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내가 할 수 있는 일. (14/97)


14화. 내가 할 수 있는 일.
2022.08.17.



“대리님? 대리님이…… 왜…….”

백인하 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지서준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본 듯했다. 즉, 모르는 척하기에는 늦었다는 뜻이었다.


“아. 하하. 백인하 씨는 여기는 무슨 일로…….”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어떻게 설명해야 오해 없이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백인하 씨만이 아니었다.

지서준은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S.T 이야기를 꺼내는 즉시 발각될 위기였다. 진땀이 바작바작 나기 시작했다.


“저는 친구들 만나려고 왔다 가요……. 대리님, 지……. 우읍! 읍!”

나는 지서준을 언급하려는 그녀의 입을 잽싸게 막았다.


“나, 직장 동료를 만나서 말이야. 잠깐, 잠깐만!”

“택시 와.”

“어? 아. 그러네. 우리 택시 기다리고 있었지? 하하.”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서준은 백인하 씨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내 손을 치웠다.


“대, 대리님! 갑자기 입을 막으시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백인하 씨. 어……. 그러니까. 음…….”

내가 설명하려 하는데 뒤에서 지서준의 짜증 섞인 말이 들려왔다.


“문문. 택시 온다.”

뒤를 돌아보니 택시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백인하 씨! 내가 내일, 내일 다 설명할게요. 알겠죠?”

나는 그렇게 그녀를 두고 잽싸게 택시에 올랐다.

**



“서울이 그렇게 좁은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어떻게 만났지? 이런 우연도 있나? 허허.”

나는 충격으로 택시에서 계속 중얼중얼했다.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해?”

옆에서 지서준이 물었다.


“너는 수학 잘하니까……. 회사 동료를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주말에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뭐라는 거야…….”

“똑똑한 너도 그건 모르는구나.”

내 말에 그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회사 동료야?”

“뭐가?”

“아까 그 여자.”

“응? 응……. 뭐. 그렇겠지.”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겠지’는 뭐야.”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혼나는 29살 문다율이다.


“회사 동료 맞아.”

“그런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내가? 내가 언제? 나는 그런 적 없는데?”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또 뭐야. 뭘 숨기는 거야?”

“숨기다니, 뭘…….”

지금 저놈의 눈을 본다면 술술 불어버릴 것 같아 악착같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만히 말없이 날 보던 지서준이 나직이 경고를 날렸다.


“나중에 걸리면 알아서 해.”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었다.

지서준의 집으로 돌아와 똘이 장군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내일 어떻게 백인하 씨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어쩌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지서준은 내 별명까지 불러댔고, 심지어 같이 택시를 타고 출발하지 않았던가.

백인하 씨 앞에서 지서준에 대해 모르는 척, 무심한 척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똘이 장군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집사 노릇을 자처한 나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엉덩이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자 꼬리로 ‘탁탁’ 치며 손을 멈추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밥도 넘어갈 것 같지 않아 똘이 장군의 수발만 들다 지서준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지서준이었지만,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지서준이 아닌 백인하였으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씻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딱히 떠오르는 좋은 답은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지껄여보자.

그것이 내가 오랫동안 머리 굴려 생각한 답이었다.

**



“문 대리님. 제가 어제 너무 궁금해서 잠도 못 잔 거 아세요? 답장도 안 해주시고…….”

출근도 빨리한 백인하 씨.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붙잡고 탕비실로 끌고 간 백인하 씨였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네? 어제 보니까 꽤 가까운 사이 같던데……. 맞죠?”

“뭐,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사이랄까요?”

내 두루뭉술한 대답에 그녀는 재빨리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그동안 왜 모르는 척하셨어요? 네? 저한테만 말씀해주셔도 됐잖아요.”

“그……. 백인하 씨만이 아니고 온 직원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사과하자 귀엽게 입을 삐쭉 내민 백인하 씨는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말해주세요. 지서준 연구원님이랑, 대리님이랑 무슨 사이에요?”

솔직하게 말하자.


“친구예요. 29년 친구.”

“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사람 눈이 저렇게까지 커질 수 있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생일이 딱 이틀 차이나요. 그놈, 아니 지서준이 먼저 그다음은 나. 산부인과 동기라고 할 수 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친구요.”

“엄청난 인연이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하.”

“그런데 왜 말을 안 하셨어요!”

백인하 씨는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억울해 보였다.


“원래 그랬어요……. 중학교 때부터 항상 그랬어요……. 이렇게 쉽게 들키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쉽게 걸리는 걸 그때부터 뭐하러 아등바등 숨기려고 했는지…….”

“왜요? 나는 그런 친구 있으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고 싶은데.”

그건 백인하 씨 생각이고…….

나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면 그렇게 된답니다. 자! 모든 궁금증이 다 풀렸나요?”

나는 서둘러 질문 타임을 끝내고 싶었다. 이 순진한 아가씨에게 딱 여기까지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전부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아직 그놈과 내가 어떤 사이가 될지 모르는 판국에, 그녀에게 시시콜콜 그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백인하 씨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아. 백인하 씨. 지금 이건 우리 비밀로 해요.”

나는 그녀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왜요?”

“그놈, 아, 아니. 지서준은 제가 같은 회사 다니고 있는지 모르거든요.”

“네?”

 

 

**

그녀에게 점심을 사주고 나와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왜 지서준에게 비밀로 했냐는 말에는 ‘나의 회사 생활을 위해서.’라는 말을 했고, 백인하 씨는 생각보다 쉽게 이해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중, 저 멀리 있는 지서준을 발견하고 나에게 말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 덕분에 잽싸게 숨을 수 있었고, 오늘도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대리님. 생각보다 참 힘들게 사시네요.”

“저런 친구 두면 그렇답니다.”

지서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담소를 나누며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밀려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뒤에까지 밀려나 몸을 웅크렸다.


“제1팀 지서준 연구원 이야기 들었어요?”

좁디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속삭인다고 했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는 꽤 크게 들렸다.


“왜요? 누가 또 고백했대요?”

“안내 데스크 직원이요. 아까 봤죠?”

“아……. 엄청 예쁘던데?”

“고백했는데, 또 뻥 차버렸대요.”

“왜? 나는 그런 여자가 고백하면 얼씨구나 하겠구먼.”

“그건, 김 대리님이니까 그렇죠. 솔직히 지서준 연구원님 정도면 고르고 고를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 참 불공평하네.”

그들의 속닥거림은 잠깐 거기서 멈췄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 얼굴로 연예인이나 하지, 회사 다녀서 생태 교란을 일으킬까.”

“생태 교란이요? 하하하.”

그들마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백인하 씨가 나를 흘끔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왜 대리님이 비밀로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요.”

“네?”

나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에는 점심시간을 즐기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그녀가 발꿈치를 들어 내게 말했다.


“지서준 연구원님을 지키고 싶은 거죠? 잠복 경찰처럼요.”

나는 그녀의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을 하면 저런 스토리가 나올까 생각했다.

아까 그 사람들은 굉장히 무례했고 화가 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지서준의 친한 사람이라는 것이 회사에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무례함이 거기서 멈출까?

내 경험상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엘리베이터로 뛰어 들어올 때 닫힘 버튼 미친 듯이 누르기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그저 옆에서 그놈에게 헛소리를 지껄여 웃게 만드는 일 밖에.

그런데 잠복 경찰이라니.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데, 땡입니다. 그냥 내가 편해지자고 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았다.


‘생태 교란.’

너무나 기분 나쁜 단어의 선택이었다.

멍하니 컴퓨터 모니터만 보다 핸드폰을 들어 지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치킨에 맥주?]

조금 뒤 그놈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콜.]

 

**



“야! 빨리 와야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어째 집주인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익숙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그놈보다 치킨이 먼저 도착했고, 따끈따끈할 때 먹지 못해 군침만 흘리고 있었다.


“먼저 먹지.”

지서준이 백팩을 내려놓으며 셔츠 소매를 걷어 화장실로 가 손을 닦았다.


“같이 먹는데, 어떻게 먼저 먹냐? 내가 먼저 먹으면 넌 지금 목뼈밖에 못 뜯어.”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식탐은…….”

다행히 옷은 갈아입지 않고 내 앞에 앉았다.


“맥주 뭐 마실래?”

“아무거나.”

편의점에서 알뜰살뜰 골라온 수입 맥주 중 가장 덜 먹고 싶었던 맥주를 골라 지서준의 앞에 놓았다.

맥주캔을 따며 지서준이 물었다.


“웬일로 치맥?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으? 으아니. 구냐 치키니 머고 시퍼서.”

“한 번만 더 입에 음식물 물고 말하면 다시는 우리 집에서 뭐 못 먹게 한다.”

깔끔쟁이 지서준이 물티슈를 꺼내 내가 흘린 부스러기들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치킨 앞에서 더는 혼나기 싫어 꼭꼭 씹어 넘긴 후 말했다.


“그냥. 치킨이 먹고 싶어서.”

“그래?”

꽤 목이 탔는지 맥주를 꿀꺽꿀꺽 잘도 마시는 지서준. 한 번에 반이나 비운 그놈이 맥주캔을 탁하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너는 회사에서 무슨 일 없었지?”

“너 요즘 내 회사 생활에 꽤 관심 둔다?”

“나는 항상 너한테 관심 있었지.”

“요즘은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고…….”

나는 속으로 굉장히 뜨끔했지만, 시치미 뚝 떼고 말을 이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회사 끝나고 이렇게 같이 술 한잔하고, 회사에서 안 좋았던 일 있으면 상사 욕도 같이 하면서 풀고, 그러는 거지.”

“……….”

뭐라 한마디 할 줄 알았지만,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지서준이었다.

그러더니 날개와 닭 다리를 내 앞에 전부 몰아주더니 퍽퍽 살을 꺼내든 지서준이 ‘앙’ 하고 크게 물었다.


“요즘 생각은 열심히 하고 있어?”

“뭔 생각?”

나는 지서준이 건네준 닭 날개 하나를 집어먹기 좋게 뼈를 이리저리 비틀며 물었다.


“이제 2달도 안 남았어.”

아. 그 생각 말이구나.


“뭐……. 그냥.”

“그래.”

말이 끊기자 내가 닭을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힘든 일은 없지?”

내가 다시 묻자 내 앞에 앉은 놈은 별거 없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막, 너에 대해서 험담을 심하게 하거나,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안 좋은 소문 퍼트리거나 그러는 애들은 없고?”

내 말에 먹던 퍽퍽 살을 내려놓고 맥주를 들이켜는 지서준이 말했다.


“대충 넘기면 돼. 너는 신경 쓰지 마.”

역시, 혼자 삭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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