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너희 그러다 뭔 일 난다?
(22/97)
22화. 너희 그러다 뭔 일 난다?
(22/97)
22화. 너희 그러다 뭔 일 난다?
2022.09.14.
도대체 이놈의 회사는 일들은 안 하고 남의 개인사에만 흥미가 있는 건지.
‘지서준에게 관심 있는 여직원들이 내게 찾아와 뭐라고 하고 갔다.’라는 말이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이 있는 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호기심과 동정의 표정들.
이 소란의 당사자인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지나가는 사람 중 날 아는 사람들은 “문대리 괜찮아?”라며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그것이 한마디가 쌓이고 쌓여 짜증 게이지의 한계점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에 집중하기도 힘들었고, 표정 관리도 힘들어질 때쯤, 팀장님이 날 불렀다.
“문대리,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요.”
“아직 일이 조금 더 남았는데요.”
“무슨 건이죠?”
“다음 달, 보안팀에서 뉴욕으로 콘퍼런스 가는 건입니다.”
“그건, 아직 조금 시간 있으니까. 급하면 내가 지원해도 되고…….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어서 가보라며 손짓한 팀장님은 금세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정말로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회사를 나서니 집으로 가려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길거리는 북적거렸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정시퇴근은 정답이었다.
나는 퇴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 핸드폰을 들었다.
[오피스텔에 가 있을게.]
할 말이 있다던 지서준을 저녁에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오피스텔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내 집처럼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들어가 시간을 축내며 기다리기를 30분. 이 집의 주인이 돌아왔다.
“왔냐.”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날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지서준이 말했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나는 쉽게 알겠는데?”
나는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내 집이면 이렇게 깔끔하지 않지.”
그 말에 작게 웃은 지서준이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 손을 씻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너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기다렸다는 말에 조금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가 내리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 해주려고?”
“간단하게 볶음밥이나 해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뭐 도와줄 일은 없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나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왜?
사실이니까.
식탁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지서준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칼질할 때마다 등 근육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며 제 존재를 부각했다.
저래서 요섹남들이 인기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당근을 잘게 다지던 지서준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봤다.
“앞으로 나와 관련된 너에 대해 도는 나쁜 소문은 나한테 다 얘기해.”
아무래도 낮에 구내식당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지서준한테 말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왜 지서준의 말에 안도감이 드는 것인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근육들이 천천히 이완되며 나른해졌다. 주방이 잘 보이는 식탁에 앉아 팔을 괴고 열심히 야채를 손질하는 지서준의 너른 등을 바라봤다.
좋네.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지서준의 오피스텔 초인종이 울렸다.
아주 경박하게.
“누가 오기로 했어?”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나와 지서준이 현관문을 바라봤다.
“아니. 없는데.”
“빨리 나가봐. 시끄러워 죽겠네.”
지서준이 손질하던 당근을 내려놓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야! 빨리 문 열어! 무거워 죽겠네.”
“남준모?”
지서준이 재빨리 현관문을 여니 고양이 케이지를 들고 있는 남준모가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왜 빨리 안 열어. 아이고. 이 돼냥이 무거워 죽겠네.”
투덜거리며 신발을 벗던 남준모가 지서준의 뒤에 서 있던 날 발견했다.
“어? 문다율?”
“안녕. 오랜만이네.”
남준모는 지서준과 친한 사이로 나와는 몇 번 어울려 논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서준이 미국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만나지 못했다.
“혹시……. 그 케이지 안에는 똘이 장군님?”
반갑다며 호들갑 떠는 남준모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케이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모는 너는 여전하다며 케이지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똘이야 나올래?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쳐다도 안 보고 너만 보는데, 나와서 인사라도 해줘.”
남준모가 케이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똘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애옹.”
그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애교 있게 우는 똘이 장군님을 보고 남준모를 만나고 처음으로 부러웠다.
“똘이는 왜 데리고 왔어?”
가만히 보고 있던 지서준이 물었다.
“응? 아. 갑자기 어제 토해서 병원에 데려갔다가 퇴근하고 데리고 오는 길이야.”
“뭐? 똘이 장군님이 토를?”
나는 지서준과 남준모를 헤치고 잽싸게 케이지 앞으로 다가와 몸을 낮췄다.
똘이 장군님은 나를 보자 병원에서 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눈에 경계심을 가득 담았다.
“왜 토한 거래?”
내가 걱정스레 묻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준모가 물었다.
“근데 네가 우리 똘이 장군을 어떻게 알아?”
“지서준이 보여줬어,”
“너 여기 자주 와?”
나는 남준모의 말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 시선은 여전히 똘이 장군에게만 향해 있었다.
“너희도 여전하구나?”
나와 지서준을 번갈아 바라보던 남준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서준은 그런 남준모를 두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뭐야. 요리하고 있었어? 내 것도 있냐?”
“없어.”
“뭐야. 문다율은 주고 나는 왜 안 줘!”
쟤도 참 한결같다. 고등학교 때도 쓸데없이 나한테 질투하더니, 지금도 저러고 있네. 나는 여전히 똘이 장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남준모가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문다율. 케이지 앞에서 떨어져. 너 때문에 무서워서 못 나오잖아.”
지서준이 마저 당근을 썰며 말했다.
“응.”
나는 엉덩이를 들썩여 케이지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는 똘이 장군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한 번 봤던 사이니까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경계하는 똘이 장군님이었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니까, 나를 낯설어하는 게 아니라 지서준의 오피스텔을 낯설어하는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른바 정신승리였다.
똘이 장군에게 익숙해질 시간을 주고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앉던 자리에는 어느새 남준모가 차지하고 있었다.
“비켜.”
“뭐?”
“내가 앉던 자리야. 비켜.”
비키라며 손짓하자 남준모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나는 말이다. 문다율.”
팔짱을 끼더니 나와 지서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면 참……. 미스터리해.”
“그래서?”
내가 묻자 한쪽 눈썹을 웃기게 올린 남준모.
“아니, 뭐 그렇다고. 우리가 아직도 18살 고딩이냐? 너 그렇게 지서준 집 들락거리다가 뭔 일 난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벌써 했다 이놈아.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서준은 어느새 볶음밥이 다 되었는지 3그릇으로 나눠 식탁에 올렸다.
“잘 먹겠습니다.”
자신의 것도 만들어줬다며 남준모가 신이 나 노래를 부르며 식탁에 앉으려다 지서준에게 목덜미가 잡혔다.
“손 씻고 와.”
**
밥을 다 먹고 설거지는 남준모가 하기로 했다. 왜 나에게는 시키지 않냐며 투덜거렸지만, 지서준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쟤 벌써 우리 집에서 그릇 하나 깨트렸어.”
남준모는 그 말에 조용히 물을 틀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똘이 장군님이 케이지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낯익은 집이라서 그런지, 똘이 장군은 저번보다 빠르게 케이지 안에서 나왔다.
“내가 사둔 간식 어딨어?”
“그때 다 보냈어. 그걸 집에 왜 둬.”
간식이 있어야만 나를 봐주시는 똘이 장군님인데……. 아쉽지만, 오늘은 먼발치에서만 뵈어야 할 것 같았다.
설거지를 마친 남준모가 오피스텔 이곳저곳 둘러보더니 갑자기 지서준을 크게 불렀다.
“야! 너 차 샀어?”
“어? 어.”
지서준은 시큰둥하게 답하며 잠깐 사이에 떨어진 똘이의 털을 치웠다.
“너 차 왔구나? 자랑하려고 부른 거고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준모에게 다가가며 지서준을 흘겼다.
“외제 차 뽑았네.”
남준모가 차 키에 새겨진 로고를 흔들며 말했다.
“그거 외제 차야?”
차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묻자 남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전기차.”
“와. 나 전기차 한 번도 안타 봤는데.”
“나도. 지서준 우리 태워 주라.”
나와 남준모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지서준을 보았다.
지서준이 그런 나와 준모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가방을 나에게 쥐여줬다.
“집에 가라.”
“뭐?”
그러더니 내 어깨를 잡아 현관문 쪽으로 쑥 밀었다.
“야. 할 말 있다며.”
“됐어.”
“뭐야. 진짜 차 산 거 자랑하려고 불렀던 거야?”
내 말에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 가라.”
나가기 전 남준모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탕’ 하고 문이 닫혔다.
“너만 차 있냐? 나도 우리 예쁜 아기들 팔면 차 살 수 있거든? 흥!”
나는 닫힌 현관문을 보며 씩씩댔다.
**
익숙하게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너 요즘 자주 늦는다?”
집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리모컨으로 TV를 끄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바빠.”
“그 썸남이랑은 잘되나가 봐?”
“썸남 아니고, 그냥 신경 쓰이는 사람!”
내가 말을 정정하자 엄마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뭔 신경을 그렇게 써? 네 자식새끼도 아니고.”
나는 엄마의 말을 예의 있게 씹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괘씸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거칠게 블라우스의 단추를 끌렀다.
“할 말 있다더니, 자기 차 산 거 자랑하려고 불렀던 거였어?”
내가 차량용 방향제 사주나 봐라.
긴 머리를 질끈 묶어 씻을 때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짱짱하게 올라간 머리를 화장대 거울로 요리조리 살피던 나는 장롱 속에 고이 잠들어 있을 내 아기들을 음흉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 서울이 대중교통이 얼마나 잘 되어 있어. 응? 그러니까 밥 먹듯이 야근시키지. 그래! 차 필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욕실로 향했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아 크림을 찹찹 바르는데 눈가에 발견한 주름 하나.
“뭐야! 언제 생긴 거야!”
요리조리 둘러보고 만져봐도 주름이 틀림없었다.
“나, 내년이면 진짜 서른이네.”
지서준은 주름도 없이 얼굴도 팽팽했는데……. 억울한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아이크림 하나를 주문했다.
세월 참 빨리 흘러간다. 그게 아쉽다가도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사실에 평일이 빨리 갔으면 하는 참 이기적인 마음.
오늘은 목요일, 그러니까 내일 하루만 가면 주말이다.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침대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