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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지서준과 만난 지 10,309일. 그러나 오늘부터 1일. (34/97)


34화. 지서준과 만난 지 10,309일. 그러나 오늘부터 1일.
2022.10.26.



“내 말 들리니? 응? 듣고 있니?”

사귀자는 말에 지서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나를 보고 있는 지서준은 넋이 나가 있었다.


“취소해?”

“아니!”

기껏 고백했건만,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 지서준에게 섭섭해지려 했으나, 단호한 지서준의 대답에 눈곱만큼 생겼던 섭섭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가, 갑자기?”

너무 뜬금없이 고백했나?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마음만은 절대 가볍지 않은 고백이었다.


“갑자기 아니고……. 이런 말 진짜 하기 싫은데, 올리브유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올리비아는 왜.”

“됐어. 더 이상 알면 다쳐. 아무튼, 그래서 사귈 거야, 말 거야?”

“사귈…… 거야.”

나는 지서준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집에 가자.”

소나기는 소나기였다. 무시무시하게 퍼부을 때는 언제고 비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쳤다.

집으로 가는 길, 지서준은 나를 데려다주면서 몇 번이고 물어왔다.


“너 나 좋아해?”

“응.”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물어왔다.


“우리 사귀는 거 맞지?”

“맞아.”

내가 얼마나 지서준에게 믿음을 안 줬으면 얘가 이러나. 안타까움도 잠시.


“술 먹은 거 아니지? 감자탕 먹을 때 소주 시켰었나?”

내가 눈을 부라리자 지서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 손잡아도 돼?”

귀여운 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힘을 풀었다. 처음 잡는 손도 아닌데, 손도 간질간질, 아랫배도 간질간질, 마음도 간질거렸다.

너 먼저 가라. 아니다. 네가 먼저 들어가라. 아니. 나는 여기 살고 너는 멀리 가야 하니 네가 먼저 가라. 아니다. 너 가는 거 보고 가겠다. 그렇게 우리는 애정의 실랑이를 벌였다.

승자는 지서준. 지서준은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귀여운 놈.


“벌써 왔어?”

“응.”

“문다율. 오다가 돈이라도 주웠어?”

“아니? 왜?”

“그런데 왜 그렇게 실실 쪼개면서 들어와?”

“내가 언제 실실 쪼갰다고.”

나는 엄마의 말에 힘을 줘 입꼬리를 당겨 내렸다.


“밥은!”

“벌써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빨리 씻고 잠이나 자라고 손을 휘휘 젓던 엄마는 마음에 드는 방송 프로그램이 없는지 리모컨 버튼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씻고 나오니 엄마는 TV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저게 저렇게 재밌을까.


“다율이 씻고 나오는 거야?”

“응. 아빠 안 잤네?”

“자다가 네 엄마 웃는 소리에 깼어. 너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

“응.”

나는 깔깔거리며 옆에 앉아 있는 아빠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는 엄마를 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며 화장대에 앉았다. 나는 얼굴에 로션을 찹찹 발라주다가 거울 속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돼서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화장대 모서리,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잽싸게 들어 올렸다.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지서준 이름을 꾹 눌렀다.

익숙한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이 쓰고 있는 기본 신호음. 지금 내게 그 신호음은 설렘 그 자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서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그냥. 전화하면 안 돼?”

-잠깐만.

내가 묻자 지서준이 양해를 구하더니 우르르 탕탕 소리를 냈다.


“뭐해?”

-뭐 좀 만들고 있었어.

“뭐?”

내가 묻자 얼마 전 선물로 들어온 블록을 조립하고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는데, 아직도 블록을 만지작거리는 지서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재밌냐.”

-응.

대답이 아주 단호했다.


-왜 전화했어.

자꾸 용건을 물어보는 지서준에게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전화할 수도 있지. 왜 자꾸 용건을 물어봐. 우리가 이제 뭐 용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인가?”

-그건 아니지만…….

내가 씩씩거리며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찰나 지서준이 말했다.


-나올래?

나는 지서준의 말에 침대에 붙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오피스텔 안 갔어? 지금 본가에 있어?”

-어.

갑자기 콩닥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아이스크림 사주면 나가지.”

핸드폰 너머 지서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개 사줄게. 나와.

나는 잽싸게 이불을 치우고 현관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여전히 드라마에 푹 빠져 있던 엄마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어디 가냐 물었다.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혹시나 엄마가 또 같이 나가자 할까 봐 대답도 듣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지서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빨리 나왔나?”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나는 멋쩍어져 다시 공동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지서준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방금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빨리 나왔네?”

그러자 지서준이 말했다.


“너는 왜 들어갔다 나와?”

젠장.

어쭙잖은 행동으로 도도해 보이고 싶었는데……. 역시 저놈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었다.


“봤어?”

내가 묻자 그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 나는 머쓱해져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우편함에 뭐가 있나 잠깐 보고 왔지.”

내가 말하자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은 흰 반소매 티에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잘생긴 놈은 뭘 입어도 태가 나는구나.


“그 변태 같은 표정은 또 뭐야.”

“어허! 여자친구한테 변태라니! 잘생긴 남자친구 좀 보면 안 되나?”

“너는…….”

말을 하다 만 지서준이 몸을 휙 돌려 큰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긴.

사랑은 직진! 표현은 많이! 그것이 내 연애 방식이었다.

부끄러운 지서준은 참 빨리도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으며 걸어갔다. 상대적으로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거리를 좁혀갔다. 그러다 갑자기 지서준이 걷는 속도를 줄여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많이 빨리 걸어?”

내 발끝만 보던 지서준이 물었다.


“어.”

“네가 천천히 걷는 거 아니고?”

그 말에 내가 발끈했다.


“야. 네 다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내 다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데 어떻게 같은 속도로 걸어!”

“……미안.”

무려 한 뼘이나 넘게 차이가 나는 길이였다. 내가 짚어준 높이를 확인하더니 내 속도에 맞춰 걸음을 늦추는 지서준이었다.


 
큰일이다. 이렇게 귀여운 건 반칙이었다. 내 입꼬리가 또 한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늦춘 지서준의 어깨는 내 어깨와 나란히 선을 맞췄다. 열대야로 여름의 밤은 아직도 후끈대는 열기로 가득했다.

조금 걸었는데도 벌써 땀이 비식비식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앞에 편의점이 보이자 내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살 것 같았다.


“이거랑 이거.”

곧장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냉장고로 돌진한 내가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자 본인은 커피를 골랐는지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계산대에 올렸다.

그러다 뭐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계산 도중 잽싸게 추가한 물티슈를 추가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편의점을 나와 아파트로 향하는 길.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뜯어 빠르게 먹어 치웠다. 그러곤 나머지 하나를 입에 물었다. 저만치 보이는 아파트에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거 다 먹고 들어가야 해.”

“응.”

“우리 앉았다가 들어갈까?”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을 보고 나는 아까부터 점찍어놨던 아파트 벤치에 앉았다. 내 옆에 가만히 앉은 지서준이 커피를 홀짝였다.


“이 밤에 뭔 커피야.”

“단 거 먹기 싫어서.”

나는 지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건 아이스크림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모르는 더위에 빠르게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짜증 나네. 왜 이렇게 빨리 녹는 거야.”

손가락까지 흘러내린 아이스크림 때문에 손이 끈적거렸다. 그러자 지서준이 물티슈를 꺼내 내 입가를 벅벅 닦기 시작했다.


“으! 으으! 왜! 아. 아파!”

“가만히 좀 있어. 넌 지금 손이 문제가 아니야.”

나도 모르는 사이 입에도 잔뜩 묻었는지 지서준이 거칠게 닦아냈다. 내가 이럴까 봐 물티슈를 산 걸까. 한 장으로 겨우 닦아낸 입 주위가 쓰라렸다.


“빨리 나머지 입에 넣어.”

나는 지서준의 말대로 막대기에 대롱대롱 달려 물을 뚝뚝 흘려대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다 넣었다. 그러자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빼앗아 물티슈 옆에 놓더니 내 손마저 벅벅 닦아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지서준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네가 진짜 나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내 말에 내 손을 닦는데 집중했던 지서준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나를 휙 째려봤다.


“왜, 왜!”

얼마나 눈빛이 매섭던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를 많이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이런 꼬질꼬질한 모습은 참을 수 없어서 그래. 됐어?”

꼬, 꼬질?

지서준의 말에 발끈했지만, 내 손 닦기에 열중하는 지서준의 희고 길쭉한 손을 보니 화를 낼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만족할 때까지 벅벅 닦던 지서준이 만족을 했는지 내 손을 풀어주었다.


“좀만 살살 닦지. 쓰라리잖아.”

괜스레 이상한 기분에 툴툴거리며 손바닥으로 약간 얼얼한 입 주위를 톡톡 두드리자 지서준이 내 팔을 잡고 손을 내렸다.


“어디 봐.”

지서준의 얼굴이 다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서준의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지서준은 위험했다.


“아, 안 돼!”

나는 잽싸게 양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러자 지서준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뭐 해?”

“그, 그러니까……. 아직 키스는 좀 그래.”

“키스? 왜?”

왜냐니! 그건 나도 몰라!

갑자기 훅 다가온 지서준의 얼굴에 깜짝 몰라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네가 갑자기 그렇게 다가오니까…….”

“할 생각 없었는데……. 그런데 키스가 그렇게 싫어?”

지서준의 목소리는 낮고, 오싹했다.


“야. 내가 싫다는 게 아니고…….”

내 말에 땅만 쳐다보던 지서준이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렇다고, 또 하자는 건 아니고…….”

내 말에 여전히 잘난 얼굴에 마구 주름을 잡은 지서준이 말했다.


“그럼, 키스 말고 다른 건 돼?”

“다른 거?”

‘쪽.’

말캉하고 보드라운 커피 향을 머금은 무언가가 빠르게 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

‘쪽.’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와 닿은 지서준의 입술.


“왜. 키스 말고는 된다며.”

“내, 내가 언제!”

“그래. 키스는 나중에 하자.”

씩 웃은 지서준이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등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사랑은 직진! 표현은 많이! 내 연애 방식은 지서준의 아찔한 도발에 맥을 쓰지 못했다.

나는 거의 뛰다시피 지서준의 뒤를 따랐다. 금방 도착한 아파트 앞. 나는 부끄러워 지서준 쪽은 쳐다도 보지 못하고 현관문 앞에 섰다.


“안 가?”

공동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가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지서준이 보였다.


“너 먼저 들어가.”

지서준의 손에는 물티슈와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쓰레기를 들고 있어도 참 멋있는 놈. 그 모습이 조금은 아니꼬워도 사람 눈길을 잡아 놓기에는 충분했다.


“더 있다가 들어갈까?”

쓰레기를 들고 가로등 밑에 있는 그 모습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단호박 먹었네? 뭐가 그렇게 단호하냐?”

너무나 단호하게 “아니.”라 말하는 지서준. 내가 툴툴거리자 지서준이 싱긋 웃었다.


“같이 있으면 만지고 싶은데. 만져도 돼?”

“아니!”

“단호박은 네가 먹었네. 빨리 들어가라.”

나는 아직도 쓸데없이 멋있는 지서준을 두고 재빨리 비밀번호를 눌러 아파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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