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거추장스럽게. (36/97)


36화. 거추장스럽게.
2022.11.02.


오늘 지서준과 만난 이유는, 내일 휴가 가기 전 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빼.”

“안 돼.”

“빼.”

“안된다니까.”

카트에 가득 담긴 물건을 팔짱 끼고 바라보던 지서준이 말했다.


“이거는 왜 필요한 거야?”

지서준이 들어 올린 물건은 샐러드 모둠 채소였다.


“샐러드 먹으려고.”

“너 샐러드 안 먹잖아.”

“먹을 거야.”

“그럼 이건 뭔데.”

다음 지서준이 든 물건은 전기 파리채였다.


“너 벌레 싫어하잖아. 그래서 담은 거지.”

“그럼 이건.”

“고구마랑 감자는 구워 먹어야지.”

“이 더위에?”

“어차피 고기 구우려면 불 피워야 하잖아.”

“그럼 휴대용 버너는 어디에 쓸 건데?”

“라면?”

“우리 거기 1박 2일 가는 거 아니야?”

1박 2일 여행치고 꽤 많은 양의 먹거리였다. 나는 지서준의 눈치를 보며 과자 3봉지를 꺼냈다.


“됐지?”

나는 여전히 단호한 지서준의 표정을 보며 다시 카트에 든 냉면 밀키트를 꺼냈다.


“더는 안 돼.”

내 말에 한숨을 푹 내쉰 지서준이 내 손에 든 봉지와 냉면 밀키트를 다시 카트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카트를 끌어 계산대로 가지고 가는 지서준이었다.


“이거 다 사도 돼?”

“남으면 네가 다 가져가.”

“알았어!”

지서준의 차에는 오늘 장 본 것들과 미리 빌려놓은 캠핑 장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냉장고에 넣을 것들 잊지 말고 가서 넣어야 해. 알겠지?”

내가 당부하자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이 트렁크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장 본 것들을 대충 넣은 탓일까. 무언가 센서에 걸렸는지 다시 트렁크 문이 열렸다.

범인은 전기 파리채. 안쪽으로 휙 집어 던지니 트렁크 문이 닫혔다.


“빠진 거 없지?”

“응. 모자라면 캠핑장에 있는 매점 가면 되지 않을까? 거기 없는 것 빼고 다 있대.”

“이걸로도 모자란다고?”

나는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은 지서준의 표정에 잽싸게 발을 뺐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나 먼저 집에 간다. 너도 조심히 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어 지서준에게 인사했다. 그러곤 마구 달려 우리 집으로 향했다.


“천천히 가! 넘어지지 말고!”

뒤에서 지서준이 소리쳤다.


 

**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전날 바리바리 싸놓은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누구랑 가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엄마를 따돌리느라 힘 좀 써야 했다.


-나왔어?

“응. 여기 아파트 후문 쪽, 근린공원 앞.”

혹여나 엄마나 아빠, 지서준의 부모님이 볼까 일부러 차가 덜 다니는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다 와 가.

“응.”

전화를 끊고 얼마 안 기다렸을 때, 저쪽에서 지서준의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짐은 또 다 뭐야.”

“네가 여자의 짐을 알아?”

내 짐을 보더니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노골적 표정을 보인 후 내 짐을 차에 실었다. 드디어 차가 출발하고,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놀러 가는 기분이 물씬 풍겼다.


“아. 좋다. 회사 안 가는 게 제일 좋아.”

내 말에 앞만 바라보며 운전하던 지서준이 피식 웃었다.


“학교에서 회사로 바뀌었네.”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꽤 즐거운 분위기로 목적지까지 향했다. 휴게소에 들러 지서준의 차를 충전시키는 동안 간단히 식사도 했다.

점점 푸르러지는 풍경에 창문을 열었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점점 산속으로 들어가니 서울보다 시원한 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진짜 좋다.”

“그러네.”

캠핑에 회의적이었던 지서준의 말에 어깨가 으쓱했다. 도이라가 강력하게 추천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잣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캠핑장은 외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유명한 캠핑장이라 접수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린다는 도이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관리소에 다가가자 안내받으려 기다리는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꽤 길게 늘어져 있는 차량의 끄트머리에 우리가 있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줄이 장난 아니네.”

내가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어 밖에 상황을 살폈다. 그러자 지서준이 내 옷을 끌어당겨 나를 앉혔다.


“나뭇가지에 얼굴 긁혀. 얌전히 있어.”

걱정은…….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다시 창문을 닫았다.

생각보다 우리 차례가 빨리 다가왔다. 이것저것 주의해야 할 사항을 듣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세울 사이트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려 트렁크를 여니 어제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아주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두 지서준의 작품이었다.


“여기 시원해서 모기 많이 없겠다.”

나는 짐들 한쪽에 고이 세워져 있는 전기 파리채에 건전지를 넣었다. 불이 잘 들어오나 확인하며 휭휭 휘둘렀다.


“텐트 치는 거나 도와주지?”

언제 텐트를 내렸는지 지서준이 텐트를 펼쳐놓고 설명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내가 또 열심히 공부해왔지. 나만 믿어.”

여전히 설명서를 보고 있는 지서준. 그 옆으로 가 쪼그려 앉으며 지서준의 귀에 소곤거렸다.


“내 말 들리니?”

“야!”

지서준이 귀를 막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인상을 쓰고 귀를 벅벅 문질렀다.


“내 말이 들리긴 하는구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지서준의 손에서 설명서를 빼앗았다.


“나만 믿어. 나 믿지?”

그렇게 나는 자신만만하게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먼저, 텐트를 치는 도구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거 맞아?”

“아마?”

하지만, 아니었다.


“이거 아니야.”

“그래. 그게 맞나 보다.”

뭔 놈의 폴대가 이렇게 많은지. 나름 초보자가 치기 쉬운 텐트라기에 빌렸건만, 초보자의 기준이 뭔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이건가? 아니, 이건가? 어디가 앞이지?”

반대편에서 잡아주고 있던 지서준이 결국은 폭발했다.


“설명서 내놔.”

“나 공부했는데?”

내 말을 사뿐히 무시해주고는 한쪽에 치워둔 설명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던 지서준.

그리고 정확히 21분 만에 번듯하게 텐트가 세워졌다.


“역시. 이과생.”

그 후로, 세팅의 모든 지시 권한이 지서준에게 넘어갔다. 텐트가 완성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나는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야. 나 왜 힘드냐.”

“그건, 저기다 둬.”

“여기?”

“응. 거기.”

뭔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왜 여기서 떠오르는지.


“아. 그것 좀 차에서 가져와. 이건 가져다 놓고.”

테이블 하나 조립하면서 참 이것저것 많이 시키는 지서준이었다. 마지막 짐까지 나르고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지서준 옆에 앉았다.


“캠핑이 생각보다 괜찮네.”

지서준의 말에 반박할 힘도 없어 널브러져 있을 때 내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맥주 마실래?”

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양 입꼬리를 올린 지서준이 시원한 맥주 캔을 따 내게 건넸다.

꿀꺽꿀꺽.


“하……. 이제야 살 것 같다.”

내 말에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이제 좀 살 것 같으면 안에 뭐 좀 깔아놔.”

“뭐?”

지서준의 말에 텐트 안을 보니 마구 던져놓은 짐들이 있었다.


“못 해. 나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겠어.”

“전구 달고 뭐 하고 한다며. 감성 타령하더니, 감성 캠핑 어디 갔어.”

“내 인생에서 감성은 사치야. 필요 없어.”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예쁘게 조립한 테이블 위에 맥주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텐트 안으로 들어간 지서준이 이것저것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의자를 돌려 앉아 지서준이 하는 것을 쳐다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다 잠깐 지서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의자에서 슬쩍 일어나 나와 지서준의 침낭 사이에 짐가방을 슬쩍 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다시 앉아 모르는 척 맥주를 마셨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지서준이 침낭 사이에 짐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놓은 짐가방을 휙 집어던졌다.


“거추장스럽게.”

텐트 구석, 내 짐가방이 나동그라졌다.

**



“배고파.”

예정보다 빠르게 정리했으니 산책이라도 하며 캠핑장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배고픔에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먹을까?”

나는 아이스박스를 뒤적이며 묻자 지서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음식 재료를 보았다.


“뭐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

“응.”

역시 똑똑한 놈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한차례 식료품을 쭉 훑은 지서준이 말했다.


“뭔 재료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들인 거야.”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내가 골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먹고 싶은 것을 다 때려 넣었던 기억만 있었다.


“더우니까 간단하게 냉면 밀키트 해 먹자.”

“응!”

그 후로 지서준의 움직임에는 막힘이 없었다. 물론 물 넣고 면만 끓이면 되긴 했지만, 달걀을 삶고 그 위에 예쁜 고명까지 올리니 꼭 시중에 파는 냉면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냉면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는 가족 단위로 캠핑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계곡에 들어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우리 둘이 수영장 갔던 거 기억나?”

“…….”

말없이 냉면만 먹는 지서준.


“선크림 안 발랐다가 등 다 까져서, 며칠은 제대로 눕지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너는 멀쩡한 거야.”

분명 같이 놀았거늘, 나는 따끔거려 제대로 잠도 못 잤는데 지서준은 멀쩡히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는 의아했던 기억이 있었다.


“지 혼자 바른 거였어.”

여전히 냉면에만 집중하는 지서준이었다.


“나중에 알고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지.”

나는 이제 면은 거의 안 남고 국물만 가득한 내 그릇을 보며 젓가락으로 국물을 휘저었다.


“뭐. 그러고 나서 미안했는지 돼지 저금통 털어서 화상 연고 사다 줬지만.”

여전히 무반응의 지서준을 보고 발끝을 살짝 쳤다. 그제야 날 보는 지서준.


“뭐라고 말 좀 해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전날 나 장염 걸렸는데도 억지로 끌고 갔던 날 말하는 거야?”

“……그, 그랬나?”

갑작스러운 새로운 과거 사실에 멋쩍어졌다.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지사제 먹고 겨우 따라갔더니, 너 혼자 떡볶이 먹고 배불러서 엎드려서 낮잠까지 잔 날 말하는 거지?”

어쩜. 기억이 달라도 이렇게 달랐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였다. 그때 어른들이 바빠 수영장을 함께 가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무 가고 싶은 마음에 혼자 갈 용기는 없고 지서준을 졸랐었다.

가기 싫어하던 지서준을 끌고 집 근처 수영장에 갔던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놀았었다.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가끔 나에게 공을 던져주던 무심한 표정의 지서준이었다.

너무 재밌었던 기억과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나와 놀아주던 지서준, 따끔했던 등만이 선명했던 기억의 이면에 그런 비하인드가 숨겨져 있었다니.

지서준이 어색하게 웃는 날 보더니 피식 웃고는 국물만 남은 내 냉면 그릇에 면을 덜어주었다.


“천천히 먹어.”

착해 빠져서는…….

나는 지서준이 건넨 면을 후루룩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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