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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병 주고 약 먹이기. (18/97)


18화. 병 주고 약 먹이기.
2022.08.31.



“팀장님! 저 잠시만 나갔다 와도 될까요?”

“그, 그래요.”

나의 기세에 얼떨결에 허락해 준 팀장님이었다.

나는 지서준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사무실에서 나왔다.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어서 그런지 옥상정원은 한적했다. 몇몇 사람들이 흘끔 쳐다보기는 했지만, 어차피 퍼질 소문, 신경 쓰지 않았다.

이판사판이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 맞지?”

“내가? 뭘?”

나도 한 뻔뻔 하는데, 이럴 때의 지서준의 뻔뻔함은 이길 수 없었다.

지서준은 나에게 주려 했던 과자 봉지를 북 찢어 입에 넣었다.


“메일이나, 메신저로 말하면 될 일을 일부러 우리 팀으로 찾아온 거잖아!”

“메신저로 어떻게 과자를 줘?”

과자를 하나씩 입에 넣으며 지서준이 말했다.


“아! 그리고 내 해외 출장 담당이 너야?”

“뭐?”

“내 출장 건을 본 게 아니고, 담당자가 너였구나? 그래서 부랴부랴 점심시간에 나 불러내서 고백한 거고.”

지서준에게 따지려 씩씩거리던 내 입이 꾹 다물렸다.


“언젠가는 마주칠 수밖에 없는 부서에서 일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짓말을 한 거냐?”

“…….”

여전히 벌어질 생각을 않는 내 입. 옥상의 소음을 뚫고 지서준이 과자 씹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래. 뭐. 네가 왜 이제 서야 말했는지는 더 이상 안 물을게.”

인심 쓰듯 지서준이 말하더니 과자 봉지 입구를 여며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내가 맘껏 아는 척해도 상관없지?”

지서준의 표정에는 고등학교시절 많이 봤었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회사에서는 되도록 아는 척하지 않기로 해.”

“왜?”

“그야…….”

“나 때문에 시끄러워질까 봐?”

내 뒤통수 위로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놈의 구두코만 바라보던 내 눈이 그놈의 얼굴로 향했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


“난 그럴 생각 없어.”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긴 지서준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내 일본 출장. 일본에서 체류하는 기간을 짧게 잡아줬으면 좋겠다.”

 

**

회사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나는 유명인으로 단숨에 급부상했다. 회사에서 밀고 있는 바이러스 제1팀 수석연구원 지서준의 친한 친구로.

애매하게 겉도는 듯한 관심에 고등학교 시절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재생되는 듯했다.

물론 그때와 내가 같지는 않았다. 많이 쌓인 경험치, 더해진 뻔뻔스러움, 사회생활이 만들어준 가면과 인간관계의 팁. 모든 것이 레벨 업했다.


“문 대리님. 지서준 연구원이랑 친한 사이라면서?”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꼭 저렇게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어제는 구내식당에 갔다가 흘끗거리는 시선에 문다율 인생 13년 만에 체할 뻔했다. 오늘은 절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아 백인하 씨를 불렀다.


“인하 씨. 우리 오늘은 밖에서 식사할까요?”

“네. 좋아요!”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다른 층 직원의 여사원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몰래 흘끔거리거나, 아니면 대놓고 보는 시선에 나는 일부러 턱을 더 높게 들었다.

불편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백인하 씨와 회사를 빠져나왔다. 간단하게 먹자는 나의 말에 근처 분식집에 와 김밥을 먹는 백인하 씨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요? 나 얼굴에 뭐 묻었어요?”

내가 묻자 좌우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김밥을 꿀꺽 삼켰다.


“왜 대리님이 그렇게 아등바등 비밀로 하려고 했나 정확히 알겠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 그래도 저한테 비밀로 한 거는 아직도 꽁해 있어요.”

“미안해요.”

“그러면 저 김밥 한 줄 더 먹어도 될까요?”

“그래요. 돈가스 김밥 시켜도 괜찮아요.”

밥을 먹고 산책이라도 하자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젓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탕비실에서 탄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땅이 꺼지겠어?”

아직은 한산한 사무실, 지서준이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


“여긴 왜 왔어?”

내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훑자 지서준이 내 자리에 커피를 ‘턱’ 올려놨다. 내가 좋아하는 프랜차이즈의 대형 사이즈 커피였다.

내 자리에 놓인 종이컵을 흘끔 보더니 지서준이 말했다.


“괜히 사 왔네. 커피 마시고 있는 줄 알았으면. 다시 가져갈까.”

나는 재빨리 인스턴트커피를 옆으로 치우고 지서준이 사다 준 커피를 홀짝였다. 내 모습을 보고는 지서준이 픽 웃었다.


 


“일본 갔다가 뭐 사다 줄 것 없어?”

“난 없는데.”

“너 말고, 아줌마 아저씨한테도 물어봐.”

“네가 전화해봐. 우리 엄마 너한테 전화 오면 종일 웃고 다니겠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나에게 물었다.


“괜찮냐?”

“뭐가?”

나는 커피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지서준을 올려다보았다.


“나한테도 너랑 무슨 사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 너는 더 할 것 아니야.”

“병 주고 약 주냐?”

“……고등학교 때처럼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누가 괴롭히면 말해. 알겠어?”

그렇게 무심히 툭 내뱉고는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 막 안으로 들어오는 백인하 씨와 마주쳤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 네.”

지서준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잽싸게 빠져나갔다.


“문 대리님. 지서준 연구원님 왜 온 거예요? 대리님 보러 온 것 맞죠?”

“커피 가져다주러요.”

“와. 엄청 스위트하시다.”

나는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지서준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기 전날. 점심 먹자는 말에 나는 회사 사람들이 자주 가지 않는 장소로 그를 불러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냐.”

“나도, 우리 팀 과장님이 알려줘서 알았지.”

“그분이랑 잘 지냈나 봐?”

“응. 회사 들어와서 사수기도 했고, 엄청 착하셔. 지금은 육아휴직 중.”

“여자야?”

“아니. 남자. 육아휴직 여자만 쓰나? 미국에서 건너온 놈이 막혔네, 막혔어.”

내가 고개를 젓자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던 그놈이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나도 잔치국수를 주문하고 컵에 물을 따르는데 낡은 철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문 대리님! 여기 계셨어요?”

“백인하 씨?”

나는 물을 따르다 말고 백인하 씨의 등장에 컵을 내려놓았다.


“어머! 엄청 우연이네요!”

백인하 씨가 누구와 같이 온 건가 싶어 그녀의 뒤를 봤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여긴 어떻게…….”

“아는 분이 여기 맛집이 있다고 가르쳐 주셔서 대리님이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대리님이 오늘 약속 있다고 나가셔서 저 혼자 왔어요.”

여기가 그렇게 맛집이었던가?

과장님이 내가 팀장님에게 된통 깨진 날, 회사 사람들 없는 곳에 가자며 데리고 온 곳이었다. 큰길에서 떨어져 골목에 위치해 찾기 어려워 이곳에 올 때마다 회사 사람들 찾기 어려웠는데…….


“지서준 연구원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문다율 대리님 후배 백인하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서준이 떨떠름히 인사를 받았다.

지서준의 태도에 백인하 씨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그건 아니었나 보다.


“저, 같이 앉아서 식사해도 될까요?”

그녀가 초롱초롱히 눈을 빛내며 물었고, 나는 내 옆자리를 비웠다.


“네. 이쪽으로 앉아요.”

지서준이 테이블 밑에서 발끝으로 내 발을 ‘톡’ 하고 쳤지만, 여기서 ‘미안하지만, 안 되겠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두 분이 식사하는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그녀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지서준에게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백인하 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지서준이 말했다. 그렇게 말할 거면 내 발을 왜 차는지. 이번에는 내가 발끝으로 지서준의 정강이를 가볍게 찼다.

그렇게 식탁 아래에서는 날이 선 공격들이 오갔다.


“연구원님이랑 대리님 뭐 시키셨어요?”

“저희는 잔치국수 시켰어요.”

나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저도 그거 먹을래요.”

그녀가 손을 들어 이모님께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지서준의 국수가 먼저 나왔다.


“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드세요.”

지서준과 내 앞에 수저를 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국수는 불면 안 되니까 사양 않고 먹을게요.”

멸치 육수 베이스의 평범한 잔치국수였다. 말없이 국수만 흡입하는 그 모습에 나는 괜히 불편해져 입을 열었다.


“맛 괜찮아?”

“어.”

단답형의 대답. 낯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는 지서준이었다. 그건 중학교, 한태이 사건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중학교 때, 나 이외에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던 지서준이었다. 그 친구가 한태이였다.

문제는 한태이에게는 지서준이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배신감에 지서준은 꽤 힘들어했고, 결국 전학을 선택했다.

그 후로, 사람들에게 마음 주는 것을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던 지서준이었다. 그런 지서준이 오늘과 같이 갑작스럽게 낯선 사람과 자리가 만들어질 때는 남들이 오해할 만큼 차가워지곤 했다.

일할 때는 어떻게 일하냐 물었더니, 자신만의 가이드 선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 외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본인도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에 앞에 놓인 겉절이를 지서준의 국수 그릇에 올려놓았다.


“이거 맛있다. 먹어.”

“응.”

내가 올려준 김치를 입에 넣고 열심히 씹었다.


“두 분 정말 친하신가 봐요.”

어느새 잔치국수가 나왔는지 국수 면발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렇죠. 뭐.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렇구나. 하하. 여자친구분이 조금 질투하시겠어요.”

“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처박고 국수만 먹던 지서준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나와 지서준의 시선에 당황했는지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아, 아니. 보통 애인이 남사친이나, 여사친과 가까우면 질투하지 않나요? 하하.”

맞다. 잠깐 잊고 있었다. 이놈이 여자친구가 있다고 사내에 소문이 쫙 퍼져 있다는 것을.


“아. 큼. 너 여자친구 있는 거 소문 다 났어. 유느님, 아니 유나라 씨가 고백했을 때…….”

그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젓가락을 놓았다.


“뭐야. 왜 말 안 했어?”

갑자기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백인하 씨는 눈치를 보며 막 나온 잔치국수에 고개를 박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뭘? 너 여자친구 있다고 소문난 거?”

아니, 회사에 같이 다닌다고 비밀로 했던 마당에 어떻게 회사 소문까지 말할 수 있을까. 당장 억울한 마음에 바락바락 대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옆에서 ‘후루룩’ 국수를 먹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와 지서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백인하 씨를 보고 화를 삭였다.


“그냥,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어. 빨리 국수 먹어라. 불겠다.”

그 녀석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끼어 있었지만, 지서준도 백인하 씨가 있어 다른 말은 못 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백인하 씨 것까지 내가 계산을 하려는데 지서준이 불쑥 카드를 내밀었다.


“어! 제가 먹은 건 제가 계산할게요.”

옆에서 백인하 씨가 양손을 저으며 말렸지만, 지서준의 카드는 이미 IC 카드 입구에 꽂혀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제가 커피라도 살게요!”

“아니요. 저는 이만.”

단칼에 거절하는 지서준이었다.

민망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내가 나서야 했다.


“잠깐이면 되잖아. 테이크아웃해서 들어가자.”

그러자 미간을 살짝 구긴 지서준이 말했다.


“그럼 네가 사.”

애 같은 놈.


“알았어. 자. 가자. 가요, 인하 씨. 내가 산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하나씩 입에 물고 천천히 회사로 향했다. 회사 앞에 그 녀석이 나타나자 역시나 흘끗거리는 시선이 붙었다.

그중에는 지서준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안내데스크 여자도 있었다.

나는 따끔거리는 시선이 신경 쓰여 죽겠는데, 백인하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생각보다 대담한 토끼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 갑자기 내 가방에 묵직한 것이 툭 들어왔다.


“뭐야.”

내가 두리번거리자 지서준이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가서 먹어.”

“뭔데.”

내가 물었지만, 그저 커피를 입에 물고 다시 앞만 바라보는 지서준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가방 안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비타민C와 홍삼액 스틱이 들어 있었다.

냐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지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게 뭐야?]

[환절기에 자주 앓잖아. 잊지 말고 먹어.]

이거 주려고 만나자고 했네.

나는 씨익 웃고는 홍삼액 스틱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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