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깨달았다면 직진이지.
(33/97)
33화. 깨달았다면 직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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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깨달았다면 직진이지.
2022.10.23.
올리브유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알이 굵직한 반지보다 더 부담스러운 내 눈빛에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올리비아는 올해 초에 결혼했어. 남편 따라서 한국으로 나온 거고.”
그녀가 유부녀라니. 유부녀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입맛 벙긋거렸다.
“올리비아! 그걸 왜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 건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가 흘러나왔다.
“응? 아. 나중에 버리려고 했지.”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대사.
“지금 버려.”
“그렇지만…….”
올리브유는 지서준의 눈치를 보며 쓰레기와 쓰레기가 아닌 것을 분류하고 있었다. 지서준이 그 모습을 보더니 겨우 미간에 힘을 풀고는 감자탕을 앞접시에 덜었다.
유부녀……. 그녀는 유부녀였다.
푹 익어 퍼진 배추와 시래기, 섭섭하지 않게 뼈에 붙어 있는 살코기. 적당히 끓어오른 감자탕이 유혹의 냄새를 풍겼다. 그런 감자탕에 시선을 빼앗긴 유부녀 올리브유는 지서준에게 팔을 쭉 내밀었다.
“내 거는 내가 덜면 안 될까?”
그러더니 그녀가 지서준의 국자를 빼앗았다.
불안한데. 지서준과 내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앗!”
결국은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가장 큰 뼈를 골라 낑낑거리며 앞접시에 담던 그녀가 고기가 많이 붙은 뼈를 놓쳤고 그 국물이 튀어 버렸다. 그녀의 하얀 원피스는 감자탕 국물이 튀어 얼룩덜룩 물이 들기 시작했다.
“에이.”
그녀는 국자를 내려놓고 물티슈로 벅벅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엉망이 되어버린 원피스를 보던 그녀는 물티슈를 내려놓고는 태연하게 다시 국자를 들어 감자탕을 덜기 시작했다.
지서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좀 전에 덜어 둔 감자탕을 내게 주었다.
“제가 디자이너거든요. 나름, 유명해요.”
올리비아가 갑자기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업실을 찾고 있는데, 예전에 준이 살던 동네가 생각이 났지 뭐예요? 그래서 무작정 택시를 타고 갔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거 있죠.”
열심히 뼈의 고기를 발라 먹으며 그녀가 말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율 씨를 보게 된 거죠. 어때요? 우리 굉장한 우연이죠?”
“네? 아, 네. 그랬군요.”
그녀는 감자탕을 먹는 동안 쉴새 없이 이야기했다.
“남편한테도 말했더니, 엄청나게 고마워했어요.”
아직도 올리브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남편이라는 단어가 매우 어색했다. 슬쩍 지서준을 봤지만,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우연히 다율 씨도 만나고 준도 만난 날이었으니 엄청 행운이에요. 서울 와서 쓴 택시비만 해도 엄청 나다고요.”
그녀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서울이라고 둘러대지 마. 미국에서도 그랬잖아.”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 정도면 병이야. 길 못 찾는 병.”
“매정해.”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쁘고 애교도 많은 그녀. 그녀의 원피스에 튄 감자탕 국물까지도 패션으로 만들어버리는 외모였지만 지서준의 표정엔 일말의 달달함도 없었다.
그 모습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어? 핸드폰 어딨지?”
그녀가 핸드폰을 찾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아까, 가방에 넣었잖아요.”
보다 못한 내가 말하자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그랬구나. 다율 씨는 참 세심하고 꼼꼼한 것 같아요.”
“네?”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풉.”
옆에서 지서준이 비웃었지만, 딱히 화낼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마저 감자탕을 해치워 나갔다. 배가 불러도 볶음밥까지는 무조건 먹어야 한다며 밥까지 비벼 먹고 나오는 길.
“그럼 저는 가볼게요. 우리 다음에 또 볼 수 있는 거죠?”
“아마도…… 그렇겠죠?”
“다행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준, 잘 가.”
미련 없이 돌아서서 인파 속에 묻혀버린 그녀. 그녀는 엄청난 폭탄을 터트리고 그렇게 한 마리의 하얀 나비와 같이 사라졌다.
흰 나비는 식당을 나오며, 본인의 신발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나오는 바람에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그런 올리브유의 뒷모습을 보니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했다.
“저렇게 보내도 되나?”
“아마도. 형이 온댔으니까 괜찮을 거야.”
“형?”
볶음밥을 벅벅 긁어먹던 그녀는 남편이 근처까지 데리러 온다며 연락받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만나기로 했다는 장소까지 몇 번이고 길을 외우고는 식당을 나와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진 그녀였다.
그런데, 형이라니…….
“올리브유 남편, 아는 사람이야?”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잠깐 카페 들렀다 가자.”
지서준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카페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은 우리 두 사람.
“왜 얘기 안 했어?”
자리에 앉자마자 지서준에게 물었다.
“뭘?”
“올리브유 유부녀인 거.”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못하게 했잖아.”
꽤 억울한 듯 말하는 지서준. 네가 언제 말하려고 했냐 따져 물으려다, 내가 지서준의 말을 끊고 내 할 말만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끝까지 들어볼걸…….
하지만 아무리 유부녀가 됐다고 해도 지서준에게 첫사랑, 첫 여자친구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작게 머리를 털었다.
“올리브유 남편이랑은 아는 사람이야?”
“응. 학교 선배.”
“오 마이 갓이다. 진짜.”
지서준의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럼 너랑 올리브유랑 사귀었던 것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응. 그 형도 알고 있지.”
“나 지금 미드 보니?”
내 말에 가만히 커피만 보던 지서준이 말했다.
“아까 봤다시피, 막상 만나면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어. 그저 올리비아는 올리비아야. 그런데 네가 싫다니까, 안 만나려고 했어.”
그러곤 나를 흘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처럼 전화도 없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사실 그 길치가 여길 찾아온 것도 기적이지만.”
“너는, 너는 진짜 아무 감정 없는 거야?”
사실 지서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보여주는 애정 있는 눈빛을 같이 있는 동안 올리비아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다.
“응. 처음에 동네에서 만났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는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결혼한 건 언제 알았어?”
“미국에 있을 때. 일이 바빠서 가지는 못했고, 나중에 따로 만나서 밥 한 끼 먹었었어. 형이랑 연애 스토리를 꺼내놓으며 얼마나 신났던지.”
피식 웃던 지서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마 그 반지도 두 번째 반지일걸? 잃어버려서 새로 맞췄다는 이야기 들었거든.”
맙소사. 나는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혹시 덜렁거리고 정리 정돈 못 하는 여자가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쩌다 좋아한 여자들이 그런 것뿐이지 취향은 아니거든.”
‘들’이라니……. 거기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설마 너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내가 그 정돈 아니다.”
내가 소심하게 주장해봤지만, 내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형이랑 만났나 보네.”
“올리브유한테 연락 왔어?”
“아니. 형.”
“다행이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지서준이었다. 그런 지서준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안한 감정과 나를 합리화하는 생각들이 서로 충돌했다.
올리브유가 유부녀인 걸 진작 알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초밥을 먹고 나왔던 날, 올리브유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지서준에게 실망했었다. 물론, 버스를 잡아 올라탄 지서준을 보고 바로 잊어버렸지만.
그날도 평소처럼 올리브유는 길을 잃었고, 그녀의 남편은 해외 출장을 가 그녀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올리브유는 열심히 뼈에 있는 살점을 골라내며 그날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길을 잃어 S.O.S를 친 올리브유는 남편에게 많은 잔소리를 들었어야 했다며 입을 삐죽였다.
길 못 찾을 거면 작업실에서 집. 집에서 작업실만 오가라며 크게 혼났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감자를 떨어트린 올리브유는 하얀 원피스에 국물 점을 몇 개 더 추가했다.
“그 형은 너랑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
“응. 두 사람이 연인이기 전부터 형이랑 많이 친했어.”
“그렇구나.”
“사실, 사귀기 전에 형이 날 찾아왔었어. 친한 동생의 전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준 게 꽤 버거웠었나 봐. 나는 이미 올리비아에게 이성의 감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사이는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알고 있어.”
“뭘?”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뭐? 네가 말한 거야?”
“아니. 그날, 너랑 같이 있다가 우연히 올리비아 본 날. 그날 알았대. 딱 봐도 알겠더라나 뭐라나.”
내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올리브유가 알고 있었다니. 은근히 눈치 있는 스타일인가.
“그래서? 뭐래?”
“그럴 줄 알았대.”
“그게 무슨…….”
“올리비아랑 사귈 때도 은연중 언젠간 내가 너에게 가겠다고 생각했대.”
카페 밖에는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습했던 바람이 결국은 비구름을 몰고 왔나 보다.
빗방울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려 비를 피하기 시작했다.
“비 온다.”
“그러네.”
우리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멈추고 퍼붓기 시작하는 소나기를 바라보았다. 한 방울 두 방울로 시작한 비는 어느새 모든 것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느새 빗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풍경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속 한 방울, 두 방울이었던 설렘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적셔버렸다는 것을. 겁쟁이인 나는 나무 밑에 숨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소나기 같은 지서준을 향한 마음을 피했다.
내 마음 곳곳에 지서준이 닿지 않았던 곳이 없다는 것도 모른 채.
실컷 설레어 놓고 외면하고 올리브유를 보고 질투에 눈이 돌아가면서도 모르는척했다.
우리가 사귀다 헤어지면……. 미국으로 유학 가는 거랑은 다르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닌, 만나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리니까.
올리브유가 유부녀라는 사실에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나, 허탈하고 허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우둔했다. 지서준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그가 올리브유를 만나든 말든, 전 여자친구가 몇 명이나 있든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올리브유는 얇디얇은 내 마지막 방어막을 처참히 깨부쉈다.
이제는 모르는 척할 수 없다. 나무 밑에 숨은 나 문다율은 어느새 홀딱 젖어버리고 말았다.
지서준에게.
“야. 지서준.”
“응?”
“우리 사귀자.”
깨달았다면, 직진이지.
감추고 피했던 나의 과거는 이제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