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설탕 한 스푼. (26/97)


26화. 설탕 한 스푼.
2022.09.28.



“그깟 소원권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

 
고등학교 시절, 지서준을 한 번이라도 이겨보겠다며, 하굣길 고주연과 도이라와 함께 야구 배팅장으로 출석부에 도장을 찍었다.

물론 친구들은 보지 않고 밖에서 팔짱을 끼며 연신 도리도리를 했다.

나에게는 소중하지만, 남에게는 보잘것없는 소원권이었다.

여름의 한강은 활기찼다. 더운데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과 자전거 타는 연인들. 돗자리에 앉아 술 한잔 씩 기울이며 강바람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남들이 이해 못 하는 간절한 것들이 하나씩은 있겠지.


“소원권 준다고 했다?”

내가 말하자 지서준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지서준이 내 오른손을 빤히 보더니 마지못해 손바닥을 툭 하고 쳤다.


“계약 성립.”

“계약 성립.”

그렇게 나 문다율은 소원권 하나를 획득했다.

**



“다녀왔습니다.”

내가 신발을 채 벗기도 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윤희 아줌마가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엄마와 아빠는 그렇다고 치고, 윤희 아줌마까지?

나는 신발을 벗다 말고 세 사람을 올려보았다.


“서준이랑 방금 헤어진 거야?”

“응.”

역시, 내 귀가를 기다렸던 것은 아까 게임장 앞에서 들었던 말이 궁금했나 보다.

꼭 범죄자를 호송하듯 내 양옆에는 아줌마들이, 그리고 내 앞에는 아빠가 퇴로를 차단했다.

내가 신발을 다 벗자 냉큼 나의 팔을 붙잡고 거실 소파에 앉혔다.


“왜, 왜 이래…….”

“자. 빨리 좋은 말 할 때 불어.”

내가 발버둥 치자 엄마는 내 팔을 더욱 옥죄었다.


“다율아. 서준이가 뭐라든? 응? 오늘 못 들으면 잠 못 잘 것 같아. 이번 주 주말에 병원에 가야 해. 컨디션 조절 잘해야 하는데…….”

온갖 협박이 난무했다.

아무래도, 지서준에게 들은 사실을 죄다 털어놓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말할게. 이것 좀 놔봐.”

결국,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베테랑 아줌마들이었다.


“그나저나, 아저씨는요?”

이런 자리에 승호 아저씨가 불참할 리가 없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동창들 만나고 조금 늦는다고 했어. 그 사람은 찾지 말고, 빨리 얘기해봐.”

“그러니까……. 지서준이, 아니 그런데 나, 이거 말하면 지서준한테 엄청나게 깨질 것 같은데?”

나는 말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금세 어른들한테 달려가 쪼르르 입을 나불댔냐고 내 볼을 찍찍 잡아당기는 지서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찰싹.’


“아! 아파!”

“감질나게 말하려다 말아! 사람 속태우지 말고 빨리 말해.”

잠깐 뜸 들인다고 내 등을 매섭게 내리쳤다.
평소 같으면 때릴 곳이 어디 있냐며, 엄마를 나무랐을 아줌마였겠지만, 내가 입을 열 듯 말 듯 애태우자 이번에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서준 여자친구 있었대요.”

“맞네. 맞아. 그 아저씨 말이 맞았네!”

엄마와 아줌마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아빠는 내 앞에서 그저 허허 웃으며, 서준이도 사랑할 줄 아는 남자였다며 흐뭇해했다.


“누구래? 뭐 하는 여자였대? 어디서 만난 거래?”

“근데 왜 엄마한테는 소개 안 해준 거라니? 다율아.”

지서준의 과거 연애 소식에 좋아하던 아줌마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몰라.”

“몰라?”

“응.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볼펜을 들었으면 마침표는 찍어야지. 그게 뭐야!”

“그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으면 젓가락이라도 튀겨야지. 갑자기 불을 끄는 게 어딨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비유에 그저 눈만 껌벅거렸다.


“정말 모르는데……. 아! 뭐 하나 아는 거 있다.”

“뭐?”

아줌마들이 다시 나에게 바짝 다가오며 눈을 반짝였다.


“한국계 미국인이었대.”

“또!”

다른 정보를 내놓으라 닦달하는 엄마였다.


“그것밖에 모르는데?”

“그럼 밖에 가서 둘이 무슨 얘기 했어?”

“팥빙수 먹었는데?”

음료수를 다 먹고, 너무 덥다고 징징거리자 지서준이 내 손에 편의점에서 파는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쥐여주었다.


“…….”

실망감이 거실에 퍼져나갔다.


“정말, 서준이가 더 얘기 안 했어?”

아마, 내가 물었다면 지서준은 이야기해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아줌마들이 원하는 정보 따위 내 머릿속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네.”

굳이 바람피워서 헤어진 여자친구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게임장 주인아저씨가 말했던 같이 왔던 여자친구도, 그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자기야. 괜히 시간만 버렸네. 내가 그러니까 문다율 믿지 말라고 했지? 서준이 아빠는 언제 온대?”

엄마가 아줌마에게 물었다. 아줌마는 실망이 컸는지 축 처진 어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거나, 말거나.”

아줌마는 그 말을 남기고 우리 집을 나섰다.

**



[아줌마한테 연락 안 왔어?]

윤희 아줌마가 돌아가고 나는 엄마에게 그런 것도 묻지 않고 뭐 했느냐. 그 입은 밥만 먹고 밥값을 하지 않는다. 등등의 잔소리를 바가지로 듣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지친 귀를 달래며 겨우 씻고 나와 지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니. 왜?]

아무래도 아줌마는 지서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모양이다.


[아까 바닷가 게임장에서 너 여자친구 있다는 얘기 나만 들은 거 아니잖아.]

[아. 그렇지.]

어떤 때 보면, 이놈의 지능은 이과 계열로만 편중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 맞다? 내가 우리 부모님이랑 아줌마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문자를 보낸 후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뭐라고 말했어?]

지도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게 뭐 있어. 그냥 모른다고 했지.]

[잘했네.]

나는 핸드폰을 지서준 보듯 노려보았다. 그때, 진동으로 해둔 핸드폰이 마구 몸을 떨어댔다.

지서준이었다.


“왜 전화야.”

-문자, 답답해.

아무튼, 자기 멋대로였다.


-그런데, 회사에서 너 무슨 사고 친 건데?

“그게…….”

나는 갑자기 항공권이 취소되어 큰일 날 뻔했다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내가 분명히 확인했거든? 백인하 씨 알지? 왜 우리 같이 국수 먹었던…….”

-몰라.

“아 왜 몰라! 암튼, 그 친구가 이번에 항공권 예약을 해줬단 말이야? 그리고 나한테 확인해 달라고 해서 내가 분명 확인을 했다고.”

-항공사에서 취소한 거 아니야?

“응. 항공사에 전화해봤는데, 분명 우리 측에서 취소했다는 거야.”

-그런 일도 있어?

“나도 처음 있는 일이라 잘 모르겠네.”

성격 좋은 팀장님 덕에 어떻게 좋게 좋게 넘기기는 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니 아찔했다.


“나 그러고 팀장님한테 불려가서 엄청 깨졌잖아.”

-이상하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똑똑한 지서준이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한 거였다.


-알아볼 방법은 없어?

“있기야 있겠지. 항공사 측에서는 문제가 없다니까, 내 실수 아니면, 백인하 씨 실수겠지.”

-놀랐겠네.

지서준이 나를 위로하듯 말을 던졌다.

‘쿵쿵쿵.’

그 한마디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아니고, 꿀이 잔뜩 들어간 로맨틱한 대사도 아니었건만,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그, 그럼. 놀랐지. 우리 부서에서는 엄청난 실수라고.”

나는 내 심장 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가 지서준의 귀에라도 들어갈까 봐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오늘 조금 풀렸어?

오늘따라 이놈이 왜 이렇게 다정할까.


“지서준.”

-응?

“지서준, 지서준.”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지서준을 마구 불러댔다.


-말해. 듣고 있어.

“……그냥. 심심해서.”

-싱겁긴.

“전화 안 끊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지서준에게 전화해 장난하면 대꾸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지서준이었다.

저런 시답지 않은 장난에도 항상 냉정했다.

그런데, 오늘은 설탕이라도 집어 먹었는지, 달달한 지서준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화 끊어야 하나? 왜?

“내가 장난쳤잖아.”

-전화 끊고 싶지 않은데?

나는 코끝에서 시작해 발가락 끝까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괜스레 집게손가락으로 이불 모서리를 빙글빙글 돌려댔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어봐.

오늘의 지서준이라면 아마 답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게임장에 같이 갔던 전 여자친구……. 예뻤어?”

‘뚜뚜뚜뚜…….’

전화가 끊겼다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사를 출근해서 제일 먼저 뱉는 말이었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백인하 씨가 일찍 출근해 나를 반겼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오거나, 아니면 조금 늦게 도착하는 그녀였다.


“바쁜 일 있어요? 일찍 출근했네요?”

내가 탕비실로 가 커피를 들고나오며 물었다.


“조금 할 일이 있었어요. 대리님은 주말에 어떻게 보내셨어요?”

“오랜만에 바닷가에 다녀왔어요.”

“누구랑요? 혹시, 지서준 연구원님이랑요?”

“뭐……. 네.”

“단둘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본인도 알아챘는지,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려 주변을 살폈다.


“아니요. 하하. 부모님들이랑 같이 갔어요.”

“우와. 부모님하고도 다 친하신가 봐요.”

“네. 거의 가족 같아요.”

“그럼, 문 대리님은 지서준 연구원님 여자친구 본 적 있으세요.”

지서준이 여자친구가 있던가? 잠깐의 고민 후. 맞다.

지서준 여자친구 있다고 회사에 소문이 났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요? 저도 본 적 없어요.”

“대리님은 봤을 줄 알았는데…….”

“뭐, 친구 애인을 굳이 봐야 할까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런가요? 저는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저는 남자 사람 친구가 없어서요. 있다면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거죠. 하하. 사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요?”

꼭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가 따끔따끔했다.


“문 대리님은요?”

바로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충분합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라고 외치며 다녔다. 내가 산 증인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하지만 여기서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것도 우스웠다.


“나 있잖아요. 나. 하하. 있을 수도 있죠.”

“그래요?”

더는 이 대화 주제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백인하 씨. 저번 주에 부탁했던 것, 대사관에서 답신 왔어요?”

“네? 어……. 잠시만요.”

조금 치사할 수 있지만, 나는 일을 핑계로 불편한 대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문 대리. 오늘 같이 식사하러 가죠?”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팀장님이 내게 점심을 권했다.


“네?”

평소 혼자 드시거나, 다른 팀 팀장님들과 함께 식사하곤 했던 팀장님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내가 되물었다.


“왜요? 약속 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저랑 팀장님 둘이요?”

“네.”

내 인생에 두 번째 깐깐쟁이 팀장님과 식사를 할 생각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나 뭐 잘못한 것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번 주 항공권 취소 사건 말고는 없었는데……. 그 건으로 아주 호되게 혼이 났는데, 혹시 또?

나는 불안한 마음에 팀장님에게 물었다.


“혹시, 저 혼나나요?”

내 말에 안경을 추켜올린 팀장님이 말했다.


“뭐 혼날 짓 했어요?”

 

**

점심을 먹으러 팀장님과 단둘이 한적한 식당에 자리했다.


“많이 먹어요.”

“넵.”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저를 열심히 놀렸다. 혹여나 체할까 꼭꼭 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비싼 밥 먹고 체하면 아까우니까.

식사가 끝나갈 무렵.

팀장님이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 대리. 혹시, 해외 지사에서 근무할 생각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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