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스르륵.
(24/97)
24화. 스르륵.
(24/97)
24화. 스르륵.
2022.09.21.
신차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비싼 돈값을 하는 건지 차는 아주 부드럽게 잘나갔다. 전기차라서 그런지 소리도 조용했다. 그러니까, 차 소리는 정말 조용했다.
뒤에서 쉴 틈도 없이 떠들어대는 아줌마들. 오랜만에 하는 드라이브라며 아줌마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아줌마들의 수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그저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즐거운 아줌마들의 수다에 처음부터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가 들었다.
나는 운전하는 지서준을 흘끔 바라봤다. 지서준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아줌마들이 깔깔거리고 웃을 때마다 지서준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지루했던 고속도로가 끝나고, 창밖에는 어느새 바다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바다다!”
창문을 열자 짠 냄새가 차로 훅 들어왔다.
“다율이는 바닷가 오랜만에 오는구나?”
“네!”
여름이라서 그런지 주말의 바닷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역시나 돋보이는 지서준. 작은 머리통이 사람들 머리 위로 쭉 올라와 있는 것도 그렇지만, 역시 멀리서 봐도 뚜렷하게 보일 이놈의 이목구비 때문이겠지.
이놈이 있는 곳만 스위스 청정지역인지, 미세먼지 하나 없는 어느 날의 뚜렷한 배경 같았다.
지서준은 차에서 내리더니 강한 햇볕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차에서 선글라스를 가지고 나왔다.
분명히 가렸건만, 왜 외모는 더 돋보이는 건지.
차가 밀린 탓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우리는 횟집을 먼저 가기로 했다. 바다 구경은, 회 먹으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들어간 횟집의 창가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나마 좋은 자리도 이미 예약석이라는 표시가 떡하니 서 있었다.
“다른 집으로 갈까?”
내가 자꾸 창가 자리를 기웃거리자 지서준이 물었다.
“그냥 먹어. 뭘 또 자리를 옮겨.”
나 대신 우리 엄마가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냥 먹자.”
나는 김 여사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금방 상이 세팅됐다. 그러고는 먹음직한 모둠회가 자태를 뽐내며 상 한가운데 떡하니 올라갔다.
방금 뜬 싱싱한 회를 먹으며 생각했다.
내가 과연 이 맛있는 활어회를 두고 바닷가를 봤을까?
상추에 회를 두 점을 올려 청양고추에 쌈장을 푹 찍어 올렸다. 양심상 마늘은 넣지 않았다. 곱게 상추로 회를 싸 한입에 넣었다.
그래. 이거지. 너무 맛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맛있는 것만 먹으면 나타나는 진실의 미간이었다. 아직 입에 넣은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다시 상추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지서준이 나를 보고 있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젓가락을 입에 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입에 음식 물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
물론 좋은 버릇은 아니다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혼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지서준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빨리 회를 씹어 삼키고 다시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부담스럽게.”
“천천히 좀 먹어. 며칠 굶었어?”
괜히 물어봤다.
나는 지서준의 말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국자를 들어 올렸다. 오래 끓으면 끓을수록 맛있어지는 매운탕은 미리 주문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매운탕. 나는 엄마와 아줌마에게 골고루 퍼주었다. 막 내가 먹을 매운탕을 푸려고 하는데 자기의 빈 그릇을 내게 내미는 지서준.
“네가 떠먹어.”
뭐가 예뻐서 떠준단 말인가. 내가 국자를 넘기자 엄마가 국자를 나에게서 획 낚아채 갔다.
“아무튼, 너는 가만 보면 서준이한테만 못되게 굴더라?”
엄마는 나를 째려본 뒤 두툼한 살이 붙어 있는 고기를 들어 올려 지서준의 그릇에 옮겨 닮았다.
“서준아. 많이 먹어.”
“감사합니다.”
지서준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엄마가 건네는 매운탕을 받았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일까. 나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려 웃어주고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적당히 끓여 맛있어진 칼칼한 매운탕을 입에 넣었다.
“으……. 소주 먹고 싶다.”
“안 돼.”
옆에서 지서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왜?”
“국물에 소주는 안 돼.”
나랑 몇 번이나 소주를 먹어봤다고, 벌써 나를 파악한 놈. 나는 소주와 잘 맞는 국물이 있으면 평소보다 더 많이 마시곤 했다.
아쉬웠지만, 저렇게 단호한 지서준이라면 말을 들어야 했다.
밥까지 다 먹고 나서야 나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횟집을 나오며 계산하는 지서준에게 따봉을 날려준 후 빵빵하게 볼록 튀어나온 배를 슥슥 문질렀다. 바지 버클을 끄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끙끙거리자 한숨을 푹 내쉰 놈이 엄마들에게 말했다.
“얘 데리고 좀 돌아다닐게요. 요 근처에 계세요,”
“그래. 다녀와. 우리는 카페 들어가서 수다 좀 떨지 뭐.”
윤희 아줌마의 말을 끝으로 가기 싫다는 나의 팔을 끌어 걷기 시작했다.
바닷가를 따라 산책로가 있었는데 풍경이 기가 막혔다. 풍경은 기가 막히는데, 날씨 또한 기가 막혔다.
“나 더워. 나도 그냥 엄마들이랑 카페 갈래.”
“그렇게 먹고 바로 앉으면 돼지 된다.”
“돼지 할래.”
내가 칭얼거려도 묵묵히 걷는 지서준이었다.
자기만 선글라스 끼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생기는 잡티에 신경이 쓰였는데, 이런 뙤약볕을 걷게 하다니.
물론 바닷바람에 서울보다는 훨씬 시원했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었다.
둘레길의 막 초입.
나는 눈치를 보다가 뒤로 획 돌아서 도망갔다.
“야!”
뒤에서 지서준이 도망가는 나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잡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다리는 요만큼이었지만 지서준의 다리는 저만큼이었으니까.
“네가 애야? 왜 도망을 가.”
“아. 더워. 덥다고. 걷기 싫어.”
지서준이 내 팔목을 끌고 앞으로 쭉쭉 나갔다.
질질 끌려가며 그만 돌아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내 손목을 잡은 힘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걷기를 10분.
지서준의 손힘이 천천히 풀어졌다.
기회인가.
나는 다시 탈주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잠시 뒤,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내 팔목을 잡고 있던 지서준의 손이 스르륵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이놈 보게?
처음 손잡은 것도 아니고 더한 것도 한 사이지만, 뭔가 굉장히 낯부끄러웠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뭐야.”
“뭐가.”
사람들이 많아 나란히 걸을 수 없어 앞뒤로 걷고 있었다. 그래서 지서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묻는 지서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꼼지락거리지 마.”
이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더위에 맞잡은 손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면서 불편해서 꼼지락거렸더니, 뭐?
“그럼 손잡고 가지 말고 그냥 가면 되잖아.”
“네가 또 도망갈 거잖아.”
“내가 바보냐. 금방 잡힐 거, 뭐하러 또 도망을 가.”
“문문, 많이 똑똑해졌네.”
지서준의 등이 살짝 흔들렸다. 비웃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손 놓고 가.”
내 말에 대꾸 없이 붙잡은 손에 힘을 꼭 쥐는 지서준이었다.
**
엄마들이 있는 카페로 돌아온 것은 걷기 시작하고 30분 후.
생각보다 먼 둘레길에 내가 못 가겠다 주저앉았다.
가뜩이나 지서준 때문에 몰려 있던 시선들이 나의 돌발행동에 더 몰렸고, 결국 지서준이 포기했다.
카페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나는 지서준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야. 이 땀 봐.”
내가 손바닥을 지서준의 얼굴에 들이밀자 내 손을 가져가 쿨하게 지 옷에 쓱 닦아버렸다. 하고 싶었던 말도 땀과 함께 쓱 닦여버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카페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바라보다 지서준을 뒤따라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로 들어가니 여전히 할 말이 많은지 열심히 수다를 떠는 엄마들이 보였다. 그리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의 음료수를 뺏어 홀짝거리며 지서준을 보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땀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는데, 저놈은 뽀송뽀송하기 그지없었다.
“서준이는 멀쩡한데 너는 왜 그 모양 그 꼴이 됐어?”
엄마의 말에 얼음을 와자작 씹으면서 말했다.
“저렇게 땀 안 흘리는 게 정상이야? 이 날씨에? 내가 정상이지.”
심지어 더위도 잘 타지 않는 지서준이었다.
“그 대신 서준이는 추위에 약하잖아. 얘랑 지내면 4월 끝자락까지 난방해야 한다니까?”
윤희 아줌마가 툴툴거리며 지서준을 흘겼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5월이나 되어야 난방을 끌 수 있다며 하소연했던 적이 많았다.
아줌마의 잔소리 2절이 시작하려는 찰나 우리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며 진동벨이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지서준이 말없이 진동벨을 들고 일어났다.
지서준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윤희 아줌마가 갑자기 내게 몸을 바짝 붙였다.
“다율아. 우리 서준이 여자 있니?”
“네?”
나는 아줌마의 말에 바보 같은 표정을 물었다.
“엄마가 그 표정 짓지 말라고 했지!”
엄마가 내 허벅지를 콱 꼬집었다.
아마 내 허벅지가 그나마 이 두께를 유지하는 건 엄마가 꼬집어서 지방들이 도망가서 일지도 모른다고 허벅지를 문지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혹시, 서준이한테 뭔 낌새가 있었어?”
내 허벅지를 공격하고 바로 윤희 아줌마에게 물었다.
“아니……. 얘가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나보고 요즘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명품이 뭐냐고 묻잖아?”
“어머! 맞네! 여자 생겼네!”
아. 하하.
나는 그저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나도 뭐, 명품 이름을 아나? 그래서 내가 ‘다율이한테 물어봐.’ 그랬더니 글쎄?”
“글쎄?”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 돼!’ 그러는 거야. 서준이가.”
“100프로네. 자기야. 잘하면 내년에 서준이 장가가는 거 아니야?”
“그런가? 나 이제 며느리 보는 거야?”
아줌마들이 호들갑 떨며 서준이 장가보내기 일보 직전. 그놈이 커피를 들고 걸어왔다.
그놈이 다가오자 아줌마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뭐예요? 갑자기. 내 욕했어?”
지서준이 물었지만, 아줌마들은 마주 보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리에 앉으며 내게 턱짓으로 ‘무슨 얘기 했냐.’고 물었지만 나는 차마 답할 수 없어 고개만 흔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카페를 나오는 길. 아줌마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서준이 없을 때 말해줘 알겠지?”
귀엽게 눈까지 찡긋거리는 아줌마를 보면서 일단 고개는 끄덕였는데…….
그 명품이 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줌마의 아드님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 없으며, 저와 하룻밤의 실수 후 남녀 사이를 할 건지, 친구 사이를 할 건지 정하는 유예기간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은 절대 못 한다.
나중에 무슨 말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나 고민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놈이 날 위해 명품 가방을 보고 있나?
갑자기 심장이 콩닥거리고 기분이 널뛰기 시작하며 아드레날린이 샘솟기 시작했다.
슬쩍 물어볼까? 아. 아니지.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면 안 되지.
나는 심호흡을 해 내적흥분을 감추며 오늘따라 듬직해 보이는 그놈의 등에 대고 말했다.
“옆에 게임장 갈래? 오랜만에 펌프 하자! 내가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