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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들키는 것인가. (13/97)


13화. 들키는 것인가.
2022.08.14.


저놈이 한 손에 들고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저것. 아직도 저것을 갖고 있었다니.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저것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저놈에게 썼던 각서 중 하나였다.

그 말인즉슨, 저것 말고도 몇 장의 각서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각서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각서.

나 문다율은 한 달에 한 번, 지서준이 하자는 것을 군말 없이 할 것을 맹세합니다.

만약, 이행하지 않을 시, 지서준은 문다율의 부모님(아빠 문주성, 엄마 김인영)께 문다율이 4월 17일 오후 5시경 문다율의 집 거실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말할 것이고, 그 일에 대해 일절 불만을 품지 않고, 보복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한 달에 두 번을 조르고 졸라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바꾼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던 각서였다.

‘군말 없이’에는 형광펜으로 칠해 놓기까지 했다.

왜 이런 각서를 썼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자 똘이 장군이 무슨 일이냐는 듯 ‘애옹’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저 눈을 보고 어떻게 발길을 돌릴까. 쓰린 속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놈의 손에 각서가 있으니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나가야 했다.


“장군님. 빨리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빨리 다녀와 마저 수발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똘이 장군에게 인사를 하는 나를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지서준이 현관에서 나를 재촉했다.


“빨리 나와.”

“간다.”

 

**

지서준이 보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서울에서도 몇 군데 없었고, 집 근처 영화관을 두고도 꽤 멀리 나와야 했다.


“너는 택시비만 모아도 서울에 집을 사겠다.”

택시를 타고 가며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치는 서울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이라도 내려서 버스 탈래?”

“아니. 택시 타는 사람이 많아야, 택시 기사님들도 돈을 벌지.”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서준이 말했다.


“조만간 차 사려고, 미국에서 타던 차 괜히 처분했나 봐.”

“차? 회사도 가깝겠다. 갑자기 뭔 차를 사?”

“주말에 이곳저곳 가고 싶은데, 막상 차가 없으니 불편하네.”

지서준은 차 창문에 팔꿈치를 붙이고 손등으로 턱을 괴고는 심드렁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차가 없어 불편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어느 날 날 잡고 저놈의 통장 잔고를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왔습니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도 상영관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 많았다.

미리 예매한 덕분에 간단한 스낵만 사고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팝콘을 집어 먹으며 사람 구경을 했다.

내가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서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애인과 함께 왔다가 여자친구가 지서준을 흘끔거리자 투덕거리는 커플, 친구들끼리 왔는지 지서준을 보며 귓속말로 이야기하더니 깔깔거리는 여대생들. 지나가면서 대놓고 지서준을 바라보는 아주머니까지.

나 같으면 얼굴이 따끔거려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겠다.

하지만 옆에 있는 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뒤적이며 좀 있으면 볼 영화에 대해서 나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 준비만 7년이 걸렸대. 대단하지?”

나는 네가 더 대단하다 이놈아.


“오늘 봐서 괜찮으면, 이 감독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지.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느 사이트 가야지 찾을 수 있지?”

나는 꽤 오랜만에 이런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은 직진. 망설임 없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던지는 지서준이었다.

그러니 미국 유학 가서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고, 그 유명한 회사에 들어가 이름을 날렸겠지. 그 덕분에 우리 회사에 헤드헌팅 당해 당당히 수석 연구원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고.

그놈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놈이 대뜸 말했다.


“너 화장실 다녀와.”

나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며 내 품에 있던 팝콘 통과 콜라를 빼앗아갔다.


“왜? 나 아직 신호 없는데?”

“그렇게 콜라를 마셔대니 영화 중간에 화장실 다녀올 거 아니야. 시작 전에 다녀와.”

내 방광 사정까지 훤한 지서준이었다.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뭉그적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억지로 쥐어짜 볼일을 본 후 손을 닦는데 뒤에서 여자 둘이 나를 불렀다.


“저기요?”

“……저요?”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밖에 같이 있던 남자, 남자친구예요?”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하……. 아니요. 그냥 친구요. 친. 구.”

그러자 여자들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서로 바라보던 여자들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질문은 그거겠지?


“친구분 여자친구 있어요?”

역시나 다음 질문도 내가 예상했던바 그대로였다.

어떻게 그렇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질문이 한결같을까. 색다른 질문을 기대하는 나였다.


“네. 있어요.”

이 대답은 지서준이 만들어놓은 준비된 답변이었다.

바야흐로 중학교 시절.

.
.
.



“다른 사람들이 애인 있다고 물어보면 그냥 있다고 해!”


“어떻게 그래……. 너 여자친구 없잖아!”


“그냥 거짓말하라고,”


“왜! 너 왜 나한테 거짓말 시키냐!”

 
그렇게 투덕거리기를 한참, 각서 한 장을 없애주는 조건으로 나는 흔쾌히 거짓말해주기로 했다.

.
.
.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이어오는 내 답변이었다.

내 말에 대번 표정이 바뀌던 그 여자들은 내게 볼일이 끝났는지 고개를 살짝 내려 인사하더니 화장실 밖으로 향했다.

그녀들이 나가자 화장실 안에 있던 여자들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드라이어로 거칠게 손을 말린 나는 지서준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너 때문에 늦었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답했다.


“나오지도 않는 것 쥐여 짜느라 늦었지.”

내 말에 인상을 와락 구긴 지서준이 팝콘 통을 나에게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영 시간이야. 들어가자.”

지서준이 고를 영화는 확실히 마이너적 취향의 영화라서 그런지 상영관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 길고 긴 광고를 보며 지서준에게 물었다.


“러닝타임이 얼마나 돼?”

“120분?”

길다. 푹 잘 수 있겠다. 나는 만족의 고갯짓을 하고 다시 팝콘에 집중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지서준은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서준이 집중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도 한번 지식을 쌓아볼까 싶어 영화를 보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7년 동안 공들여 이 영화를 만들었을 감독에게는 미안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지서준이 나를 마구 흔들어댔을 때였다. 눈을 뜨니 스크린에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저런 영화를 앞에 두고 잘 수 있어?”

지서준이 상영관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어제, 큼. 흠.”

푹 잤는지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콜라를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술 마셨잖아. 그래서 그래. 숙취.”

내 변명은 취급도 하지 않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먼저 상영관을 나가버리는 지서준이었다. 나는 쫄래쫄래 뒤쫓아 갔다.


“너는 재밌었어?”

“어. 엄청.”

“그랬구나. 너라도 즐거웠으니 다행이네.”

나의 말에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뭐?”

“우리가 영화 취향은 정말 안 맞는 것.”

나는 이 똑똑한 지서준이 왜 이제야 이 사실을 알았는지 미스터리였다.


“우리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내 말을 다시 살포시 무시하고 걸어가는 지서준이었다.

**

내가 조르고 졸라 요즘 SNS에서 핫하다는 떡볶이를 먹으러 왔다. 갈치구이를 먹으러 가자는 지서준은 생선 먹고 돌아가면 똘이 장군에게 미안하지 않겠냐는 말에 이번에는 순순히 나의 말을 따랐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단무지를 오독오독 씹으며 내 앞에 있는 지서준을 구경했다. 떡볶이집을 이리저리 살피던 지서준.


“떡볶이집 아니고 카페 같네.”

“응. 요즘은 이런 떡볶이집 많아. 우리 고등학교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나는 신기한지 연신 두리번거리는 게 웃겨 킥킥거렸다.


“왜. 그렇게 웃어.”

내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빴는지 지서준이 물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구는 모습 보면, 굉장히 어색해서. 항상 다 알고 익숙할 것 같은데, 은근히 아니라는 말이지. 허당이야. 허당.”

내 말에 지서준이 어느새 하나 남은 단무지를 입에 쏙 넣었다.


“나도 인간이야. 모든 익숙하고 뭐든 다 아는 게 아니라고.”

“알지. 그런데, 너는 그럴 것 같아.”

“과대평가야. 너는 그런 과대평가하지 마.”

나는 가만히 지서준을 응시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무지를 리필하러 갔다.

단무지를 산처럼 쌓아 자리로 돌아왔다.


“다 먹어라.”

“다 먹을 거야.”

단무지를 갖고 돌아오고 잠시 뒤, 떡볶이가 나왔다. 떡볶이를 보던 지서준이 안에 든 사리들을 살피더니 하나씩 들어 올렸다.


“이건 뭐야.”

“중국 당면.”

“이건?”

“분모자.”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내 성의 없는 메뉴 설명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지서준이 별것이 다 있다며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갔다.


“맛있지?”

“뭐. 맛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먹는 지서준이었다.

나는 그런 지서준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나는 반대야.”

“뭐?”

떡볶이에 든 메추리알을 들다가 내 말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젓가락에서 메추리알이 ‘뽁’ 하고 빠져나갔다.


“나니까 너를 과대평가하는 거지. 다른 사람은 너를 두고 망상하는 거고.”

내 말에 그저 굳어 있는 지서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중국 당면을 길게 뽑아 내 앞접시에 가져다 두며 말했다.


“나는 너를 아니까, 너에 대한 기대감에 과대평가가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은 너를 알지도 못하면서 네 이미지만으로 상상하고 추측하는 거니까 망상이지. 그래도……. 네가 과대평가하지 말라면, 노력해 볼게.”

불기 전에 중국 당면 먼저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에 가득 넣었다.

맛있구나. 너무 맛있구나.

나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SNS에서 찬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서준은 앞접시에 굴러다니는 메추리알을 다시 공략하며 말했다.


“괜찮겠네. 너라면. 잔뜩 기대해라. 기대에 충족할 수 있게 노력할게.”

 

**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배가 볼록하게 나왔다. 배를 쓰다듬으며 떡볶이집을 나왔다.


“다음에는 다른 맛 먹어 보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이었다.


“뭐라도 마실래?”

지서준이 나에게 말했다.

떡볶이를 먹고 입이 텁텁하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때리고 싶었으나, 이번 주말이 아니면 똘이 장군을 볼 시간이 마땅치 않아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냥 집에서 마시자. 똘이 장군 보고 싶어.”

그러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이 택시 애플리케이션을 켜 택시를 불렀다.

택시 접선 장소에서 택시가 언제쯤 모습을 드러내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뒤에 ‘대리님’이라는 직함을 불러서.


“문다율 대리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의문과 놀람이 섞여 있는 표정의 백인하 씨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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