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달빛,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별. (37/97)


37화. 달빛,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별.
2022.11.06.


계곡에서 가까운 곳에 텐트를 쳐서 그런지 물소리와 아이들 노는 소리가 꽤 가깝게 들려왔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이 되었다. 같이 계곡에 가자는 제안을 산뜻하게 거절당했다. 혼자 발이라도 담가볼 요량으로 계곡에 내려갔다.

흠뻑 젖어 입술이 파래지도록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발을 담갔다가 화들짝 놀라 뛰쳐나와야 했다.


“엄마. 깜짝이야!”

파닥거리며 뛰어나온 나는 볕에 달궈진 돌 위로 껑충 올라섰다. 내 모습에 가까이 있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웃음 지었다.

이렇게 차가운 얼음물에서 놀고 있다니. 새삼 아이들이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에서 나와도 아직 차가운 발을 끌고 텐트로 돌아오니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지서준이 보였다.


“너는 여기까지 와서 책 보는 거야?”

“이런 곳에 왔기 때문에 보는 거야.”

지서준은 책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계곡에서 발 담그고 논다더니, 왜 이렇게 빨리 와?”

“거기서 놀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내가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가 차가운 발을 조몰락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픽 웃던 지서준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내일 어디로 가는지 말 안 해줄 거야?”

캠핑장은 내가 예약했지만, 다음 날 머물게 될 숙소는 지서준이 예약했다. 어디 예약했는지 물어봐도 그저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지서준이었다.


“내일 가보면 알아.”

“불안하게…….”

 

 
왜 저 녀석이 입을 꾹 다물면 불안해지는지……. 나는 갑자기 심술이 생겨 내 차가운 발을 지서준의 반들반들한 맨다리에 착하고 붙였다.


“야!”

갑자기 차가운 발이 몸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란 지서준이 벌떡 일어났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

내가 한 번 더 내 발을 붙이려 짧은 다리를 쭉 뻗어 봤지만 이미 충분히 거리를 벌린 지서준이 다시 질겁하며 피해버렸다.

이렇게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어렸을 때처럼 놀아본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남들과 있을 때는 불편해하는 지서준과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사람들은 그런 불만을 나에게 터트리고는 했는데, 꽤 질이 안 좋은 말과 행동들도 많았다.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혼자 울며 집에 돌아간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둘만 있을 때는 그런 걱정 없이 마음껏 놀 수 있었는데, 그걸 잠깐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지서준, 그 책 재밌어?”

“응.”

“지서준, 뭐 먹을래? 아니면 마실 거라도 줄까?”

내가 계속 옆에서 말을 걸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책을 덮었다.


“계속 책 보지 왜.”

나는 과자 한 봉지를 뜯어 손가락 하나하나 걸어 입에 넣었다.


“이 상황에서 집중할 수 있겠어?”

그러더니 멀쩡한 의자 놔두고 내 옆에 철퍼덕 앉았다.


“더워. 다시 의자로 가.”

내가 지서준의 단단한 몸을 어깨로 툭 쳐봤지만, 지서준은 끄떡없이 버텨냈다. 그러더니 내 손가락에 있는 과자 하나를 쑥 뽑아가 제 입에 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왜.”

“과자가 엄청 짠데?”

“……원래 짠 과자야.”

“정말이야?”

지서준이 책을 보게 내버려 둘 걸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알록달록한 공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오더니 비어 있는 의자를 툭 치며 멈췄다.

한 7살? 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보다 작은 여동생을 데리고 쪼르르 달려와 공을 집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작은 아이의 예의 바름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응. 괜찮아.”

내가 답하자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려는 남자아이의 손을 여자아이가 잡아당겼다.


“오빠, 나도 과자.”

“엄마한테 달라고 하자.”

“아니. 저거.”

그러더니 내 손가락에 있는 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는 좀 위생에 안 좋은데……. 이거 먹을래?”

지서준이 내 옆에 있던 과자 봉지를 가져가더니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위생에 안 좋다니…….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한 거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손을 내미는 여자아이의 작은 열 손가락에 하나하나 과자를 끼워주는 지서준의 모습에 그냥 속으로 삼켜야 했다.


“오빠도 줄까?”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남자아이에게 내가 묻자 자기 손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 나이대에 깔끔 떠는 모습을 보니 어린 지서준이 생각났다. 내 옆에 앉아 예쁜 것만 골라 열심히 손가락에 과자를 올려놓는 지서준도 그랬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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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아. 자. 사과 먹어.”

 
책을 읽는 어린 지서준에게 아주머니가 예쁘게 깎은 사과를 포크에 찍어 건넸다. 그러나 책을 읽는데 집중한 지서준이 받지 않자 입 쪽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작게 입을 열어 야금 먹는 지서준.
 


“얘는 책 읽을 때 꼭 저렇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줌마는 지서준이 깨작깨작 먹기 편하게 사과를 더 작게 잘랐다. 지서준이 사과를 다 먹자 아줌마가 옆에 앉아 TV로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내게 사과를 건넸다.
 


“다율이도 이거 먹어.”


“네.”

 
나는 아줌마가 건넨 사과를 받아 한입에 넣고 다시 포크를 아줌마에게 돌려줬다. 내게 포크를 받아든 아줌마는 작게 자른 사과를 포크에 찍어 지서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때.
 


“안 먹어요.”

 
지서준이 말했다.
 


“왜? 아까는 잘 먹더니.”

 
아줌마가 고개를 갸웃하자, 지서준이 책을 ‘탁’ 덮었다. 그 소리에 만화 영화를 보던 나도 고개를 돌려 지서준을 바라봤다.
 


“문다율이 먹던 포크잖아요!”

 
그러고는 읽던 책을 들고 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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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다. 어린 지서준은 참, 깔끔하고 싹수도 없었다.

내가 과거 회상에서 빠져나왔을 때, 마침내 여자아이의 손가락에는 과자가 전부 올라갔다.


“오빠 이것 봐라.”

제 오빠에게 자랑하더니 까치발을 올려 비어 있던 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모습에 지서준이 살며시 웃었다.


“오빠도 먹고 싶으면 말해. 손 닦고 먹으면 되지.”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공을 내려놓았다. 나는 생수를 아이의 손에 부었고, 고사리 같은 손을 제법 야무지게 놀려 뽀득뽀득 닦았다.

내가 과자 봉지에 손을 넣고 손가락에 끼워주려 했지만, 남자아이는 한사코 거절하더니 스스로 하나씩 끼워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이리 흥미진진한지.

이미 한쪽 손에 끼워져 있는 과자 때문에 다른 손에 끼우는 것이 힘들어 집중하는 아이의 모습을 나와 지서준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하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다 됐다!”

아이는 해냈다. 과자를 모두 손에 끼어 손바닥을 쫙 펴고 자랑했다. 방긋 웃으며 과자를 먹고 있는 남매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 여기 있었어? 아, 죄송합니다. 아이고, 과자까지 얻어먹은 거야?”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들을 찾다 우리 의자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더니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니요. 쉬러 오셨는데 괜히……. 빨리 일어나 얘들아.”

아이들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흔들며 가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한 후 아직도 옆에 딱 붙어 있는 지서준에게 말했다.


“너 은근히 애들 잘 본다.”

“갓난아이 아니고는 별로 어렵지 않아. 수준이 딱 누구랑 같아서, 익숙해.”

놀러 와서까지 싸우고 싶지 않은데……. 내가 주먹을 꽉 움켜쥐자 자리에서 슬쩍 일어난 지서준이 말했다.


“고기 먹을래?”

주먹에 들어간 힘이 스르르 풀렸다. 숯불에 고기, 그 조합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가 고개를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자 지서준이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캠핑 좋네.”

상쾌한 공기,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나무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 그리고 숯불 향과 고기.

그것들이 어우러져 환상의 맛을 뽐냈다. 평소보다 맛있는 고기에 적당한 음주. 최고였다.


“맛있지? 캠핑 오길 잘했지?”

내 말에 고기를 뒤집는 지서준이 미간을 좁히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연기가 미인한테만 간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네.”

내 말에 단번에 가자미 눈을 만들어 나를 노려봤지만, 눈을 찌르는 연기에 지서준은 다시 눈에 힘을 풀어야 했다. 나는 궁둥이를 붙이고 의자를 들어 지서준의 옆에 찰싹 붙어 선풍기로 연기를 돌렸다.


“다음에는 기름이 덜 떨어지는 담백한 소고기를 굽자.”

“다음에는 그냥 휴대용 버너 켜.”

나는 지서준의 말에 히죽 웃었다.

다음은 절대 없을 것 같이 굴더니, 그래도 캠핑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닌가 보다.

고기를 다 먹어 치우고 남은 숯 위에 장작을 더했다. 바싹 마른 장작은 금세 타올랐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모닥불을 보니 저절로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지서준.”

“응.”

옆자리 지서준도 그저 멍하니 모닥불만 보고 있었다.


“지서준.”

“왜.”

“오늘 즐거웠어?”

“응.”

앞으로 길게 뻗은 발을 까닥이는 지서준. 나는 그런 지서준의 발에 내 발을 까닥이며 툭툭 쳤다.


“다행이다.”

“너는?”

“나도 좋았지. 그래서 또 오고 싶어.”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데 생각보다 별이 많지 않았다.


“왜 별이 없냐. 불이 너무 밝아서 그런가?”

내 말에 지서준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원래 달빛이 밝으면 별이 잘 안 보여.”

“그렇구나.”

지서준의 말대로 오늘은 유달리 달빛이 환했다. 환하게 빛나는 달빛은 그 주변의 어둠을 빨아먹었다.

문득 저 뽀얀 빛을 내 뿜는 달이 지서준이고 그 주위 이름 모를 수많은 별 중 하나가 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에 가려진 이름 모를 별. 그 별을 달이 품으려 했다. 별은 그 눈부심에 도망가고 싶었지만, 모순되게도 그 눈부심에 끌려버렸다.


“다음에는 어디 가고 싶은데?”

지서준이 물었다.

그 말에 나는 도이라가 몇 군데 추천해줬던 캠핑장을 지서준에게 보여주었다.

바다가 보이는 곳, 뷰는 별로 좋지 않지만 한적해서 좋은 곳, 산세가 좋은 곳, 저수지가 보이는 곳 등 꽤 많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턱에 손을 대고 내 핸드폰 안에 사진만 보던 지서준이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또 나왔다.

낯선 눈빛.

하지만, 이제 점점 익숙해지는 그 눈빛. 그리고 그 눈빛이 오늘 본 찬란한 달빛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달빛 가운데, 문다율이 있었다.


“나랑 같이 가.”

지서준이 말했다.

빨려들 것 같은 눈빛에 사로잡혔다. 어느새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지서준을 바라봤다.

‘탁.’

무언가 지서준의 예쁜 이마에 턱하고 달라붙을 때까지 내가 숨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거 뭐야.”

지서준이 이마에 달라붙은 무언가를 만지기 위해 손을 들었다.


“만지지 마.”

“왜.”

“벌레야.”

벌떡 일어나 마구 머리를 털어대는 지서준. 지서준의 호들갑에 이름 모를 벌레는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갔어? 갔냐고.”

“응. 갔어.”

거칠게 이마를 닦아대던 지서준이 말했다.


“그냥 캠핑 너 혼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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