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소원권.
(15/97)
15화. 소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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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소원권.
2022.08.21.
“오늘 한판 때릴래?”
“뭘 때려?”
지서준이 미국으로 유학 가며 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서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야구 배팅”
“……콜.”
어렸을 때부터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동네 야구 코인 배팅장에서 만났다.
내기는 필수. 진부할 수 있지만 소원권이었다. 이 소원권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굉장한 효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필사적으로 게임에 임하곤 했다.
내가 3점을 깔고 시작하긴 하지만, 항상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었다.
“동네로 가자.”
지서준이 마저 맥주를 입에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사는 동네, 지서준과 내가 죽 살던 동네로 가자는 지서준.
“왜? 그냥 가까운데 찾아서 가자.”
“너 데려다줄 겸, 옛날에 했던 곳에도 한번 가볼 겸.”
데려다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어 지서준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까부터 허전한 마음을 전했다.
“똘이 장군 없으니까, 조금 허전하네.”
“그렇게 치킨을 정신없이 뜯어 놓고 갑자기 똘이 생각이 난다고?”
“치킨은 치킨이고, 똘이는 똘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서준이었다.
**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의 야구 코인 배팅장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동전을 교환하던 지서준이 물었다.
“몇 판 할래?”
“한 판씩만 해. 나이 들어서 학생 때처럼 휘두르다가 내일 키보드 못 친다.”
피식 웃더니 지서준과 나 딱 한판씩만 할 수 있는 동전을 들고 왔다.
“단판 승. 3점 깔고. 맞지?”
“응. 렛츠고!”
내가 먼저 호기롭게 게임장 안으로 들어갔다.
“후하 후하. 오랜만에 하니까 꽤 긴장되네.”
“적당히 해라. 오버하다가 다치지 말고.”
“알겠어.”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지서준의 입을 막기 위해 동전을 넣었다.
‘퍽.’
첫 번째는 아주 시원하게 헛스윙이었다.
“왜 이렇게 빨라? 이상한데?”
당황할 새도 없이 다음 공이 날아들었다.
“꺅,”
이번에는 내 짧은 비명과 함께 헛스윙.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야구 방방이를 꼭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다.
“두고 봐. 꼭 치고 만다.”
그렇게 몇 번의 공이 더 날아왔고, 나는 딱 3번 공을 건드릴 수 있었다.
“실력 다 죽었네, 문문.”
히죽거리며 약 올리는 지서준이었다. 저 표정을 보고 공을 때렸다면 더 잘 맞출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내가 쓸 수 있는 동전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내가 나오고 지서준이 게임장으로 들어갔다. 주저 없이 동전을 넣은 놈이 멋들어지게 폼을 잡았다.
‘캉.’
시원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갔다.
다음도, 캉. 그다음도 캉. 캉캉캉캉의 연속이었다.
“대박. 야 봤어? 저 형 대박이다.”
옆에서 야구 배팅하던 고등학생들의 시선이 지서준에게 꽂혔다.
폼도 좋았고 날아오는 공마다 시원하게 쳐 내니 순식간에 야구 배팅장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잠시 발을 멈추고 지서준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공을 날려버린 지서준이 위풍당당하게 게임장에서 나왔다.
“내가 최근에 안 해서 그래.”
“그래?”
“어. 대학 생활에 치이고, 회사 생활에 치이다 보니, 내가 방망이 들 틈이 있겠어?”
“그렇구나.”
지서준이 능글맞게 웃었다. 비웃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한 판만 더할래?”
“내일 키보드 못 친다며.”
내일 회사만 출근 안 한다면 2판은 더 할 수 있겠구먼.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말해. 소원.”
“고민해봐야지.”
“그런 게 어딨어? 빨리 말해. 오늘 넘어가면 소원권도 없어지는 거야.”
내 말에 지서준이 인상을 구기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지서준?”
누군가 지서준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미친. 하필 나타나도 저 자식이라니.
“지서준 맞지? 오랜만이다.”
지서준에게 반가운 척을 하며 다가오려는 놈의 앞길을 내가 막아섰다.
“그냥 가지?”
“누구? 아……. 아직 붙어 다니는구나? 여전하네.”
“너도 여전하구나?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쓰는 거.”
반갑게 인사했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중학교 때 지서준을 힘들게 한 장본인.
한태이였다.
나는 지서준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남 일처럼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지서준이었다.
“꺼져라.”
세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단단히 귀에 박으라고. 알아들었으면 알아서 꺼지라고.
그러고는 지서준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가자.”
지서준은 나에게 힘없이 끌려왔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반가웠다. 또 보자!”
“또 보긴, 저 미친놈이.”
귀싸대기라도 날려야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막 돌아서려는데 지서준이 막아섰다.
“됐어. 그냥 가.”
“그래도…….”
“가자. 문다율.”
지서준이 마저 길을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는 미친놈에게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날려주고는 지서준을 쫓았다.
**
지서준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걸은 시간만 따지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동네를 빙글빙글 도는 지서준의 뒤만 졸졸 쫓았다.
막 다리가 아파지려는 순간 지서준이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나 소원 생각났어.”
“뭐?”
나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하자 지서준이 내 이마에 꿀밤을 날렸다.
“아! 아프잖아.”
“너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서 어쩔래? 좀 전에 내가 소원권 따냈잖아. 오늘 지나기 전에 말하라며.”
아. 그 소원권.
나는 붉어진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말해.”
“오늘 같이 있자.”
‘멍멍.’
‘왈왈왈왈.’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서준의 말이 개소리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동네의 한 마리의 개가 짖자 사방팔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친구들이 많네. 오늘.”
내가 말하자 주머니에 거만하게 손을 꽂은 지서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 친구들이겠지.”
저 주둥아리에서 나온 말이 아님이 확실했다. 저런 사악한 웃음을 짓는 놈이 나와 같이 있자고 말했다. 그것이 소원이라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소원권 수락?”
“……너 진심이야?”
우리가 소원권을 걸고 한 내기는 항상 진지했고, 소원권을 쓸 때는 그보다 더 진지했다.
“응. 진심이야.”
내 동공은 지서준의 말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같이 있자니……. 9시를 넘어가는 시각. 오늘 같이 있자는 말인즉, 함께 밤을 보내자는 말 아닌가.
이놈이 오늘 스트레스를 받더니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아까 먹은 치킨이 잘못된 건가 고민하는데 다시 내 이마가 번쩍했다.
“아! 아프다니까! 때린 데 왜 또 때려!”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알고 있는데,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거라니…….”
“그냥 같이 있자고. 그게 다야.”
진심인가. 나는 지서준의 눈을 보았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눈이었다.
“뭐. 네가 원하면 이상한 것도 생각해보고.”
“뭐래!”
나는 지서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야!”
걷어차인 곳이 아픈지 두 손으로 부여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가자. 어디로 갈래? 너희 집?”
나를 노려보는 지서준을 뒤로하고 택시를 잡으러 큰 길가로 향했다.
**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들어오는 길, 내일 아침을 위해 클렌징 폼과 칫솔을 사면서 긴장감이 확 다가왔다. 분명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날은 뭔 일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같이 술 마셨나…….
“아줌마한테 전화는 했어?”
아까와는 전혀 다른 기분에 내가 뻘쭘하게 서 있는데 뒤에서 지서준이 물었다.
“응? 응. 이라네 집에서 잔다고 했어.”
“그래? 편한 옷 줄까?”
“어? 어…….”
지서준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들고 나왔다.
“씻고 갈아입어.”
“응.”
나는 잽싸게 욕실로 들어갔다.
“심장아. 너 지금 뭐 하냐.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나는 눈치 없이 나대는 심장을 주먹으로 콩콩 쥐어박고 간단히 씻었다. 지서준이 준 옷은 역시나 너무 컸다.
어렸을 적 두 집안이 함께 캠핑을 하러 갔을 때, 엄마의 실수로 내 옷 가방을 집에 두고 오면서 지서준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었다.
그때는 손의 반만 가려질 정도로 그렇게 차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반소매임에도 팔꿈치를 뒤덮은 길이와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추켜올려야 했다.
바지를 질질 끌고 나가자 지서준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점점 얼굴이 가까워졌다.
“뭐, 뭐 해.”
“가만히 있어.”
그냥 같이 있는 거라고 그랬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나는 박력 있게 다가오는 지서준을 보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응?
당장이라도 입을 붙여 올 것 같은 기세였는데 입술이 아닌 발치에서 꼼지락거리는 지서준이었다.
치렁치렁한 바지를 3겹이나 걷어 올리는 중이었다.
“너 눈은 왜 감아?”
“그, 네가……. 빨리 걸어오니까. 큼. 흠.”
지서준의 머리와 귀 끝만 보이는데도, 이놈이 날 비웃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적당하게 걷어 올린 바지 길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지서준이었다.
“피곤하면 먼저 누워 있어. 나는 씻고 들어갈게.”
‘쾅.’
그 말을 끝으로 욕실 문이 닫히더니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는 왜 한담…….”
나는 욕실 문을 잔뜩 노려보다 눈이 아파져 지서준의 침대로 갔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데, 흥. 내가 ‘네가 침대에서 자’ 이럴 줄 알고?”
꿍얼거리며 침대로 들어가자 지서준이 쓰고 있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훅 올라왔다.
“냄새 좋네.”
나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멀뚱멀뚱 천장을 보았다. 평소에 그 많던 잠은 다 어디로 갔는지 정신이 점점 맑아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물소리가 끊기고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리더니 문소리가 들렸다.
“자?”
“응.”
내 말에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침대가 꿀렁 했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지서준이 눕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
정말로 그 집 치킨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지서준의 ‘미안하다’는 말에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지서준을 보았다.
“오늘은 정말 혼자 있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왜?”
“글쎄, 한태이 만나서 그런가?”
지서준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새끼는 잊어버려. 좋은 거 뭐 있다고. 아까 때려주고 오는 건데, 네가 말리는 바람에. 내가 오늘 잠 못 자면, 다 한태이 그 자식 못 때려서 억울해서 그런 거니까 알아둬.”
“하하하.”
지서준은 한태이 그 자식 때문에 한동안 대인기피증까지 있었다.
제멋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한태이 때문에 지서준은 꽤 힘들어했다. 하필, 내가 기분 풀어준다고 데려갔던 곳에서 만나다니.
“오늘은 기분이다. 소원권 복원! 지금 쓴 건 그냥 내 호의로 생각해.”
내 말에 천장만 보던 지서준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후회 안 해?”
“후회를 왜 해.”
“그럼, 소원권 지금 써도 돼?”
“지금?”
내 말이 끝나자 갑자기 지서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놈이 또 장난을 치는구나.
내가 눈을 부릅뜨자 지서준이 가까이 오다 말고 멈췄다.
“눈 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