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마음을 확인한 밤.
(39/97)
39화. 마음을 확인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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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마음을 확인한 밤.
2022.11.13.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떠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지서준의 한마디가 훅하고 밀려왔다. 찰싹찰싹 모래알을 때리는 파도처럼 지서준의 말도 내 심장을 찰싹하고 때렸다.
“……그러든가.”
내 말에 지서준이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잔과 테이블의 표면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그냥 한 잔 더 마시자고 할 걸 그랬나. 후회하는 마음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을 때 지서준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문문.”
나는 뻣뻣한 목을 들어 겨우 지서준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염을 머금은 지서준의 눈이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데 지서준이 내 허리에 한 손을 감았다.
“와인, 더 마실 거야?”
조금은 잠긴 듯한 지서준의 목소리.
“……아니.”
내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지서준이 내 손에 있는 와인잔을 빼앗아 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지서준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엎지르면 안 되니까.”
지서준이 내려놓은 내 와인잔을 바라보던 나는 지서준 손에 천천히 고개가 돌려졌다. 지서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지서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살며시 닿은 말캉하고 보드라운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지서준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보면 나도 부끄러운데, 눈 감아 주면 안 되나?”
조금은 잠긴 지서준의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눈을 감자 지서준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거친 숨결이 아찔한 소리와 뒤섞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주저앉고 싶었으나 온몸을 옭아맨 지서준의 단단한 팔에 갇혀 그나마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 닿는 지서준의 손길은 뜨겁기만 했다.
**
“일어난 거 다 아니까, 그만 눈 뜨지?”
모르는 척 좀 해주지.
무슨 일인지 오늘 아침은 지서준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여름의 해는 부지런했다. 커튼 사이 눈 부신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늘은 그때와 다르게 놀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지서준과 함께했던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옷이 그때와 겹쳐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달랐다. 왜냐하면, 내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잔잔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기분 좋은 피곤함에 얼굴에 웃음을 지어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나에게 바짝 붙어 있는 지서준을 보았다.
잘생겼네.
반듯하고 적당히 짙은 눈썹. 예쁘게 벌어진 두 눈썹 사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고 있었다. 손으로 꾹 눌러 펴주고 싶었지만, 그럼 잠에서 깨어날 테니까 포기.
적당한 크기의 눈. 요즘은 그 눈으로 참 여러 감정을 담아내는 지서준이었다. 그 감정이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도 좋았다.
반듯하고 오뚝한 코. 사실 지서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
그 코를 지나 내가 어젯밤 가만 놔두지 않아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 다시 쭉쭉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생각하기도 싫다.
내가 생각보다 지서준 얼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입가에 미소 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지서준이 미간에 주름을 더욱 짙게 잡으며 꿈틀댔다.
지서준이 깨어났다.
나는 서둘러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
몸을 잠깐 뒤척이던 지서준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 하는 거지?
무척 궁금했지만, 여기서 눈을 뜰 용기가 나지 않아 그제 자는 척 고른 숨을 내뱉었다.
그때 지서준이 말한 것이다.
자는 척하지 말라고.
내가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한쪽 팔로 작은 머리통을 지탱하며 나를 내려보고 있는 지서준이 보였다.
나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아찔하다, 아찔해.
지서준이 ‘픽’하고 웃더니 내 이마로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 내 앞머리가 지서준의 바람에 마구 흔들렸다.
“일어나. 배 안 고파?”
“고파.”
나는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안 일어날 거야? 그럼 나는 더 좋고.”
지서준의 긴 팔이 내 몸을 휘감아 자신에게 좀 더 바짝 붙였다.
이 느낌, 위험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불로 몸을 가리며 말했다.
“일어났어. 일어날 거야.”
지서준과 더 오래 침대에 머물렀다가는 위험했다.
내가 위험한 게 아니라, 지서준이.
이제 막 생긴 남자친구가 위험하면 안 되니 나는 서둘러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너도 빨리 씻어. 나가자. 나가서 밥 먹자.”
**
호텔 조식 말고, 국밥이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순순히 그러자 답한 지서준이었다.
호텔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키고 마주 앉았다. 내 앞에 수저를 놓는 지서준을 빤히 바라보자 눈에 온기를 가득 담아 나를 보았다.
“왜?”
“어떻게 이렇게 많이 달라질 수 있을까?”
“뭐가.”
“너 눈 말이야 눈.”
“눈?”
내가 손가락으로 눈을 콕콕 가리키자 제 눈을 살짝 비비더니 나에게 물었다.
“눈이 부었어?”
눈은 내가 부었고, 지서준은 멀쩡했다.
“아니. 그냥, 뭔가 나를 보는 눈빛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작게 웃던 지서준이 말했다.
“어떻게 바뀌었는데?”
“음……. 예전에는 반려견 바라보듯 바라봤다면, 지금은 완전히 여자?”
그러자 인상을 팍 찌푸린 지서준.
“내가 언제 반려견 보듯 봤다고 그래?”
“너 그랬거든? 훈련 시켰는데 못 알아듣고 마냥 주인 좋다고 헤헤거리는 강아지 보는 것처럼.”
그때 우리 앞에 보글보글 끓는 국밥이 나왔다. 내 국밥에 다진 파와 부추를 잔뜩 올려주는 지서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뭐, 지난 일이니까. 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내 말에 나를 바라보는 지서준을 향해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여자친구로서 잘 부탁해.”
내 오른손을 보던 지서준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도. 나도 잘 부탁해.”
그렇게 우리는 악수를 했다.
사이좋게 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길. 습관처럼 빠른 보폭으로 앞서 나가다 다시 내 걸음에 맞춘 지서준이 나를 슬쩍 보았다.
“왜?”
내가 묻자 머뭇거리던 지서준이 말했다.
“미안. 내가 걸음이 좀 빨라. 빨리 네 걸음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잠깐, 이쪽으로 와봐.”
내가 손짓하자 내게 더 가까이 붙는 지서준.
“조금만 고개 좀 숙여봐.”
그러자 내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나는 지서준의 머리를 잡고 획 돌려 정면을 보게 해 지서준의 이쁜 주둥이에 내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쪽.’
망측스럽게도 유난히 크게 들리는 ‘쪽’소리. 지서준의 눈도 유난히 크게 떠졌다.
“허락받고 해야 했나?”
바보가 된 것처럼 지서준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예쁘다. 예쁘니까, 상을 줘야지.
나는 씩 웃고 지서준의 입술에 다시 내 입술을 올렸다. 더 깊어지려던 찰나, 지서준이 갑자기 내게 멀어졌다.
내가 눈만 땡글 땡글 뜨며 보자 지서준이 말했다.
“안 돼. 아까 마늘 집어먹었어.”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손가락을 엮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태양이 제 역할을 시작하기 전, 조금 더 산책하고 싶건만 지서준의 발길은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가.”
내가 묻자 지서준이 답했다.
“양치하러.”
**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활기차게 나온 아침 인사였다. 아침 인사를 건네고 바로 탕비실로 가 익숙하게 커피를 내렸다.
“문 대리, 좋은 일 있었어?”
마침 탕비실로 들어오는 옆 팀 성 과장님.
“네? 아니요. 좋은 일 없었는데. 커피 드실래요. 과장님?”
“나야 주면 좋지.”
나는 다 내려진 커피를 성 과장님이 들고 온 컵에 졸졸 따랐다.
“문 대리, 연애하나?”
“네? 아, 아니요?”
“그래?”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성 과장님이 이내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휴가 가서 푹 쉬다 왔구나? 나는 애들에 시달려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부럽다 문 대리.”
어제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동안 못 잤던 잠을 보충하느라 거의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푹 쉬었던 것이 효과가 있던 건가. 나는 괜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기 좋아 보여.”
그 말을 남기고 성 과장님이 커피를 홀짝이며 탕비실에서 나갔다.
내가 좋아 보이나? 나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 거울로 이리저리 살펴봤다. 조금 혈색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냥 똑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만큼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 백인하 씨. 좋은 아침이에요.”
“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 문 대리님. 휴가 가서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네?”
“피부가 눈에 띄게 좋아졌는데요?”
나는 다시 한번 거울로 내 얼굴을 봤다.
그렇게 달라졌나?
“피부 관리라도 하신 거예요?”
나를 유심히 보던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냥 푹 쉬고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요.”
“역시, 회사를 쉬면 몸도 건강해지고 얼굴도 펴지나 봐요.”
“하하. 그런가.”
그녀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날 나는 우리 팀 모든 사람, 그리고 자주 보는 회사 직원들에게 모두 얼굴이 달라 보인다거나,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연애가 이렇게 좋은 건가.
꽤 오랜만의 연애가 피부과를 다녀온 날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연애도 하고, 칭찬도 듣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괜찮아?]
한참 일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지서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뭐가?]
앞뒤 잘라 먹고 괜찮냐는 물음에 뭐가 괜찮냐 묻자 지서준에게 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휴가에서 돌아오는 날 힘들어했잖아.]
역시, 병 주고 약 주는 데는 탁월했다. 나를 피곤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면서, 괜찮냐 물어보다니.
“이제 안 돼.”
“왜.”
“왜?”
양치질하러 들어가서,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더는 안 된다는 내 말에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왜냐 묻던 지서준은 내가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나서야 지칠 줄 모르는 놈이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나는 꾸벅꾸벅 졸았고, 저녁 먹고 들어가라는 말에 대차게 거절하고 집으로 올라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이제 괜찮아.]
문자를 보내고 어떤 답장이 올까 기다렸지만, 지서준에게 다시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괜히 핸드폰만 흘끔거리다가 겨우 일에 집중하려 했을 때, 이경훈 연구원님이 나를 찾아왔다.
“문 대리님.”
“네.”
“이거, 저번에 말씀하셨던 서류들이요.”
“아. 네. 이거 주려고 일부러 오신 거예요?”
“아니요. 다른 팀에 뭐 전해 줄 게 있어서, 겸사겸사요.”
“아. 그러시구나. 아무튼, 고마워요.”
“네. 아 참.”
갑자기 이경훈 연구원님이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내게 주었다.
“이거 안 주셔도 되는데…….”
“아. 이거 제가 드리는 거 아니고, 여기 온다니까 지서준 연구원님이 가져다주랬어요. 그럼 저는 심부름까지 마쳤으니 이만 가볼게요.”
내 손에는 이경훈 연구원님이 준 비타민 음료가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