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너 때문에.
(27/97)
27화. 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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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너 때문에.
2022.10.02.
“해외 지사요?”
나는 갑작스러운 팀장님의 말에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되물었다.
“네.”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보다.
“갑자기 왜…….”
“이번에 호주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커질 건가 봐요. 그래서 한국 지원부서 중 해외 지사에서 서포트해 줄 사람을 찾는데, 문다율 씨가 적당한 것 같아서요.”
“제가요?”
“네.”
팀장님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답했다.
“문 대리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었죠? 갑자기 생각나서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아…….”
내가 너무 당황해하자 팀장님이 나를 달래듯 웃었다.
“하하. 문대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강제로 보낼 생각은 전혀 없어요. 문 대리가 호주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지만, 일도 열심히 하고, 꽤 능력도 있어요. 가끔 실수도 하지만, 그건 뭐………. 인간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는 없죠.”
나는 조금 남은 밥이 눈에 들어왔지만, 더는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올려 벌컥벌컥 마셨다.
“저……. 팀장님.”
“네. 문다율 대리.”
“조금 생각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만 하고 우리 두 사람은 헤어졌다. 팀장님은 조금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회사로 돌아왔다.
“대리님! 문 대리님!”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팀장님한테 많이 혼나셨어요?”
밥을 먹고 왔는지, 백인하 씨가 칫솔과 치약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뭐라고 말했어요?”
“네? 안 듣고 계셨어요?”
백인하 씨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미안해요. 잠깐 넋이 나가 있어서……. 뭐라고 했어요?”
“별 얘기는 아니었고……. 근데, 정말 팀장님 너무하세요!”
“네?”
갑자기 화살이 팀장님에게 옮겨갔다.
“아니, 저번에 미팅룸에서 문 대리님 엄청 깨졌잖아요. 그런데 오늘 점심시간까지 불러서 뭐라고 하시다니.”
아무래도 백인하 씨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듯했다.
“팀장님한테 안 혼났어요.”
“네? 그런데 왜…….”
“아. 뭐 그럴 일이 있었는데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고, 나중에 기회 생기면 말해줄게요.”
“네…….”
무척 궁금하지만, 상사를 볶아 댈 수 없으니 얌전히 포기하는 백인하 씨였다.
그러다 문득 지서준이 떠올랐다.
[밥은 먹었어?]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응. 너는?]
[나도 먹었어. 지서준, 나 할 말이 있는데 오늘 오피스텔로 가도 돼?]
메시지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연구실 들렀다가 퇴근해서 많이 늦어질 것 같은데……. 급한 일이야?]
갑자기 맥이 쭉 빠져버렸다.
왜 실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실망한 채로 핸드폰 액정을 설렁설렁 누르며 답장을 보냈다.
[아니. 급한 거 아니야. 나중에 말하지 뭐.]
[그래. 내가 또 연락할게.]
문자를 끝내고 나도 칫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도 텁텁하고 입안도 텁텁했다. 뇌 속을 벅벅 닦아 낼 수 없으니, 입안이라도 상큼하게 닦아내고 싶어 칫솔에 치약을 꾹 짜 화장실로 향했다.
**
요즘 지서준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엊그제는,
“나 오늘, 미국 시간대로 화상 회의해야 해서…….”
어제는,
“연구실에서 밤샘 연구해야 할 것 같은데, 미안.”
오늘은,
“남준모가 밥 먹자는데, 같이 먹을래?”
“됐어. 너희 둘이 먹어.”
이런 이유로 만나지 못한 날이 어언 4일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유예기간의 절반이 지나갔다.
“지만 바빠? 어? 언제는 자주 만나야 판단하기 쉬울 거라면서, 도대체 며칠째야?”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마구 투덜거렸다.
나는 그러다 내 단골 편의점으로 쏙 들어갔다. 익숙하게 장바구니를 들고 주류냉장고로 가 맥주를 골라 담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맥주와 땅콩의 바코드를 찍으며 아르바이트생이 물었다.
“네. 요즘 조금 자제하긴 했는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요.”
“저는 다이어트라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럼 안 오셨잖아요.”
“다이어트도 하긴 해야 하는데…….”
갑자기 저 맥주들을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13,800원입니다.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고민했던 것도 잠시 나는 내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봉투는 됐어요. 요 앞에서 마시고 갈 거라서.”
“하하. 네. 카드 받았습니다.”
나는 맥주 두 캔과 땅콩을 들고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았다.
‘탁.’
시원한 소리와 함께 맥주 탄산 소리가 옥구슬 흘러가듯 아름답게 들려왔다.
‘꿀꺽꿀꺽’
맥주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크아아. 아. 좋다.”
답답했던 마음마저 맥주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내려갔다.
신이 나니 코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발이 까닥까닥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조금은 후끈한 날씨. 여름의 낮은 길었고, 한낮의 더위가 아직은 남아 있었다.
다행히 열대야는 없는지 조금씩 열감은 사라지고 있었고, 적당한 더위와 시원한 맥주의 조합이 퍽 좋았다.
한 캔을 다 비우고 땅콩 봉지를 뜯어 땅콩 하나를 입에 넣어 막 씹는 순간, 내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저렇게 생기면 어떤 기분이려나.”
잘생긴 남자의 표본, 지서준을 봤을 때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저렇게 예쁜 여자의 일생은 어떨까.
다시 땅콩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때 갑자기 그 예쁜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우리 두 사람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왜 웃었지?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내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나를 따라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콩닥콩닥.’
뭐야. 심장이 눈치 없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아. 여자가 저렇게 예쁘면 이렇게 심장이 뛸 수도 있겠구나. 잠깐 주춤거리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쩍 벌어져 있던 나의 다리는 그녀가 다가오니 슬금슬금 모였다.
“저…….”
어머나. 목소리도 예쁘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내 옆에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자라왔으니까.
“네!”
예쁜 여자가 말을 걸으니 내 성대도 놀랐는지 볼륨 조절에 실패했다. 나도 모르게 내 앞 목을 콱 잡았다.
내 모습에 아름답게 웃어 보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 그럼요.”
“저, 혹시 이 아파트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길치여서 아무리 지도를 봐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핸드폰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핸드폰은 지도 앱이 켜져 있었는데, 그 지도는 우리 아파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여기는 이 길로 쭉 따라가시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작은 근린공원 있거든요? 그 근린공원에서 아파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내 몸을 쭉 내밀어 손가락으로 열심히 가리켰다.
“그쪽으로 올라가면 훨씬 빨리 도착해요.”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그녀는 길을 잃고 헤맸던 것이 꽤 답답했던지 내 설명을 무척 고마워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심히 찾아가세요.”
“네.”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뒷모습도 예쁘네.”
나는 하나 남은 맥주를 땄다.
조금은 미지근해진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한 캔씩 살걸.”
나는 후회를 하며 캔을 다시 입으로 가져다 대는데 지서준에게 연락이 왔다.
받아? 말아?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연신 몸을 떨어대며 제 존재를 알리는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왜. 받았으면 됐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갔다.
-어디야. 집이야?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남준모 만나는 거 아니야?”
-그냥 보냈어. 어디야. 집은 아닌 것 같은데.
때마침 편의점 위층 태권도장에서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그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갔나 보다.
“집 앞 편의점.”
-또 맥주 마시고 있어?
나는 이미 비어버린 한 캔과 아직 반이 남아 있는 한 캔을 보았다.
“조금?”
-기다려. 갈게.
“지금 온다고?”
-응. 태권도장 밑에 있는 편의점이지? 거기서 기다려.
지서준이 전화를 끊었다.
“지 할 말만 하고 끊어?”
나는 조금은 풀어진 마음에 자꾸만 흘러나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랑.’
“어? 뭐 더 사시게요?”
“네. 아무래도 맥주는 한 캔씩 사야 하나 봐요.”
“하하. 네. 골라오세요.”
나는 맥주를 사러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
“이게 다 뭐야.”
지서준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내 테이블에는 비어있는 맥주 3캔과 이제 막 사 들고 나온 맥주가 한 캔 그리고 바닥을 드러낸 땅콩 봉지가 있었다.
“큰 사이즈로 안 마셨어. 이 사이즈면 3입 마시면 끝이다?”
내 말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내 앞에 앉았다.
“남준모는 왜 보냈어?”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징징거리잖아. 꼴도 보기 싫어서.”
지서준이 내가 막 사 들고 온 맥주를 가져가 벌컥벌컥 마셨다.
“뭐야. 걔 여자친구도 있었어?”
“그랬나 봐. 똘이 장군도 그 여자친구 때문에 키우게 된 거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조금 놀라운 소식에 내 맥주를 빼앗긴 것도 몰랐다.
“야! 네가 사서 마셔. 왜 내 맥주 가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주라도 챙겨주고픈 마음에 봉지를 탈탈 뒤졌지만, 땅콩 부스러기만 나올 뿐 아무것도 없었다.
“과자라도 사 올까?”
내 말에 고개를 젓는 지서준이었다.
“뭐라도 먹자. 배고프네.”
나는 맥주를 먹어서 그런지 크게 배고프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내가 테이블을 다 정리하는 동안 맥주를 다 마신 지서준이 캔을 찌그러트려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었다.
“뭐 먹을래?”
“우리 오랜만에 학교 근처 분식집 갈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이 앞장서 걸어갔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다녔던 중학교가 있었고, 그 근처 우리의 단골 분식집이 있었다.
“거기 주인 바뀐 것 같더라.”
“그때도 할머니가 꽤 연세가 많으셨지.”
“응. 진짜 인심 좋으셨는데.”
“응.”
우리는 추억을 곱씹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익숙한 간판이 걸려있었다.
“이모님,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순대 그리고 튀김 주세요.”
“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행히 인테리어는 크게 변함이 없었고, 우리는 그리워지는 마음에 이곳저곳 둘러보기 바빴다.
금방 떡볶이가 나오고 떡을 몇 개 집어먹는데 지서준이 물었다.
“나한테 할 말 뭐였어?”
“응?”
“다 삼키고 말해.”
아니, 그럼 먹고 있을 때 묻지를 말던가. 나는 그놈을 째려보며 입안에 든 떡을 마구 씹어댔다.
“나 해외 지사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받았어.”
“뭐?”
지서준은 꽤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집었던 떡볶이에서 국물이 뚝뚝 떨어져 테이블을 더럽히고 있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저렇게 놀라는 모습은 아직 몇 번 본 적 없었는데, 그만큼 지서준이 놀랐다는 뜻이었다.
“며칠 전에……. 팀장님이 같이 점심 하자고 해서 나갔더니, 해외 지사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고……. 그래서 고민 좀 해보겠다고 했어.”
지서준은 여전히 포크를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나는 지서준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 떡볶이를 내 입에 넣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생각해 본다고 했다니까?”
뒷말은 듣지도 않았는지 지서준이 다시 물었다.
한숨을 푹 내쉰 지서준은 컵에 담겨 있는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그래서, 너 갈 거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왜?”
나는 지난 3일간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그나마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