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들켜버린 비밀. (17/97)


17화. 들켜버린 비밀.
2022.08.28.


정시 퇴근.

그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이 시대에 회사원에게 이만큼 아름다운 단어가 있을까 싶다.

정시 퇴근 후, 조금 늦어진다는 지서준의 말에 천천히 그의 오피스텔로 걸어가고 있었다.

회사가 밀집된 곳을 걷자니, 아직도 빌딩에 훤히 켜져 있는 불들을 보며 야근 동지들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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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남자가 불쌍하네요.”

 
그러다 낮에 백인하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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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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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계속 좋아했는데, 그 여자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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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그건, 백인하 씨가 지서준을 모르고 하는 소리죠. 그놈이 나를 계속 좋아했다니.

낮에 백인하 씨가 한 말이 생각나자 어이가 없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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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눈치 꽝 아니에요?”

 
이 말은……. 솔직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눈치 없다고, 그동안 지서준에게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던가.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던 신데렐라만이 나와 견줄 수 있을 정도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게 대하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백인하 씨의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지서준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을 닫고 들어갔다.

지서준의 오피스텔에 도착해 안에 들어가 냉장고부터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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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거 죄다 풀이야.”

마음에 안 드는 냉장고 속 음식들에 문을 닫고 찬장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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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컵라면 발견.”

물을 끓여 붓고 기다리기를 4분. 냉장고에는 윤희 아줌마표 김치를 꺼내 덜었다. 컵라면을 호호 불며 먹고 있는데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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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늦는다며……. 일찍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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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찍 왔어. 컵라면 먹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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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너무 배고파.”

내가 라면 먹는 모습을 보던 지서준이 가방만 내려놓고 내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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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있으면, 나 라면 다 먹고 나서 말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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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마저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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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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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이 사라졌어.”

왜 식욕이 사라졌을까. 지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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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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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 없는 지서준이었다.

어차피 이것이 마지막 라면이었다. 먹고 싶다고 해도, 줄 것이 없었다.

라면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뒷정리를 마치니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지서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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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 먹었어.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나 오늘 엄마한테 등짝 가져다 대야 해.”

좀 있음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날 내 등짝이었다. 벌써 등이 따끔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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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턱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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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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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네가 소원권이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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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야구 배팅 게임에서 딴 거 아직 못 썼잖아.”

이놈 보게.

아주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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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재발행 취소한다고 했잖아! 침까지 뱉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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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발행한 걸 어떻게 취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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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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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제 소원권 쓰려다가 이마가 이렇게 됐는데, 억울하지 않겠어?”

파운데이션이 조금 지워진 이마에 푸른색이 얼룩덜룩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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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 소원은…….”

그놈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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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유예기간 동안, 네가 우리 사이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

그렇게 소원권이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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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엄마 전화도 안 받고! 내가 너 그렇게 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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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참아. 응?”

나는 좁은 집을 이리저리 도망 다녔고, 엄마는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나를 쫓고, 아빠가 엄마를 쫓아다니며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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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나이가 몇인데 외박도 못 하게 해? 그러다가 시집 못 가면 엄마가 평생 데리고 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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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무 지지배가! 외박한다고 시집을 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부모는 생각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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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몰랐잖아! 내가 아침에 나오는 거 보고 알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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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린 입이라고!”

한 대 맞았으면 됐지, 두 대는 못 맞아 주겠다.

내년이면 60줄에 들어서는 아줌마가 팔팔해도 너무 팔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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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제 어디서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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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도이라네 집에서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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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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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내가 걔네 말고 친구가 또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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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저걸 낳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어. 허휴.”

엄마는 답답한지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쳐댔다. 아빠는 엄마를 잡고 나에게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그 신호에 나는 잽싸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로 쓰러졌다. 아직도 엄마에게 맞은 등이 후끈거렸다.

아픔이 점점 사라져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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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생각해 봐.”

 
지서준의 목소리가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지서준이 던진 말에 머리는 왕왕 울려대고, 엄마에게 맞은 등은 화끈거렸다.

**

위기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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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율 대리님 잠깐 저 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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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팀장님.”

하던 일을 멈추고 팀장님 자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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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장이 맡았던 플랜이 있는데, 갑자기 단체 세미나가 잡힌 건이 있어서, 그래서 이 과장이 단체 플랜 건을 맡고 이 플랜을 문 대리가 가지고 가줬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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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가이드라인만 잡힌 플랜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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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나는 서류를 훑어봤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하고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눈을 비벼봐도, 멀리 놓고 봐도, 가까이 놓고 봐도 내가 맡게 된 해외 출장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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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연구팀 수석연구원 지서준.”

아. 올 것이 왔구나.

하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 너무 빨랐다.

결국, 나는 지서준에게 커밍아웃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어젯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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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유예기간 동안, 네가 우리 사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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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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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너하고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다율, 네가 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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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혹시 나 좋아해?"

 
내 질문은 대답도 듣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계속 대답을 강요하는 나를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고백인 것 같지만, 고백이 아닌 고백을 받은 바로 다음 날. ‘나 그동안 너 속였어.’라는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니.

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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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 또 두통이에요? 병원 가보시는 게 어때요? 요즘 자주 그러시는 것 같은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 백인하 씨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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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고칠 병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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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구나.”

스트레스랄까, 뇌의 과부하랄까. 암튼 그런 거였다.

조금 사그라드는 고통에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트래블 코디네이터 문다율’이라는 이름이 찍힌 보고서를 보고 알아차리는 것보다 내가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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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에 잠깐 만날래?]

메시지를 보내고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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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약속 있는데……. 그럼 잠깐 커피만 마셔도 되나?]

나는 여기서 지서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내가 지서준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했을 때, 선약이 있거나 시간이 애매하다면 단박에 ‘다음에.’ 혹은 ‘빨리 말해. 나 바빠.’라고 대답했던 지서준이었다.

그런 지서준이 선약이 있음에도 시간을 쪼개 만나자는 답을 했다.

별것 아닌 메시지 내용일 수 있겠지만, 나는 지서준의 말보다 그 답장 하나로 지서준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서준은 마음을 다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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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점심 먹고 연락해. 내가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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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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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식당에서 백인하 씨와 밥을 먹고 지서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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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 회사 근처로 갈까?]

아니. 네 회사가 내 회사고, 내 회사가 네 회사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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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 근처에 있어. 회사 후문으로 나가서 좀 가다 보면 큰 공원 있지? 거기서 봐.]

나는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공원으로 걸어갔다.

점심시간을 틈타 산책을 하거나, 광합성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서준을 찾는 일은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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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사람, 사원증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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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여기 S.T 다니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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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거기 사람들 진짜 좋겠다. 매일 그런 얼굴 보면서 출근할 거 아니야.”

저기 있구나. 지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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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들이 흘끔거리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 지서준이 있었다. 햇빛이 이놈에게만 비추는 것일까. 유달리 반짝거리는 지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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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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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마워.”

커피를 받아든 지서준이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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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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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러낸 게 좀 불안해서. 뭐야. 뭔 사고 쳤어?”

나는 순간 지서준이 우리 집 김 여사와 오버랩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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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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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불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나는 가방에서 내 사원증을 꺼내 지서준에게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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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몸을 뒤로 빼는 지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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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그제야 내가 내민 사원증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사원증을 다시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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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네 사원증으로 뭐 어쩌라고.”

나는 내 예상과 너무 다른 지서준의 반응에 얼떨떨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혹 지서준이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지서준의 눈앞에서 흔들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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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치워. 그래서, 할 말이 뭐야.”

나는 한 발짝 움직여 그놈과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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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설마 알고 있었어?”

내 말에 전혀 표정 변화 없이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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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등학생들한테 삥 뜯기던 날.”

갑자기 지서준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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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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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쓰레기통 겸 가방에서 봤어.”

아뿔싸. 나는 손에 힘이 빠지며 들고 있던 사원증을 놓쳤다.

바닥에 내 사원증을 뚫어지게 보던 지서준이 주워 나에게 사원증을 넘기더니 삐딱하게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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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출장 보고서 올라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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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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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음 주에 일본으로 출장가는 거, 그거 확인하고 이실직고하러 온 거네. 맞지?”

내 부서까지 꿰뚫고 있었던 지서준이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 지서준은 터트리기 좋은 날을 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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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확인했다기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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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끼며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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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말 안 하려고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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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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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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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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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엮이면 엄청 피곤해지니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도, 배짱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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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겠어.”

지서준이 나에게 사원증을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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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잘해 봅시다. 문다율 대리님.”

그렇게 말하고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회사로 향하는 지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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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데?”

마지막 저놈이 나에게 보여준 미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그날 바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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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건이 있어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가 들어온 지 확인도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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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

내 옆에 있던 백인하 씨가 나를 마구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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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준 연구원님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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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제야 파티션 너머 고개를 빼꼼히 드니, 그놈이 환한 미소를 짓고 저벅저벅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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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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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팀 지서준 연구원입니다. 문다율 대리님 만나러 왔습니다.”

갑자기 사무실로 쳐들어온 지서준의 손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과자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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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본 출장 건 때문에 그러시구나? 문다율 대리님?”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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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고 보니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 직원들도 지서준과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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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사내 메일로 연락하셔도 됐는데, 하하하.”

메일과 사내 메신저도 있는데 굳이 찾아온 지서준.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우리 팀 팀원들을 바라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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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다율 대리님과 제가 초중고 동창입니다. 그래서 잠깐 얼굴도 볼 겸 해서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서준이 손에 든 과자를 흔들었다. 이건 복수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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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네가 좋아하는 거.”

해맑은 얼굴로 폭탄을 투척하는 지서준.

우리 팀과 지서준의 말을 들은 다른 팀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에 흔들리는 과자를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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