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예의 없는 행동들.
(21/97)
21화. 예의 없는 행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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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예의 없는 행동들.
2022.09.11.
지서준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한동안 엄마에게 잡혀 시달려야 했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다며. 왜 안 만난다는 거야?”
“그냥…….”
“그냥?”
엄마가 내 도톰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파! 아무리 허벅지에 지방이 많다고는 해도, 통각은 제대로 살아 있거든?”
나는 허벅지를 마구 문지르며 말했다.
“너는 사람이 만난 지 30분 만에 판단이 돼?”
“아니…….”
꼬집히면서 높아졌던 목소리가 자존심도 없이 다시 작아졌다. 어떤 변명으로도 통할 것 같지 않아 나는 결국 조금 풀어놓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
“요즘 좀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어.”
“뭐?”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있다고!”
내 말에 잠깐 버퍼링이 걸린 엄마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았다.
“누구, 누구야?”
엄마가 주춤한 사이 슬쩍 자리를 피하려던 나의 팔뚝을 낚아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파! 살살 좀 잡아. 그리고 내가 말하면 엄마가 알아?”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야?”
나는 양심에 찔리지만 더는 밝힐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나는 내 등짝을 노리는 엄마의 손을 피해 방으로 피했다.
“슈퍼 아줌마한테는 뭐라고 말해!”
방문 밖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네에 살면서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인데, 마음에도 없으면서 선을 보면 어떡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그날 저녁 맞선남 유승건 씨에게 정중한 사과의 말을 남기며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 좋은 인연 찾으시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에게 온 메시지 또한 아주 정중했다.
[아쉽네요. 저는 문다율 씨 더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문다율 씨 마음이 그렇다면 저희는 여기까지겠죠. 앞으로 하시는 일 모두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메시지를 보며 만약 내가 지서준과 하룻밤의 실수가 없었고, 유예기간을 갖지 않았다면 좋은 사이로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핸드폰을 뒤집어 화장대 위에 두었다. 그러곤 아늑해 보이는 침대로 가 몸을 던졌다.
“은근히 질투가 많네.”
그 성격에 어떤 생각으로 머리까지 세팅하고 호텔까지 왔을까. 그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귀면 은근히 구속하고 그런 스타일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 어머. 너 지금 무슨 생각한 거야?”
나는 머리를 콩콩 쥐어박고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코끝까지 올렸다.
**
“좋은 아침입니다.”
힘든 월요일의 시작. 반 차라도 내고 싶은 충동을 뒤로하고 겨우 사무실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탕비실로 가 커피를 내려 자리에 돌아오니 백인하 씨가 총총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인하 씨 좋은 아침이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문 대리님.”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인하 씨에게 물었다.
“주말에 좋은 일 있었어요? 기분 좋아 보여요.”
“주말에요? 아니요. 별일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저 생기발랄함은 나이에서 나오는 것인가.
나도 많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4살이나 어린 그녀를 보면 나이 차이가 느껴지곤 했었다.
그녀의 기분 좋은 콧노래를 배경 음악 삼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백인하 씨의 콧노래도 근무가 시작되자 뚝 끊겨버렸다. 오늘따라 유독 밀려 있는 업무에 허덕이다 보니 뱃속에서 밥을 달라 난리였다.
힘겨운 오전 근무가 끝나고 우리는 터덜터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는데 누군가 내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지서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지서준의 옆에 있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반갑게 인사했다. 식판을 들고 눈치를 보던 이경훈 연구원이 지서준의 앞, 인하 씨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가 여기 앉아도 되겠죠?”
이경훈 연구원님이 인하 씨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물론이죠. 지서준 연구원님도 안녕하세요.”
백인하 씨가 지서준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인사했다. 물론 지서준은 시큰둥했지만.
지서준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고개를 까딱 움직여 인사를 했다.
가끔 보면 지서준의 한결같음에 쌍따봉을 날려주고 싶었다.
지서준이 내 옆자리에 앉자 근처에 앉아 있던 회사원들이 최소 한 번씩은 흘끔거렸다. 시선이 따끔했지만,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 문 대리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요.”
이경훈 연구원님이 국을 들이마시다 말고 내게 말했다.
“어떤 거요?”
“그 소문 이상하게 난 거 있잖아요. 대리님이 우리 수석 연구원님이랑 친하다고 소문내고 다녔다는 거.”
이경훈 연구원님의 말에 지서준이 밥을 먹다 말고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지서준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거 비 연구원 팀 누군가 일부러 퍼트린 것 같던데요?”
그 소리에 놀란 나와 지서준은 동시에 이경훈 연구원님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쑥스러운 듯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저번에 문 대리님이 너무 분해하시길래 그런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건지 궁금하더라고요.”
심각하지 않게 넘겨 듣는 것 같았는데, 신경 써줬다니. 고마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나는 귀를 쫑긋 기울이며 이경훈 연구원님을 바라봤다.
“그냥 아는 사람들 몇몇에 물어봤더니, 그 A.I 쪽에, 그 촉새 있잖아요. 지 수석님.”
지서준도 아는 사람인지 이경훈 연구원님에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 사람 이름이 뭔데요?”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A.I 제2 연구팀 박찬영 연구원님이라고 있어요. 연구팀에서는 촉새로 유명해요.”
생소한 이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그 사람이 그랬다길래 가서 물었더니, 자기도 연구 지원팀에서 들었다고 그러데요? 그래서, 또 제가 연구 지원팀으로 갔죠?”
소문을 파헤치느라 발품 좀 판 이경훈 연구원님이었다.
“그랬더니 연구 지원팀 누구는 마케팅팀에서 듣고, 마케팅팀의 누구는 회계과에서 듣고……. 아무튼 연구팀은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그래서 알아내셨어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백인하 씨가 물었다.
“아니요. 그 뒤로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어요.”
그는 굉장히 아쉬운 듯 어깨를 축 내렸다.
사실, 누군가 그랬다고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소리에 상처받는 사람도 있고, 피해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알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인간성을 가진 사람과 동료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은 않은 나였다.
사실 그동안 나에게 ‘지서준 연구원 친구라며?’라고 물어온 사람들에게는 가끔 이상하게 난 소문을 정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악의적 소문은 빠르게 도는 반면 그렇지 못한 소문은 고장 난 쳇바퀴처럼 돌지 못하고 툭툭 끊겨버렸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나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런 일로 식음 전폐했다면, 나는 이미 고등학교 때 아사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자 백인하 씨가 물었다.
“대리님,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네?”
“대리님이 소문낸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으신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하나하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전부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았거든요. 만렙 찍었어요. 이런 쪽으로는.”
그 말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백인하 씨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씩 웃어주고 마저 밥 먹는 것에 집중했다.
식사를 끝내고 막 구내식당을 나가려 할 때, 지서준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 나랑 얘기하자.”
지서준이 내 팔을 붙잡자 더욱 따끔해진 주위의 시선들.
“퇴근하고 하면 안 돼?”
내 말에 주위를 둘러보던 지서준이 고개를 끄덕이곤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이경훈 연구원님과 자리를 떴다.
“대리님,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갈게요.”
“네. 그래요.”
백인하 씨도 유유히 사라지고 나는 혼자 사무실에 복귀해 남은 점심시간을 즐겼다.
그때 사무실 앞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히 올리니 여자 사원 4명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낯선 얼굴들. 모두 같은 층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아니었다.
그 직원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문다율 대리님 맞으시죠?”
“네…….”
내가 답하자 제일 앞장서 들어왔던 여직원이 본인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안팀 이정아 대리예요.”
보안팀에서 내게 볼일이 있나? 내가 맡은 트래블 플랜에는 보안팀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뒤적이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 내게 경고를 보냈다.
설마…….
“네. 무슨 일로…….”
“저, 아까 구내식당에서 봤는데요, 정말 지서준 수석 연구원님이랑 친구세요?”
역시. 이거였구나. 이제 놀랍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네. 맞는데요.”
그러자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지서준 연구원님이랑 자리 한 번만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고 머리야.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내 대답에 의외라는 듯 눈이 크게 뜨는 보안팀 여직원이었다.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왜요?”
왜요?
오랜만에 문다율 성격 나오게 만드는 두 글자였다.
내가 지서준의 후광에 가려져 이 드센 성격이 죽어 있던 거지, 결코 온순한 성격은 아니었다.
엄마가 용하다는 점집에 갔더니 내 사주를 보며 그 점쟁이가 혀를 끌끌 차며,
“기가 너무 세. 뭔 여자애가 이렇게 기가 세? 웬만한 애들은 다 때려잡겄어. 쯧쯧.”
라는 소리를 했다. 걱정된 엄마가 그 성격 죽일 방법이 없냐 물었더니 요리조리 쌀알을 살펴보던 점쟁이가,
“살아 있는 부적이 옆에 딱 붙어 있네. 걱정하지 마. 그 부적만 옆에 끼고 다니면 남의 집 귀한 애들 때려잡을 일은 없겠어.”
라고 했단다.
우리 엄마가 그 살아 있는 부적, 지서준을 더욱 아끼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왜라니요? 곤란하니까 곤란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무슨 문제 있나요?”
“네?”
내가 강하게 나가자 조금 주춤하는 보안팀 직원.
“지서준 여자친구 있어요. 회사에 소문 쫙 퍼진 거로 알고 있는데. 모르셨나요?”
“그…… 그건, 제가 언제 지서준 씨랑 연애한다고 했나요? 그냥 자리 한번 만들어 달라고 한 거잖아요.”
궁지에 몰린 쥐는 문다고 했던가.
마지막 발악인지 터무니없는 공격을 한 보안팀 이정아 대리가 턱을 추켜세웠다.
“네. 그렇군요.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거였군요. 대리님이 충분히 제가 오해할 만하게 말했어요. 제가 잘못 이해했다면 사과드리죠.”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내 사과에 이정아 대리의 한 쪽 입술 끝이 얄밉게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대리님이 하신 부탁, 조금 부담스럽네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온 같은 층 사무실 직원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모든 사람이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친한 친구라고 유세야 뭐야. 우리 이만 가요.”
그녀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바로 옆 팀의 팀장님이 내게 물었다.
“문 대리. 괜찮아요? 어휴. 여자들 살벌하네.”
“네. 괜찮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이도 ‘하’를 클리어 한 나는 쿨하게 말한 뒤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