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16/97)


16화.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2022.08.24.



“뭐야!”

나는 다가오는 지서준의 얼굴에 당황에 몸을 일으켰다.

‘빡.’

정말로 호두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번개가 뻔쩍한다는 표현이 뭔지 아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야! 그렇게 갑자기……. 아…… 아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내 눈에 보이던 별이 사라지면서 둥둥 울려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지서준에게 소리쳤다.


“네가 갑자기 들이대니까 그렇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기를 한참. 나는 이제 점점 통증이 없어지는데, 지서준은 아직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

“뇌진탕인 것 같아.”

“왜? 막,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나는 지서준의 팔을 잡고 흔들어 댔다.


“흔들지 마! 아직도 골이 울리니까.”

나는 잽싸게 손을 떼고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똑같이 부딪쳤는데, 나는 멀쩡하고 저놈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조금 짜증이 일었다.


“너 지금 아픈 척하는 거지? 어? 그렇지?”

내 마음속 분노의 불꽃이 점화되었지만, 그놈의 눈빛을 보고는 불꽃이 파스스 꺼져버렸다.


“지금 아픈 척하는 거로 보여?”

맙소사. 그놈이 움켜쥐고 있던 손을 치우자 이마 한가운데가 붉게 올라와 있었다.


“멍드는 거 아니야?”

“뭐?”

내 말에 침대에서 잽싸게 튀어 나가 거울을 보던 그놈이 다시 나를 째려봤다.


“왜, 왜! 내 잘못 아니다? 네가 그렇게 다가오니까 내가 놀랐잖아,”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곧 퍼렇게 자리 잡을 멍이 사라질 때까지 들들 볶일 테니까.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던 지서준이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얼음찜질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침대에서 내려와 슬그머니 거실로 나갔다.

내 모습을 보던 지서준이 얼음이 담긴 주머니를 이마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소원권 쓰다가 죽을 뻔했네.”

나는 지서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져 물었다.


“너! 아까 왜 그랬어? 어?”

“하! 모르면 말고.”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지서준.

지서준이 말아줬던 바짓단 한쪽이 풀려버려 질질 끌렸다. 나는 대충 다시 말아 올리고 그놈에게 가까이 갔다.


“너는 무슨 소원을 장난치는 데 써! 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소원권 재발급 해줬는데…….”

여전히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는 놈.


“그래! 됐다. 됐어. 소원권은 무슨……. 퉤퉤퉤. 취소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널찍한 침대 한편에 자리 잡고 누웠다.

아직도 놀란 것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심장이 벌떡벌떡 뛰어댔다.

**

옷만이라도 갈아입고 출근하기 위해 일찍 지서준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현관 앞. 머리에 까치집을 하나 장만한 지서준이 눈을 비볐다.


“더 자라니까 왜.”

“그래도……. 다음 주에는 차 나온대.”

갑자기 여기서 차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지금 자기 차 뽑았다고 자랑하는 건가?


“자랑 아니고, 차 있었으면 데려다줬을 텐데……. 집에 도착해서 연락해.”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니. 가자미눈을 원래 모양대로 돌렸다. 그러다 지서준의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큼……. 파운데이션 여기다 두고 갈까?”

내가 왜 화장품을 두고 간다는지 알아챈 지서준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됐어. 신경 쓰지 마. 가라, 빨리.”

내 등을 밀어 현관 밖으로 내보내더니 문을 콱 닫아버렸다. 나는 그 현관문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니까 왜 까불고 있어. 쯧.”

 

**

집에 도착해 옷만 갈아입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하품하며 방에서 나왔다.


“이노무 지지배가!”

“다, 다녀오겠습니다.”

사실 어젯밤 나는 외박한다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외박한다면 칠색 팔색하며 잔소리를 퍼부어대는데……. 사실 잔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는 엄마의 철학은 꽤 강고했다.

친구들과 술 한잔하다 자고 가라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허락받기 싫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문다율, 생각보다 귀하게 자라네.’

라며 비웃었다.

생각보다 귀하게 자란 문다율은 등짝을 맞기 전에 빠르게 집을 나섰다.

핸드폰이 열심히 울려댔지만, 어차피 맞을 등짝, 저녁에 와서 맞자고 생각한 후 회사로 향했다.


“문 대리님!”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요즘 따라 유난히 나를 챙기는 백인하 씨가 쪼르르 달려왔다.


“왜, 왜요.”

그녀는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서준 연구원님 얼굴, 어떻게 된 거예요?”

지서준의 얼굴이 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마에 시퍼런 멍이 딱! 있던데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나라에서 보호해도 모자랄 얼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나라에서 할 일도 없답니까? 뭔 천연기념물.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문 대리님은 아는 것 없으세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대리님은 지서준 연구원님이랑 친한 친구 사이잖아요. 혹시 아시나 해서…….”

“저야 모르죠? 그런 것까지 막 알고 그런 사이는 아닌데요?”

내가 만들었습니다. 그 멍.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내가 모르는 척 딱 잘라 말하자. 그녀는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내 책상 위 작은 거울에 비친 나의 이마는 번들번들하기만 했다. 가방 속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꾹꾹 눌렀다.

오늘따라 일찍 일어난 탓인지, 오전에 영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팀장님의 눈치를 살피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파운데이션, 그것 좀 빌려줘.]

지서준에게 온 문자였다.

백인하 씨도 아침에 나를 붙잡고 호들갑 떨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의 집중을 받는 지서준은 꽤 멍이 신경 쓰였나 보다.

웬만하면 점심시간에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양심이란 것이 있어 지서준에게 파운데이션을 주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인하 씨. 오늘은 점심 따로 먹을게요.”

“네?”

항상 같이 점심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나는 그녀와 함께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생긴 점심 약속을 위해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혹시, 지서준 연구원님이랑…….”

“음……. 뭐. 그렇게 됐어요.”

“저, 대리님.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나는 그녀의 부탁에 조금 난감했다. 사실은 같이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지서준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데리고 그놈과 만나면 일단 경계를 넘어서 없는 사람 취급하기 일쑤였다.

잘못한 것은 그놈인데, 항상 사과는 내가 하고 다녔지.


“음……. 아마 힘들 것 같아요. 미안해요. 인하 씨.”

“아니에요! 갑자기 제가 부탁드린 건데요. 뭐. 하하.”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웃었지만, 아쉬운 마음까지는 숨기지 못한 백인하 씨였다.

**



“빨리 안 와?”

식당 한편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나를 부르는 지서준을 발견했다.

나는 살짝 눈을 흘겨주고 지서준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자.”

나는 앉자마자 화장품 파우치를 열어 조금씩 덜어서 가지고 다니는 파운데이션을 내밀었다.


“거울 있어?”

파우치의 작은 손거울을 건네며 물었다.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 그러니까, 내가 아침에 준다고 할 때 받지 그랬어.”

내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파운데이션을 쭉 짜 이마에 덕지덕지 발랐다.


“야.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서준의 옆에 앉았다.


“이마 갖다 대봐.”

 

 
나는 지서준의 얼굴을 잡고 멍이 난 부분에 파운데이션을 펴 발라 톡톡 두드렸다.


“아파!”

“이렇게 해야 티가 안 나지!”

피부가 하얀 편인 지서준은 다행히 내가 가진 파운데이션의 색과 거의 흡사했다.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집중하며 발랐더니, 티도 안 나고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 봐. 잘생겼네!”

나는 거울을 들어 완벽해진 내 앞의 앉은 놈의 이마를 보여줬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보던 지서준도 만족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김치찌개를 퍼 올렸다.


“이제 알았지? 내 머리 이 돼지고기보다 두툼한 거?”

나는 김치찌개 안 실한 돼지고기 한 점을 집게로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그땐 안 봐준다.”

아직도 이마에 난 멍이 성가신지 그 부위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던 지서준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장난?”

김치찌개 먹고 오리발 내밀기인가. 아니면, 이놈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내가 내 입으로 그 글자를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을.


“그, 어제. 네가. 그.”

“어제. 뭐?”

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제, 갑자기 얼굴 들이민 거!”

얼마나 놀랐던지. 그때의 심장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거? 장난 아닌데?”

나는 밥을 잔뜩 올려놓은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다 내려놓았다.


“하하하.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지서준이 눈을 찌푸렸다.


“이 영화 안 봤어?”

“어.”

재미없는 놈.

어색해지기 싫어 유명한 영화의 대사를 따라 했지만,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니. 나는 멋쩍어져 다시 숟가락들 들었다.


“장난 아니라고. 소원권 쓸 때 한 번도 장난으로 쓴 적 없었어.”

보글보글 끓다 못해 졸아들기 시작하는 김치찌개였다. 김치찌개 휴대용 버너를 끈 지서준이 고기를 잔뜩 담아 내 앞 그릇에 담았다.


“일단, 먹어. 밥 굶으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아는 문다율을 굶겨서 보낼 순 없지.”

내 앞에는 지서준이 퍼준 김치찌개가 맛있게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어 퍼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지서준 쪽은 보지도 않고 김치찌개만 보며 열심히 퍼먹었다.

식당을 나와 저녁에 만나자며 쿨하게 돌아서는 지서준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저놈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장난이 아니라면, 저놈의 어제 했던 짓은 뭘까.

왜 그런 짓에 소원권을 달았을까.

이 머리로는 생각이 날 것 같지 않았다.

**



[장난으로 그런 짓 하는 놈들은 비 오는 날에 먼지 나게 맞아야 해.]

[장난이 아니면?]

[그렇다면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면?]

[아 몰라!]

이번에 유럽으로 세미나가 잡혀 있는 연구원의 트래블 플랜을 짜다가 막간을 활용해 척척박사, 연애 박사 도이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동료의 사연을 가장해 물어봤는데, 영 시원찮은 답변만 왔다. 나의 끝없는 질문에 화내는 이모티콘을 올려놓고 사라진 도이라.


“박사님도 모르는 거를, 내가 어떻게 아냐고.”

“무슨 박사님이요?”

옆에서 기지개를 켜던 백인하 씨가 나의 혼잣말을 듣고는 물었다.


“내 친구가 연애에는 정말 빠삭하거든요……. 그래서 뭘 물어봤는데 모르겠다고 하니까. 내가 한 질문이 희대의 난제는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뭐 질문하셨는데요?”

얼마간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같이 어울리다 소원을 건 내기를 했고, 이긴 남자가 소원권을 핑계로 갑자기 스킨십을 하려고 했다.

간략히 설명하니 턱에 손을 대고 진지하게 듣던 백인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네요.”

“그거?”

“그 남자가 그 여자 좋아하네. 맞죠?”

“그 남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대요.”

“음……. 그 여자가 눈치 꽝 아니에요?”

“네? 눈치 꽝이요? 무슨 그런 심한 소리를…….”

“네?”

“아니에요. 하하하. 계속 말해요.”

“그 남자는 계속 좋아했는데, 그 여자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죠. 어떤 ‘팡’ 하는 계기로 남자가 다가가기로 마음먹었고, 그제야 그 눈치 더럽게 없는, 아, 아니 그 여자가 ‘어? 뭐지?’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니 그런 것도 눈치 못 채고, 쯧쯧. 남자가 불쌍하네요.”

너무나 그럴듯한 예측에 귀가 솔깃했다.

돗자리 깔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백인하 씨가 갑자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여자 대리님 친한 분은 아니죠? 내가 너무 말이 심했나? 하하.”

“아니요! 하하. 나는 눈치가 빨라서 참 그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되네. 하하.”

그녀가 내 말에 싱긋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그저 나도 바보처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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