”

고주연이 핵심을 찔렀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

나는 도이라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이라는 나를 보고 음흉하게 웃더니 내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나에게 주었다.

맥주잔을 받아든 나는 도이라를 재촉했다.


“빨리 말해봐.”

“방법은 간단해. 한 번 더 자봐.”

 

 

**

나는 미리 사둔 똘이 장군의 간식을 들고 지서준의 집으로 향했다.


“뭐? 한 번 더 자 보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전날, 도이라에게 1절과 2절을 지나 4절까지 욕을 해주고 난 뒤에야 속이 풀려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누가 또라이 도이라 아니랄까 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똘이 장군님, 소신 도착했나이다.”

지서준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낮추고 장군님을 뵙기를 청했다.

똘이 장군은 금세 지서준의 집이 편안해졌는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자신을 뵙기를 청한 미천한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양이 간식을 꺼내 끝을 잘라 쭉 짜 올렸다.


“드시지요. 소신이 어렵사리 준비한 만찬이옵니다.”

똘이 장군이 선심 쓰듯 자리에서 일어나 할짝대더니 이내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내 머리 위에서 지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술 먹고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봐?”

“뭐라는 거야.”

나는 그놈의 말을 무시하고 똘이 장군님의 보필에 힘을 기울였다.


“똘이 장군님 언제가?”

간식을 다 먹은 똘이 장군은 이제 내가 귀찮다는 듯 저만치 떨어져 꼬리만 팔랑거렸다.


“다음 주.”

아쉬운 마음에 간식을 하나 더 뜯을까 고민하는데 지서준이 발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왜!”

나는 그놈의 발을 내 발로 꾹 누르며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싫어. 오늘은 똘이 장군님을 보필하는 날이야. 똘이 장군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아! 좀!”

나의 상황극이 더는 참아주기 힘들었던지 그놈이 짜증을 부렸다.

그래. 네가 오래 참았지. 저 성질머리가 어디 가나.


“무슨 영화?”

내가 묻자 지서준이 핸드폰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거 다큐멘터리 영화 아니야? 너 혼자 가서 봐.”

“나도 히어로물 싫어하는데 너랑 같이 봤잖아.”

“내가 그때 같이 봐 달라고 그랬던가?”

나는 빈정거리며 그놈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놈이 비열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향했다.

제가 뭐 어쩔 것인가. 나는 한껏 비웃었다.

하지만 지서준이 나에게 팔랑거리며 내민 종이를 본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영화관이 어디라고? 예매는 했고? 아이고. 늦으면 안 되지. 서두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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