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놈의 비밀.
(25/97)
25화. 그놈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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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그놈의 비밀.
2022.09.25.
게임을 하러 들어서는 우리를 쫄래쫄래 따라 들어온 엄마들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엄마. 현금 있어?”
내 말에 단박에 세모눈이 되어버린 엄마가 톡 쏘아붙였다.
“방금 서준이한테 네가 쏜다고 하지 않았어?”
“아. 내가 계좌이체 해줄게.”
“그 말에 내가 한두 번 속아?”
물론 내가 깜빡하고 몇 번 안 준 적은 있지만, 저렇게 말하니 내가 상습적인 지능범이 된 것 같았다.
“제가 낼게요. 아줌마. 지갑 넣으세요.”
엄마가 투덜거리며 지갑을 뒤적이자 지서준이 말했다.
“아니야! 됐어. 내가 꼭 문다율한테 돈 받을 거니까. 괜찮아.”
엄마가 나에게 오천원권을 주며 말했다.
나는 지폐를 팔랑이며 동전 교환기에서 500원짜리로 몽땅 바꿔버렸다.
‘짤랑 짤랑.’
소리 한번 경쾌하구나. 나는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동전을 들고 펌프 앞에 섰다.
“무슨 노래로 할래?”
내가 동전을 넣으며 물어보자 지서준이 발목을 풀며 말했다.
“우리가 자주 하던 거.”
저놈이 또 얼마나 진심으로 하려고 발목까지 푸나. 질 수 없지. 나도 펌프에 올라서며 발목을 마구 돌렸다. 손목도 빙글빙글 돌렸다.
‘찰그락 찰그락’ 동전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익숙하게 우리가 늘 하던 노래를 찾았다. 노래가 시작되고 옆에 있는 놈과 나의 발놀림이 현란해졌다. 오랜만인데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게임장에 있던 사람 중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생겼다. 엄마와 아줌마는 뒤에서 ‘어머!’를 연발하며 감탄을 했다.
한 곡이 끝나고.
“지서준. 안 죽었네?”
“당연하지.”
나는 다시 승리욕에 불타올랐다.
“너희 왜 이렇게 잘하니?”
윤희 아줌마가 소녀처럼 웃으며 물었다.
“용돈을 다 게임을 하는데 갖다 바쳤네.”
엄마가 정답을 말했다.
뭐. 용돈으로 게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엄마와 아주머니를 보며 웃었다.
다음 곡이 시작되고, 또 그다음 곡.
“야. 나 못 해. 이제 못 해.”
나는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에 헉헉거리며 말했다.
그에 비해 멀쩡한 지서준.
“뭐야. 빨리 올라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우리 엄마가 나섰다.
“내가 해볼래!”
“다율 엄마. 할 수 있겠어?”
나와 지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펌프 위에 올라섰다.
“요 그림들에 맞춰서 발로 누르면 되는 거 아니야. 맞지?”
음악이 시작되고,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며 화살표들이 마구 올라왔다.
제대로 눌리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 엄마는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우연히 하나라도 맞으면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잘하네!”
내가 뒤에서 말하자 엄마는 더욱 흥겨운 몸짓으로 게임에 임했다. 옆에 있던 지서준도 빠른 발놀림을 멈추고 옆에서 엄마에게 코칭하며 드문드문 화살표를 눌러줬다.
얼마 가지 않아 한 곡의 반도 끝나지 않았는데 게임이 끝났다.
“엄마. 최고다 진짜.”
“보기랑은 다르네. 엄청 어려워.”
엄마가 숨을 헐떡이며 내려왔다.
“자기 너무 멋있어! 웬일이야!”
윤희 아줌마는 제 일처럼 즐거워하며 엄마를 칭찬했다.
“잘하셨어요. 워낙 어려운 버전이라 그래요. 쉬운 거로 하면 더 오래갈 수 있었는데, 한 판 하실래요?”
“아니야. 뒤에 젊은이들이 기다린다. 우린 다른 거 하자.”
그 뒤로 농구 게임을 비롯해 북 치는 게임, 총 게임까지.
엄마의 용기에 자극을 받았는지 윤희 아줌마도 합세해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엄마들의 작은 일탈에 나와 지서준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게임장을 나서며 아줌마들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우리의 현금은 금세 동이 났다. 아쉬운 마음으로 게임장을 막 나서는 순간. 누군가 지서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 또 왔네. 총각.”
뭐지? 나와 아줌마들은 지서준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아저씨를 보았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서 게임장을 오랫동안 했는데, 이렇게 잘생긴 총각은 처음 봐서 똑똑히 기억해. 7년 전에 여기 왔었지?”
지서준이 여기 왔었다고?
나와 아줌마들의 시선이 단박에 지서준에게 꽂혔다.
“네?”
“여기서 게임하고 갔잖아. 그때 인형 뽑기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저씨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7년 전에 방문했던 모양인데, 어떤 게임을 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니.
“왜. 기계가 동전 먹어서 여자친구가 나 불렀잖아. 기억 안 나? 젊은 사람이 기억력이 그래서 어째. 하하.”
여자……친구?
지서준을 보던 나와 아줌마들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그제야 지서준이 찌푸리던 미간을 풀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맙소사. 진짜였어?
“만나서 반가워요. 너무 잘생겨서 기억에 똑똑히 남았어. 이렇게 보니 엄청 반갑네.”
“네. 그럼, 저는 이만…….”
“그래요! 또 와요!”
지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안 와요?”
우리 세 사람이 멀뚱히 보고만 있자 지서준이 소리쳤다.
“어……. 가야지. 가!”
제일 빨리 정신 차린 윤희 아줌마가 나와 우리 엄마를 챙겨 지서준을 쫓았다. 우리가 오는 것을 확인한 지서준이 긴 다리를 마구 놀려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 뒤를 쫓으며 수군거렸다.
“7년 전? 7년 전이면 언제야?”
“서준이 군대 제대하기 얼마 전일 텐데. 누구지?”
“엄마랑 아줌마는 누군지 몰라요?”
우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다.
“나도 처음 알았어.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어머. 저 얼굴로 여자 한 번 제대로 안 만나본다면서 걱정했는데, 아니었네!”
나는 그때 호주에 있었을 때였다. 지서준이 말한 적도 없으니 당연히 금시초문이었다.
저놈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여자친구와 바닷가에 놀러 와서 게임장에서 인형 뽑기?
허!
상상도 가지 않는 그림이었다.
나와 아줌마들은 속닥거리느라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고 한참을 앞서가던 놈이 뒤로 획 돌아보았다.
“빨리 와요!”
“어! 가! 간다!”
까칠한 저 성격에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모습이 보여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올 때와는 다르게 조용한 차 안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조용히 지서준의 눈치를 살폈다. 아줌마도, 우리 엄마도, 나도 지서준에게 묻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았지만, 그저 꾹 참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게 아파트에 들어서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
“고맙다. 서준아. 오늘 서준이 덕에 재밌었네.”
“그래. 서준아. 고마웠다. 운전 많이 해서 피곤하겠다. 집에 가서 쉬어.”
엄마들이 한마디씩 하며 짐을 챙겨 들었다.
나도 옆에 서 있다 지서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아 막 입을 열었을 때.
“문다율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제가 데려갈게요.”
나? 나는 그대로 입을 열고 손가락을 날 가리켰다.
“그래. 조심히 운전하고.”
아줌마들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각자 아파트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무슨 말? 나한테 할 말 있어?”
“차에 타.”
그러고는 멋들어지는 포즈로 차에 올라타는 지서준이었다.
나도 주춤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지서준은 내가 안전벨트를 매자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는 지서준이었다.
지서준이 차를 세운 곳은, 한강에 있는 공원이었다.
지서준은 전기차를 충전시키는 곳에 차를 세우고 충전을 하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충전될 동안 잠깐 걷자.”
전기차를 충전할 곳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충전만 하러 온 것은 아닐 터였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잘생긴 뒤통수.
그런데, 꼭 할 말을 이 더운 여름날에 야외에서 해야 할까.
저놈이 오늘따라 더운 곳만 데리고 다니네.
나는 투덜거리며 뒤를 쫓았다.
내가 자꾸 덥다, 덥다 하자 근처 편의점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사 내 손에 쥐여주더니 그늘이 있는 다리 밑으로 가 계단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나도 지서준이 옆에 앉았다.
시원한 강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던 지서준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새삼 내가 모르는 지서준도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해졌다.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지서준이 말했다.
“예전에 여자친구 있었어.”
저 입으로 들을 수 없을 거로 생각하고 체념했는데, 지서준이 직접 꺼내다니. 나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에 있는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미국에서 만났던 앤데……. 내가 군대 입대하고 말년에 한국으로 왔었어. 면회하러.”
대단하네.
한국에서도 남친이 군대 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던데, 미국에서 지서준을 보기 위해 한국까지 왔다니.
“미국인이었어?”
“한국계 미국인.”
“아…….”
교포를 만났구나.
궁금한 점이 계속해서 생겨나는데 여기서 지서준의 말을 끊고 질문한다면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아 목구멍으로 간신히 삼켰다.
“좋은 애였어.”
지서준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은 아주 드문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는 음료수만 쳐다보던 나는 지서준의 옆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서로 떨어진 곳에서 일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더라.”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내가 말하자 바닥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나는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너한테 남자친구 생기면 다 말했는데, 너는 왜 말 안 했어?”
“……네가 알면 부모님도, 아줌마 아저씨도 알게 되잖아.”
물론 이 가벼운 주둥이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주에서 당장 전화를 걸어 낱낱이 고했겠지.
그래도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었다.
“오래 만났어?”
“응. 한 2년?”
오래도 만났네. 나의 최장 연애 기간은 1년하고 반. 나보다 6개월이나 길었다.
이놈이 진득이 만났던 거로 봐서는 정말로 괜찮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사진 있냐.”
갑자기 궁금해 물어보자 지서준이 버럭 화를 냈다.
“전 여자친구 사진을 왜 갖고 있어!”
그냥 궁금했을 뿐인데……. 버럭 화내는 지서준 때문에 놀라 내 어깨가 움찔했다.
“아, 알았어. 없으면 됐어.”
“……헤어진 지 오래야. 말 그대로 정말 전 여자친구야.”
“그래, 알았어.”
“너도 전 남자친구 있잖아.”
“그래. 알았다니까.”
자꾸만 켕기는 사람처럼 주절주절 늘어놓는 지서준을 보니 괜스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야. 너는 나보다 더 많았잖아! 나는 고작 2명이고 너는…….”
“한 명 더 있었어?”
지서준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 그 여자는 또 뭐야.”
“회사에서…….”
“회사? 미국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 아무래도 지서준의 스타일은 아메리카 걸(girl)들인가.
“그 사람은 진짜, 잠깐……. 몇 개월 밖에 안 만났어.”
“허…….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나는 몰랐네.”
“아니…….”
상당히 난처해하는 지서준을 보니, 기분이 나쁘기도, 좋기도 한 이상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두 번째 여자친구는 여자친구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어.”
“What?”
나도 모르게 영어가 튀어 나갔다.
지서준을 두고 바람이라니……. 이것은 또 이것대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만히 뒀어?”
“별로, 상관없었어. 휩쓸려서 사귀게 된 사이라.”
지서준이 뭔가에 휩쓸리기도 하는구나. 나는 내가 아는 지서준이 맞는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외관은 분명 내가 알던 지서준이 맞는데, 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까.
하룻밤 이후, 내가 모르던 지서준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고, 내가 몰랐던 과거까지 알게 된 지금, 지서준은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낯섦에 서글퍼지려 했다.
“나도 비밀 만들 거야.”
“뭐?”
“너도 나한테 2번이나 말 안 했으니까. 나도 비밀 만들 거라고.”
나는 지서준이 나에게 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음료수가 채 목으로 넘어가기도 전,
“만들지 마.”
지서준이 한껏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어.”
내 말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지서준이 입을 달싹였다.
“……소원권 줄게. 그러니까 만들지 마.”
흔들렸다.
동공도 마음도.
소원권 하나에 나의 얄팍한 다짐이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