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여행 가자.
(35/97)
35화. 여행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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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여행 가자.
2022.10.30.
나는 왜, 그동안 그렇게 걱정했던가. 역시 사서 하는 걱정이 제일 쓸데없었다.
친구 지서준도 좋지만, 남자친구 지서준이 더 좋은걸, 이렇게 좋은 걸 몰랐다니.
회사 출근하는 길. 나를 회사에 데려다주기 위해 아침부터 일찍 차를 끌고 집 앞까지 온 지서준은 오늘도 역시나 잘생겼다.
“너는 회사에 걸어갈 수 있으면서, 뭐 하러 여기까지 데리러 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너 피곤하잖아.”
“그렇게 좋아하면서 말하면 그 말이 안 믿기는데…….”
내가 너무 좋아했나?
물론, 출근길 사람들이 꽉 찬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은 너무나 좋았으나, 굳이 회사 근처에 사는 지서준이 우리 집까지 데리러 오는 건 여러모로 낭비였다.
“가끔, 아주 가끔만 카풀 해줘.”
지서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사 끝나고 뭐 해?”
“나, 오늘 지방 연구소에 다녀와야 해서, 조금 늦게 서울에 도착할 것 같은데?”
젠장.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 했는데…….
“만나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라.”
가방을 쥐고 있는 내 손을 가져가 지서준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뭐, 뭐야…….”
부끄러운 마음에 지서준의 손에서 냉큼 내 손을 빼 오려 했지만, 지서준이 손가락 하나하나 얽어 꼭 쥐는 바람에 도로 지서준의 손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원래 이런 건가?”
“뭐가?”
“사귀고 나면 조급한 마음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왜 더 조급해지지?”
지서준은 계속해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가 조급해?”
“만나고 있어도 만나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네.”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정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지서준이 맞는 걸까. 지서준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너, 누구야.”
지서준이 내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아는 지서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잡혀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지서준의 턱부위를 쓰다듬었다.
“가면을 쓴 건 아닌데…….”
내 말에 한숨을 푹 내쉰 지서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뒤 곧바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보다 나는 꽤 다정해. 표현이 조금 어설플지는 몰라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
지서준이 퉁퉁거려도 사람 잘 챙기고 정 많은 스타일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친구 지서준 말고, 남자친구 지서준은 앞으로 네가 알던 나랑 조금 다를 거야.”
지서준의 말에 발꿈치가 들썩거렸다. 붕 떠 있는 느낌. 갑자기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기대할게.”
내 말에 픽 웃는 지서준이 다시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래.”
**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모든 세포가 활성화된 느낌. 커피 50잔은 들이켠 것과 같은 효과에 회사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나는 피곤한 줄 몰랐다.
“문 대리. 지금 하는 일 괜찮으면 잠깐 나 좀 봐도 될까요?”
“네? 네!”
아무리 피곤한 줄 모르는 연애 세포 각성으로 인한 무적의 상태임에도 팀장님의 부름은 긴장됐다.
“커피?”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내 거 하면서 하는 건데, 뭐.”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씩 손에 들고 비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 대리. 앉아요.”
팀장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가 오늘 할 말은 대단한 건 아니고……. 뭐. 특별한 일 없죠?”
팀장님의 말에 뜨끔했지만, 잽싸게 표정 관리를 한 후 씩 웃어 보였다.
“그럼요. 특별한 일은요. 없어요. 그런 거. 하하.”
나는 내 어색함을 팀장님에게 들킬까 봐 컵에 고개를 박고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그럼 다행이고. 아! 호주에 갈 사람 정해졌어요.”
“그래요?”
“흔치 않은 기회다 보니까 지원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다행이네요.”
“아쉽진 않아요?”
나는 팀장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전히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지서준을 두고 어디를 가나.
제안받고 거절할 때, 지서준과는 유예 기간을 가지는 중이긴 했지만,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팀장님에게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좋은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 같아 속상한 마음도 들었는데, 지금은 과거의 나를 칭찬하고 싶었다.
“네. 아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팀장님 밑에서 열심히 일 배우고, 몇 년 뒤에 과장 달아야죠.”
“아부는 안 해도 되는데.”
“아부 아닙니다.”
내가 불끈 주먹을 쥐고 단호히 말하자 팀장님이 피식 웃어 보이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요즘 회사에서 이러쿵저러쿵 문 대리 가지고 떠들어대는 거 알고 있어요.”
“아. 네…….”
“회사 사람들이 남 일에 관심도 많고 떠드는 것도 좋아하고 그래요.”
“네. 알고 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문 대리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느새 또 잊힐 겁니다.”
평소 조금 무뚝뚝했던 팀장님이 이런 말을 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백인하 씨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수도 잦아요. 그러니 문 대리가 조금 더 신경 써주고.”
“네. 팀장님.”
“그래요. 오늘의 잔소리는 여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난 팀장님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백인하 씨가 의자를 쭉 밀어 내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팀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인하 씨는 궁금한 것도 많다.”
“헤헤. 비밀이에요?”
“비밀은 아니고……. 그냥 별말씀 안 하셨어요.”
눈치가 빠삭한 백인하 씨는 내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곤 금방 화제를 돌렸다.
“대리님. 대리님은 휴가 언제 쓰실 거예요?”
백인하 씨의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왜 여름휴가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여름휴가는 회사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거늘. 가뭄의 단비 같은 여름휴가에 대한 계획을 조금도 짜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인하 씨는 언제 가요?”
“저는 저번에 해외여행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대리님은요?”
작년에는 혼자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 올해는, 혼자 여행은 할 필요가 없으니 새로운 여행계획을 짜야 했다.
“저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겠어요.”
나는 백인하 씨를 향해 활짝 웃었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빠르게 일을 마쳤는데도 나는 정시에 퇴근하지 못했다. 이 죽일 놈의 일은 왜 하필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생기는지. 조금 늦은 퇴근, 백인하 씨와 간단히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동네 정류장에서 내려 늘 가던 편의점을 지나쳐 아파트 앞 상가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얼음이 가득 든 유리컵에 담긴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마신 나는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1. 호캉스. 2. 강원도 놀러 가기. 3. 제주도. 4. 남해.]
지서준과 가고 싶은 곳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던 나는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화들짝 놀랐다. 도이라였다.
“무슨 일이야.”
-야! 너는 메신저로 너 연애한다고 틱 올려놓고 사라지면 어떡해!
그랬었나.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랬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다 정류장에서 도이라와 고주연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나, 연애함.]이라고 써놓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었다.
그 뒤, 여름휴가 생각에 빠져 메신저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 끝나자마자 전화하는 거야. 이 자식아.
“하하. 아. 미안.”
-결국, 둘이 사귀는구나.
“응. 사귄다. 우리.”
-좋냐?
“좋다.”
내 대답에 발랄하게 웃던 도이라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엄청 망설였잖아.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을 잡은 거야? 뭔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일…….”
-설마.
“설마?”
-너희 둘이 또 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다시 메모장을 훑기 시작했다.
“다 하고 싶네. 다 하고 싶어.”
다시 걸려 온 전화.
-야! 전화가 끊어졌어.
“내가 끊은 거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지, 아니면 벌써 집에 도착해서 자기 혼자 있는 건지, 도이라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욕할 거면 메시지로 보내줄래? 천천히 읽어볼게. 나 지금 할 일 있어서 그래.”
-너 퇴근 안 했어?
“했는데, 나 지금 여름휴가 계획 짜느라 바빠.”
지서준과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나의 말에 갑자기 신이 난 도이라가 캠핑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즘 캠핑이 대세다. 우리 나이 되니까 자연이 좋다. 8월 말에 가면 그렇게 덥지도 않으니 아주 좋다. 내가 간다고 하면 장비도 빌려주겠다.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하는 도이라의 직업은 쇼핑호스트였다.
이 여자, 물건 파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왜 도이라가 막 뜨기 시작한 쇼핑호스트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가볼까?”
도이라의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경치 좋은 캠핑장’을 검색하고 있었다.
**
사귀고 난 뒤 지서준은 갑자기 일복이 터졌다. 그런 복은 안 줘도 되는데. 그나마 조금 일찍 퇴근한 날, 지서준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차에 올라타니,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 지서준이 따뜻한 민트 티 한 잔을 건넸다.
“그냥 집에서 쉬지.”
“그냥 쉬는 것보다 네 얼굴 잠깐이라도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얼굴도 예쁜 놈이 말도 예쁘게 한다.
“지서준.”
“응.”
“우리 여행 갈래?”
“여행?”
“응. 너랑 나. 둘이.”
그 말을 뱉자 지서준의 귀 끝이 붉게 올라왔다.
“여행 가자는데 왜 귀가 빨개지는 거야?”
내 말에 귀를 벅벅 문지르던 지서준이 말했다.
“내, 내가 언제.”
귀엽긴.
나는 가방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지서준에게 들이밀었다.
“자. 봐. 빨개졌지?”
내 손에서 손거울을 휙 낚아채 간 지서준이 본인의 양 귀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귀 끝을 가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여행 가자고. 여행.”
“무슨 생각을 하게끔 네가 말했잖아.”
작게 투덜거리는 지서준. 그 모습에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나 여행 가고 싶어.”
“어디로…….”
여전히 귀에서 손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캠핑! 캠핑 가고 싶어.”
“캠핑?”
내 말에 지서준의 미간이 꼬깃꼬깃 구겨졌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지금 가면 더위에 벌레에……. 그냥 호텔이나 펜션 잡아서 놀러 가.”
평소 벌레라면 질색하는 지서준이었다.
“모기향 펴놓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너, 캠핑해 본 적은 있어? 그거 쉽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지서준은 귀 끝에서 손을 내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회유하겠다는 몸짓이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설득했다.
“장비는? 장비는 다 어디서 구해?”
“요즘 대여된대. 도이라도 있고 또…….”
점점 작아지는 내 목소리.
“요즘 캠핑 붐이라던데, 주말에 캠핑장 예약하는 건 쉬운 일이고?”
그 뒤로는 주야장천 왜 캠핑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늘어놓는 지서준이었다.
“안 가.”
“뭐?”
“안 간다고. 여행.”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지서준이 아찔하게 솟은 코를 긁적였다.
“아니……. 꼭 안 된다는 건 아니고…….”
지금까지 안 된다고 했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진짜로 내가 안 갈 것 같은지 바로 꼬리를 내린 지서준이었다.
“그럼, 가도 돼?”
나는 견고했던 지서준의 벽이 살짝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서준과 함께 보낸 세월이 준 경험치였다. 나는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 뜨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휴가 맞춰서 내. 그래서 하루는 캠핑, 하루는 리조트나 호텔 잡아. 그렇게 안 하면 나도 양보 못 해.”
예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단둘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