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똑바로 말해.
(20/97)
20화. 똑바로 말해.
(20/97)
20화. 똑바로 말해.
2022.09.07.
지서준이 등장하자 그곳에 있던 여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물론, 그에 따라 남자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관심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소수. 손님, 직원 할 것 없이 모두 지서준을 한 번쯤은 흘긋거렸다.
호텔 카페 안의 분위기가 그놈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오늘따라 꾸미기는 엄청나게 꾸미고 나와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모였다.
쉬는 날에는 머리 손질도 하지 않던 놈이 오늘은 깔끔하게 넘겨 예쁜 이마가 더 돋보였다.
“엄청나게 잘생겼네요. 모델이나 연예인일까요?”
“네?”
맞선남의 목소리에 그를 보니, 그도 지서준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봐요. 저런 사람들 보면 꼭 다른 세상 사람 같지 않아요?”
남자가 봐도 넋을 빼는 얼굴인가보다. 맞선남은 계속 지서준을 흘끔거렸다.
“잘생겼다고 다 좋지만은 않겠죠.”
내가 말하자 고개를 갸웃하던 유승건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뭐, 나쁜 점도 있겠죠. 하지만, 살면서 받는 혜택도 많지 않을까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인생이 이지모드(Easy mode)다.”
나는 맞선남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서준이 받았던 혜택이라…….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혜택일지 모르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거부한다면, 그게 과연 혜택일까?
그리고 지서준의 인생이 과연 이지모드(Easy mode) 였을까? 그 질문에 대해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No. 아니었다.
지서준만큼 피곤한 인생을 보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일일이 호감을 거절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절해서 그대로 끝나면 그건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그것 말고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는 슬쩍 눈만 돌려 지서준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지서준은 나와 내 맞선남이 있는 자리 근처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며 무언가를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신경 쓰여 죽겠네.
불안감에 바싹바싹 입이 탔다. 앞에 놓인 뜨거운 커피를 보며, 왜 아이스를 시키지 않았는지, 과거의 나를 질책했다.
“문다율 씨는 잘생긴 남자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저요?”
지서준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맞선남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까 말했던 것도 그렇고…….”
말을 하며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콕 두드렸다.
내가 그랬던가. 나는 괜히 내 미간을 손으로 꾹 눌러보았다.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네. 다녀오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자를 보냈다.
[너 뭐야? 여긴 왜 나타난 거야?]
곧장 답장이 도착했다.
[나는 호텔 카페에 오면 안 돼?]
적반하장의 답장에 나는 입이 벌어졌다.
나보고 맞선 보라고 해놓고선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건 무슨 심보일까.
어떤 심보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로 얼굴을 들이민 것은 아닐 것이다.
그놈을 내쫓을 자신은 없고, 다음을 기약하며 맞선남과 빨리 자리를 파하는 게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손을 씻으며 거울에 보이는 문다율을 보며 말했다.
“정신 줄 꽉 잡아. 문다율.”
순식간에 호랑이굴로 변해버린 카페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돌아오자 맞선남이 말을 열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식사하러 갈까요?”
“아. 저,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일이 생겨서요. 괜찮다면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요?”
“네?”
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꽤 놀란듯했다.
그렇겠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가봐야 한다니……. 정말로 너무 미안해 얼굴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정말 죄송해요. 예의가 아닌지는 알지만 정말 급한 일이라서요.”
“아. 네. 급작스럽긴 하지만……. 알겠습니다. 다음에 같이 식사하는 거로 하죠.”
“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강경한 태도로 내 손에 있던 계산서를 빼앗아갔다.
“다음에 꼭 같이 식사하자는 의미로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더 미안해하라고 사는 거예요. 하하.”
눈을 반으로 접고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말했다.
호텔을 나와 내가 택시 타는 것을 보겠다는 그에게 나는 더 미안해져서 안 된다며 그를 먼저 보냈다. 뭔가 아쉬워 보이는 듯한 유승건 씨는 가볍게 인사한 후 택시에 올라탔다.
맞선남이 탄 택시가 모습을 감추었을 때, 소리 없이 다가온 지서준이 내 옆에 섰다.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녀!”
“꽤 괜찮았나 봐?”
지서준의 말에는 어떤 고저도 없이 평탄했다.
“여긴 왜 온 거야.”
“궁금해서.”
나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머리를 쓸어올리고 지서준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애초에 가지 말라고 하던지!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나한테도 맞선남한테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나의 목소리에 호텔에 들어가려는 사람, 나오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봤다.
직원이 큰 소리에 이쪽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따라와.”
나는 지서준에게 말한 뒤 휘적휘적 걸어 택시를 잡았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평소에는 빠릿빠릿하기만 하던 놈이 잔뜩 인상을 쓴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뭉그적거리며 오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서준도 아무 말이 없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만 들려왔다.
-한창 무더운 여름. 혹시 불쾌함으로 가족에게 짜증을 내거나, 연인과 사소한 말다툼을 하셨다면, 이 노래를 듣고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라디오 DJ가 소개해 준 시원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동네 입구에 들어선 택시.
“아저씨. 그냥 저기에 내려주세요.”
내가 세워 달라고 했던 곳은 지서준이 나를 불량 청소년들에게 구해준 그 놀이터였다.
내 뒤를 따라 내린 지서준이 쨍한 볕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더워 죽겠는데, 왜 여기서 내렸어.”
나는 지서준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놀이터로 들어가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았다. 그러자 내가 앉은 곳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지서준이 앉았다.
휴일이었지만, 무더운 날씨에 놀이터로 놀러 나온 아이들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 너 왜 나왔어?”
“…….”
금세 택시에서 위아래 입술이 붙어버린 건지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지서준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줌마 아저씨한테 이른다.”
그 말에 잠깐 흠칫한 지서준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대로야. 궁금했어. 네가 맞선 보는 남자.”
“왜?”
“나도 몰라. 정신 차리고 보니까 호텔 앞에 가 있더라.”
“내가 맞선 보는 게 신경 쓰였어?”
다시 입을 다무는 지서준.
“내가 아줌마 아저씨한테 지금 당장 전화를 해야…….”
오늘 맞선 본다고 가장 아끼던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 가방 안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지서준이 내 손목을 턱 잡았다.
“말해. 말한다고.”
내가 잡힌 손목을 노려보자 잡은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
무언가 말하려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지 예쁘게 세팅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러더니 기다란 다리로 벤치 앞에 있던 누군가 버리고 간 우유팩을 발로 뻥 찼다. 그러고는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한 건 너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는 애가, 바로 선보겠다고 말을 해?”
“뭐?”
“오늘로 한 달하고 며칠 안 남았어. 그새를 못 참고 선을…….”
나는 입을 벌리고 붕어처럼 벙끗거렸다.
분명 머리에서는 지서준의 저 길쭉한 정강이라도 걷어차라고 소리쳤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차림새는 뭐야? 아주 제대로 힘줬네? 문다율?”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지서준이 고개를 팩하고 돌려버렸다.
잠깐의 정적.
나무 어딘가 붙어 매미가 짝을 찾아 매섭게 울어대고 있었다.
“내가…… 언제 바로 선본다고 했어? 생각해본다고 했지.”
몇 번의 심호흡으로 겨우 이성의 끝자락을 붙잡은 나는 지서준에게 말했다.
“생각을 해봐?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열심히 저 혼자 화를 내던 지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에 밥은 왜 먹어? 커피도 그냥 네가 계산했어야지!”
나와 맞선남이 주고받았던 대화, 그리고 카운터에서의 상황까지 모두 알고 있는 지서준이었다.
이제 못 참아!
나도 벌떡 일어나 지서준 앞에 섰다.
“네가 선보지 말라고 했으면 안 했어! 네가 맘대로 하라며!”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이번에는 지서준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어딜 도망가.
나는 그런 그놈의 목깃을 한 손으로 꾹 잡았다.
“그래서 내키지도 않는 선 보러 나갔건만. 뭐? 밥이 어쩌고 커피값이 어째?”
지서준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을 벙긋댔지만, 나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만 내려다보았다.
“너나 행동 똑바로 해. 내가 맞선 보는 게 싫으면 싫다. 다른 남자 만나는 것 싫으면 싫다고, 제대로 말하라고. 네 말대로 눈치는 노루 똥만큼도 없어서 제대로 말 안 하면 나는 못 알아들으니까. 알겠어?”
나는 잡고 있던 목깃을 놓으며 내 손을 탈탈 털었다.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을 보고 나서야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다.
“나 배고파. 너 때문에 밥도 못 먹었어.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보는 찌질한 지서준의 모습에 흡족해진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놀이터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뒤따라 오는 지서준을 바라봤다.
지금 질투하는 거 맞지?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지서준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
“냉면 먹자고 여기까지 와야 해?”
대중교통으로 40분이나 걸려 도착한 냉면집. 찜통 같은 날씨에 사람도 붐벼 10분째 대기하고 있었다.
허기짐에 점점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 우리가 뽑은 번호표의 번호가 떴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 만두도 시키자.”
그 말에 지서준이 손을 들어 만두를 추가 주문했다.
순식간에 냉면 두 그릇이 나오고 한 입 맛본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서준을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너 여기 어떻게 알았어?”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맛집을 꿰뚫고 있는 건가 싶었다.
“군대에 있을 때, 선임이 가르쳐줬던 곳이야. 나도 아직도 이 가게가 있을 줄은 몰랐어.”
뭐. 맛있으면 됐지.
만두까지 다 비우고 나오는 길. 오늘따라 유난히 타이트한 옷 때문에 불뚝 나온 배를 가리고자 내 예쁜 아기로 앞을 가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갈 때는 택시를 타자는 지서준.
“너는 택시비를 조금 아낄 필요가 있어. 차라리 그 돈을 모아서 나 백이나 사줘. 예쁜 아기가 친구가 필요하대.”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며 지서준이 택시를 잡았다. 다시 세상 쿨한 지서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냉면을 먹었나 잠시 후회가 들었다.
집 앞.
타고 왔던 택시를 타고 내리지 말고 가라고 말했지만, 나를 따라 내리고 택시를 보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내 말에 나를 지그시 보던 지서준.
요즘 나를 너무 지그시 보는 것 같았다. 저런 눈깔은 영 낯설었다.
“같이 밥 먹을 거야?”
“앞뒤 잘라먹지 말고 제대로 말해.”
“맞선남. 맞선남이랑 나중에 같이 밥 먹을 거냐고.”
그게 궁금해서 따라 내린 건가…….
나는 영 낯선 그놈의 눈깔을 마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
잠깐 망설인 지서준이 내가 잡아당겼던 예쁜 주둥이를 막 열었다.
그때,
“어머! 서준아! 여기는 무슨 일이야?”
우리 엄마가 한 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막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지서준이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래. 집에 오는 길이야? 어? 문다율? 일찍 왔네?”
그제야 친딸이 눈에 들어온 우리 엄마였다.
“응. 일찍 왔어.”
“왜. 맞선 상대가 영 마음에 안 들었어?”
엄마의 말에 나는 지서준을 흘긋 보았다.
“회사에 일이 있어서, 만난 지 30분도 안 돼서 일찍 헤어졌어.”
“뭐?”
우리 집 김 여사의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게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졌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그 사람은 뭐래?”
“이해해 주던데?”
“회사 일이니 어쩔 수 없다만…… 그럼 다시 만나볼 거야?”
나는 다시 한번 지서준을 쳐다보았다. 지서준도 나를 보았다.
“아니. 안 만날래.”
내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