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왜 당황하는데?
(30/97)
30화. 왜 당황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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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왜 당황하는데?
2022.10.12.
5분은 짧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서준이니?”
엄마가 인터폰을 향해 지서준을 반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지서준이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주머니.”
“서준이라면 오밤중에 찾아와도 상관없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엄마 아빠한테 오는 길이야?”
지서준의 예의 바른 말에 엄마의 목소리에서 꿀이 철철 흘러넘쳤다.
“아. 그건 아니고……. 잠깐 문다율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지서준이 말하자 엄마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나저나 윤희 재검사 결과 잘 나와서 다행이야.”
“네. 많이 불안해하셨는데, 다행이죠. 옆에서 잘 챙겨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얼마 전 검사를 받으러 아주머니는 병원에 가셨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하셨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지서준이 함께 가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때 엄마가 윤희 아줌마와 아저씨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었다.
나도 그날은 너무 걱정돼서 핸드폰만 바라봤는데, 지서준은 오죽했을까.
아줌마의 픽을 받지 못한 지서준은 힘들어했었다.
나중에 아줌마께 들으니, 나쁜 소식이라면 최대한 늦게 알려주고 싶으셨단다.
그 소리를 지서준이 듣는다면 펄펄 뛰겠지.
열심히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 마이…….”
오늘따라 꾀죄죄한 내 모습. 반은 없어진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서준에게 이런 모습이 원데이 투데이는 아니건만. 도저히 이 모습으로 나갈 수 없었다.
눈썹이라도 그려야지 싶어 열심히 아이브로우펜슬을 찾았지만, 오늘따라 왜 내 눈에 안 보이는 건지.
지저분한 화장대가 오늘따라 더 정신이 없었다.
“다율이는요?”
“문다율? 아까 일어났는데? 또 자빠져 자는 거 아니야? 문다율! 서준이 왔어!”
엄마가 날 크게 불렀다.
“문다율! 나와보라니까?”
내가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지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요. 아주머니. 제가 들어가 볼게요.”
결국, 눈썹 그리기를 포기하고 잽싸게 야구 모자를 찾아 썼다.
그때 밖에서 엄마가 서준이를 불러 세웠다.
“서준아 문다율이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집 문 씨들이 그래. 다들 좀생이야. 얘가 아빠 닮아서……. 알지 서준아?”
엄마가 갑자기 지서준에게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지서준은 우리 엄마의 말에 그저 난처하게 웃었다.
안에서 듣다 못 한 내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엄마! 진짜…….”
엄마는 불러도 불러도 나오지 않던 내가 잠옷 차림에 야구모자를 쓰고 나온 모습에 기가 찬 듯 웃었다.
“그 꼬라지는 뭐니.”
“이, 이건……. 그러니까 왜 갑자기 집으로 오고 난리야.”
나는 아침부터 일찍 집으로 찾아온 지서준을 흘겼다.
“잠깐 나가 있어. 나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갈게.”
나는 지서준의 팔을 잡아끌어 현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지서준은 별 저항 없이 나에게 질질 끌려왔다.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자 우리 엄마가 그냥 집에서 대화하라고 했고 지서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정중하게 거절하고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래. 서준아 다음에 와. 그때는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아니요. 다음에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아저씨랑 같이요.”
“그 양반은 챙길 필요가 없는데……. 호호. 알겠어. 서준아. 우리 다율이랑 놀아줘서 항상 고맙다. 조심히 가고.”
“네. 안녕히 계세요.”
평상시와 같은 인사였지만, 오늘따라 꼴불견이었다.
내가 놀아주는 거지, 지서준이 놀아준다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내용이었다.
지서준이 나가고 욕실에서 칫솔에 치약을 꾹 짜 양치를 하는데 엄마가 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서준이가 집에 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그렇게 매정하게 쫓아내니?”
엄마는 내가 서준이를 쫓아내듯 내보낸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 이 아치에 불뚜 차자오는 게 마자?”
나는 칫솔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내 말에 가자미 눈으로 노려보던 엄마가 말했다.
“네가 안 씻는 거 서준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늘따라 유난이야. 양치나 깨끗이 해.”
엄마는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 관심을 끄고 거실로 나가 TV를 틀었다. 분명 엄마가 전에 봤던 드라마임이 틀림없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단숨에 TV에 집중했다.
TV 볼륨을 크게 해놔 욕실까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 누구야?’
여주인공이 말했다.
‘전 여자친구. 근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남자주인공이 말했다.
하필 드라마 대사가 저게 뭐람.
칫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분노의 양치질을 끝내고 대충 씻어 기초화장만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공동현관 앞에 지서준이 서 있었다.
“무슨 말 하려고 이 아침부터 찾아온 거야?”
내가 지서준에게 다가가며 말하자 지서준이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네. 차에라도 타자.”
“나 양치만 하고 나온 거야. 멀리 못 가.”
내 말에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본 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지서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서준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
“올리비아랑 나에 대해서…….”
올리브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놈이 아침부터 왜 나를 찾아왔나. 괜히 간질거리던 심장이 뚝 멈췄다.
“그게 걱정돼서 이 아침에 찾아온 거야?”
내 질문에 슬쩍 고개를 끄덕이던 지서준이 민망한지 헛기침했다.
지서준이 민망해한다고?
이게 몇 년 만인지. 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속옷들을 봐도 그저 무덤덤하던 놈이었는데.
나는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져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전 여자친구. 그 이상 뭐 다른 거 있어?”
장난도 조금 섞어 묻긴 했지만, 내가 물어놓고 괜한 긴장감에 목이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지서준의 말대로 자리를 옮겨서 카페라도 갈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가끔 서로 안부만 묻고 지낸 사이였어. 네가 오해하고 기분 나빠할 그런 사이 절대 아니야.”
꽤 단호한 대답. 지서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영 찝찝한 것이 가시지 않았다.
지서준의 대답에도 시원하지 않은 마음에 지서준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야. 진짜 그런 거 아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 그냥 진짜 가끔 연락한 것 말고는 없다니까. 가끔이라고 해봤자 일 년에 한 번도 안 한 적도 있고, 한국 들어온 지도 몰랐었어.”
어쭈.
왜 갑자기 말이 많아지지?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추켜 올렸다.
“전 여자친구랑 연락은 왜 하고 지내? 어?”
내 말에 여전히 펄쩍 뛰는 지서준.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때 아파트에서 자전거를 타던 초등학생들이 멈춰 섰다.
“사랑싸움 한대요!”
“하하. 둘이 부부예요? 우리 엄마 아빠도 매일 싸우는데, 둘 중에 누가 더 힘세요? 우리 집은 우리 엄마가 더 세요.”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멈춰서 우리를 구경했다.
“저리 가라. 앞날이 창창한 어린이들아.”
내가 고개만 획 돌려 눈에 힘을 주고 말하자 아이들이 흠칫 놀라 자전거 페달을 밟아 저만치로 사라졌다.
사라져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나는 지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리 옮겨서 얘기하자.”
정말로 이른 아침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자주 가던 편의점에서 캔 커피 한 잔씩 샀다.
“놀이터라도 가자.”
“요즘 놀이터 자주 간다? 고딩들한테 돈 뜯길뻔하고 무섭지도 않아?”
나는 지서준의 말에 코웃음 쳤다.
이 아침부터 삥 뜯길까. 그렇게 부지런한 학생들이라고? 그리고 오늘은 학교도 쉬는 주말이었다. 주말까지 고딩들이…….
“이, 있네.”
무리 지어 있는 사복 입은 고딩들. 분명 그때 내 가방을 탈탈 털었던 그 아이들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 놀이터로 기어들어 온 나를 저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그들은 저희끼리 킥킥거리며 대화하느라 나와 지서준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최대한 조용하지만 빠르게 몸을 움직여 지서준의 팔을 움켜쥐고 가장 가까이 세워진 차 밑으로 숨었다.
“뭐 해.”
“잠깐, 잠깐만 여기서 쉴까? 다리도 아프고…….”
분명 저 고등학생들을 피해 여기 숨었단 걸 지서준이 알게 되면 태연하게 걸어가 그들 사이에 있는 벤치에 떡하니 앉겠지. 아니. 앉을 것이다. 분명.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지서준의 시선이 따끔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이고, 신발 끈이 풀어졌네.”
나는 천천히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신발 끈을 꼭 고등학생들이 무서워서 차 뒤에 숨어서 묶어야겠어?”
젠장. 이놈은 모르는 척하려면 끝까지 모르는 척하던가. 같이 쭈그려 앉아 놓고는 꼭 이렇게 말을 해야 하나.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려다, 저놈의 심사가 뒤틀려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날까 무서워 눈에 힘을 풀었다.
“그냥, 그냥 여기 잠깐만 있자. 쟤들 갈 때까지.”
“왜?”
정말 몰라서 묻는 표정의 지서준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려는 지서준을 다시 붙들었다.
“어디 가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 소리쳤다.
“다리 저려. 이게 뭐 하는 짓. 우웁”
웅성거리는 소리에 지서준의 입을 틀어막고 숨어 있는 차의 뒤꽁무니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 돈 있어?”
“내가 돈이 어딨어 나도 거지라고 했잖아”
“아씨. 나도 없는데…….”
“집에나 가라.”
“집에 가면 할 것도 없어. 나 오늘도 너희 집에서 재워주라.”
“미친놈.”
고등학생들이 살벌한 대화를 나누며 지나쳐갔다. 점점 말소리가 작아지며 그들이 골목 뒤편으로 사라졌다.
“가, 갔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살벌하게 노려보는 지서준의 입을 막고 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거뒀다.
“아니,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응?”
꽤 오래 쭈그려 앉아 있어 저릿저릿한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껏 구겨졌던 몸을 핀 지서준은 커다란 보폭으로 놀이터로 향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절뚝였다.
“쟤들은 쓸데없이 부지런하다니. 이 아침부터 몰려다니고.”
“아침 일찍 일어났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놀러 다닌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지서준을 보며 역시 똑똑한 놈은 생각의 폭이 넓다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들이 있던 자리. 더러운 흔적에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자 지서준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와.”
지서준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괜스레 크게 느껴지는 손이 오늘따라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아침부터 유난히 따가운 햇볕을 피해 그들이 있던 반대편 그나마 깨끗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았다.
나는 주머니 속 볼록 튀어나온 커피를 하나씩 꺼냈다.
“자.”
내가 커피를 건네자 손에 있는 캔을 가져가 뚜껑을 따고는 내게 커피를 넘긴 지서준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빈속에 마셔도 돼?”
“응. 무릇 사회인이란 빈속에 커피를 콸콸 부어줘야 아침에 정신이 드는 법이지.”
내 말에 피식 웃던 지서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서준은 지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지서준과 초조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지서준이 내 눈치를 보며 달싹거리던 입을 열었다.
“그거 아니야.”
“뭐가.”
“그거 아니라고.”
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서준의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이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