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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나 진짜 가? (29/97)


29화. 나 진짜 가?
2022.10.09.



“머리끄덩이……. 머리끄덩이를 확.”

“대리님?”

다음 날 점심. 해장하고 싶어 백인하 씨를 데리고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네?”

“지금 대리님 조금 무서웠던 거 아세요?”

“제가요? 음. 아니에요. 아직 실천에 옮긴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나는 머리카락을 잡듯 손에 쥔 고수를 쌀국수에 넣었다.


“누구 머리채를 잡으러 가실 건데요?”

자기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며 백인하 씨가 물었다.


“잡긴 뭘 잡아요. 그냥 그럴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죠.”

“뭐, 뭘요?”

“그럴 일이 있어요.”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으시구나.”

이해되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백인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는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는지,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

회사 메신저로 처음으로 지서준에게 연락이 왔다.


[너 진짜 메시지 확인 안 할 거야?]

사실, 오늘 아침부터 꾸준하게 지서준에게 연락이 왔지만, 나는 깡그리 무시하는 중이었다.


[지서준 연구원님. 사내 메신저는 원활한 업무를 위해서만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개인적인 연락 좀 하게 핸드폰 좀 보시죠? 문다율 대리님.]

그렇게 메신저가 도착했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뒤끝 문다율이니까.


[회사 끝나고 봐.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로비에서 기다릴게.]

[안 돼. 나 오늘 야근이야.]

[왜, 또 퇴근 안 한다고 하지.]

내 거짓말을 단박에 알아차린 지서준이 빈정거렸지만,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메신저가 왔다.


[미안. 진짜 미안. 갑자기 회의가 생겨서……. 내일 보자.]

아. 열 받아.

물론! 만나줄 생각이 없었지만,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니 그건 또 그거대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지서준의 머리를 잡아 흔들든, 지서준의 전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어 재끼든 일단은 부딪쳐보기로 했다.

다음 날, 지서준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먼저 제안했고, 지서준이 알겠다 대답했다.

회사 근처에서 만나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길,

평소와 달리 별말 없이 걷는 나를 흘긋대는 지서준이었다.


“화났어?”

“내가 왜 화가 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

뭘 알고 묻긴 물은 건지.

일단 길거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조용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 앞에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모둠 초밥이 예술과 같은 자태를 뽐내며 도마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잘 먹을게.”

나는 지서준에게 말하며 초밥 한 점을 들어 올려 간장에 콕 찍었다.


“내가 산다고 했나?”

“네가 사야 할걸?”

나는 꼬리가 긴 초밥을 한입에 몽땅 넣어버렸다.


“맛있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 젓가락도 들지 않은 지서준이 팔짱을 끼고 내가 먹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너는 안 먹어?”

이번에는 다른 초밥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젓가락을 들 생각이 없는 지서준을 발견하고 물었다.


“이거 먹고 체하면 아깝잖아. 심지어 내가 돈 내는 건데.”

“……반반 내. 그러니까 먹어.”

“됐어. 너 맛있게 먹어.”

나는 입에 넣으려다 말고 초밥을 다시 내려놓았다.


“왜 안 먹어.”

“네가 안 먹으니까 좀 그렇잖아.”

그제야 젓가락을 들어 초밥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다시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때, 올리브인가, 올리브유 인가 그 여자……. 네 전 여자친구 맞지?”

미소 된장국을 한입 떠먹더니 지서준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름은 올리비아. 그리고 전 여자친구 맞아.”

이름까지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정정해주는 지서준이었다.


“그래. 네 전 여친. 그 여자가 왜 우리 동네에 있었대?”

다시 먹기를 포기한 듯 지서준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연히 만난 거야.”

“우연히? 그 여자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며, 우리 동네가 명동도 아니고.”

“…….”

“그것도 그 여자 우리 동네에 꽤 오래 있었어. 나 혼자 편의점에서 맥주 마실 때 헤매고 있었다고! 그것도 우리 아파트 주소 보면서.”

내가 흥분을 하자 지서준이 내 앞으로 초밥이 담긴 도마를 쓱 밀었다.


“흥분하지 말고, 일단 먹어. 먹고 화내.”

나는 지서준을 눈이 아프도록 노려보며 초밥을 입에 넣었다.

초밥의 끝이 보이자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일 때문에 한국에 오게 됐는데, 옛날에 한 번 와봤던 이 동네가 생각이 났대. 그래서…….”

“웃기고 있네.”

지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콧방귀를 뀌자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편지 부쳤던 주소로 찾아와본 거래. 옛날이랑 달라지기도 했고, 지도도 잘 못 봐서 헤매고 있는데, 네가 도와줬다고 하더라.”

예쁜 외모에 홀랑 넘어가서 아주 친절하게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전 남자친구가 살던 동네는 왜 오냐고.”

“그냥 와보고 싶었대. 그게 다래.”

저 헛똑똑이가 그 말을 믿는 모양이다.

나는 답답해지는 마음에 물을 들이켰다. 그 뒤로 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식당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금요일 밤의 도시는 활기찼다. 그 틈바구니에 끼여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사람들에 치여 내가 자꾸 밀리자 지서준이 나를 안쪽으로 보내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지서준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 여자 데리고 가서 그 말만 했어?”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는 지서준.


“그 여자랑 그 말만 하고 헤어졌느냐고.”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 지서준이었다.


“뭐 했어?”

“그냥 밥 먹었는데?”

그냥 밥만 먹었다?

한참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중 지서준이 멈춰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내 눈치를 보는 지서준.

어쩜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지.

예전, 지서준이 날 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받아. 왜 안 받아?”

“어? 어.”

내 말에 통화버튼을 누르더니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어? 어. 아니, 친구랑. 응? 어. 형은?”

아마도 지금 나랑 같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 후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응’과 ‘어’의 반복이었다.


“올리브유?”

뭔가 지적해주고 싶다는 듯 눈썹을 꿈쩍거린 지서준이 작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전화한 거래?”

“길을 잃었는데 가방도 어디 두고 온 모양이야.”

지서준은 나에게 올리브유의 상황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빨리 가봐.”

“미안하다.”

버스 정류장까지 날 데려다준다는 지서준을 뜯어말리고 혼자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길.

내가 애도 아니고 당연히 집에 혼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꼭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괜히 보내줬나.”

익숙한 서울의 밤공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꼭 낯선 도시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탈 버스가 10분 뒤에 도착한다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해놓고, 전 여자친구의 등장이라니.


“확 다 때려치우고 호주로 가버려?”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마음속으로 호주행 비행기를 올랐다 내렸다 몇 번 반복했다. 그때, 집으로 가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사람들 줄 맨 끄트머리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버스에 막 올라타 자리에 앉는데 누군가 급하게 버스를 세웠는지 버스 기사 아저씨가 다시 문을 열었다.


“버스 출발하는데 그렇게 달려오면 어떡해요! 위험하잖아요.”

버스 기사 아저씨가 헐떡이며 올라탄 사람에게 짜증을 냈다.


“죄송합니다. 꼭 이 버스를 타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서준이었다.

버스 아저씨와 승객들에게 죄송하다 고개를 숙이고 지서준이 내가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와 섰다.


“너…….”

내가 깜짝 놀라 입을 벙끗거리자 씩 웃은 지서준이 자신의 가방을 내게 건넸다.


 


“너, 올리브유한테 가는 거 아니었어?”

“안 가도 돼.”

지서준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가 여태 심란하기만 했던 내 마음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그래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다.


“진짜 가?”

순간 버스가 높은 과속방지턱을 넘었는지 심하게 덜컹거렸다. 휘청이는 지서준. 나는 지서준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씩 웃는 지서준.


“나 진짜 가냐고.”

나는 지서준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옆에 서서 걷는 지서준을 흘끔댔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나는 지서준의 말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린 지서준이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할 말 있으면 해.”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오지랖 넓은 건 아는데……. 진짜 올리브유한테 안 가봐도 되는 거야?”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날 바라보던 지서준.


“아니…….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다며. 가방도 없다고 하고…….”

“택시 잡아서 타고 아저씨한테 계좌번호 불러 달라고 하면 내가 부쳐주기로 했어.”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요즘은 핸드폰만 있으면 결재할 수 있었다. 가방이 없다고 하더라도 급한 불은 끌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는 역시 똑똑한 지서준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걔는 인터넷뱅킹 이런 거 안 해. 기계를 믿을 수 없다나 뭐라나. 스마트폰 쓰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어.”

지서준이 당최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올리브유도 꽤 특이한 캐릭터네.”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나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왜, 왜!”

“아니야. 모르면 됐어.”

그 말만 남기고 다시 걷기 시작한 지서준.

나는 지서준을 쫓으며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집에 갈 때까지 따져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

출근하지 않는 주말 아침.

나를 방해하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어떤 놈이…….”

나는 내 단잠을 방해한 벨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욕을 날려준 후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서준이었다.


“안 받아.”

나는 핸드폰을 내 애착 인형의 배에 올려놓고 최대한 먼 곳으로 치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문다율!”

“아! 왜!”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열심히 울려대는 내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다율. 서준이 전화야. 지금이 몇 신데 자빠져 있어. 일어나 봐!”

엄마가 이불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잔다고 해!”

“지금 일어났잖아.”

그렇게 엄마와 나는 이불을 잡아당기며 힘겨루기를 했다. 당연히 승자는 우리 엄마.

나에게 전화기를 넘겨주고 유유히 방에서 사라졌다.


“왜.”

“지금 집 앞이야.”

대뜸 집 앞이라는 지서준.

빨리 집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냐는 지서준.


“야. 십, 십 분만……. 아니! 십오 분!”

-5분 뒤 올라간다.

나는 끊겨버린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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