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지켜보는 누군가. (40/97)


40화. 지켜보는 누군가.
2022.11.16.


누군가 그랬다. 가난과 재채기, 그리고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나는 그 말에 아주 많이 공감했다. 그래서 요즘, 조금 불안한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야. 여기는 회사에서 너무 가깝잖아.”

“왜. 아무도 없어.”

요즘 지서준의 스킨십 빈도는 날로 늘어갔고, 그것이 싫지는 않지만 이렇게 회사 근처에서는 나도 모르게 냉정하게 쳐내곤 했다.


“너는 너무 경계심이 없어.”

내 말에 살짝이 입을 삐쭉이는 지서준이었다. 하지만 그 귀여운 얼굴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장장 29년 동안 내 옆에서 어린애처럼 삐쳐 있는 놈의 친구라 가능한 일이었다.


“너도 회사에서 소문나는 거 원치 않았잖아.”

“응.”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나는 혹여 잠깐이었지만 누구라도 봤을까 봐 고개를 돌려가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자 지서준이 내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람들 부딪치잖아.”

퇴근길 붐비는 거리, 많은 인파 속 나는 그렇게 나는 사방을 경계하고, 지서준은 그런 나를 보호하며 우리 집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너,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예매했다. 지서준에게 괜찮냐 물어보니, 괜찮다 답해서 예매했지만,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신경 쓰지 말라니까.”

“어떻게 안 써. 안 좋아하는 거 뻔히 아는데…….”

“나 영화 보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영화 보는 너 보러 온 거지.”

낯간지러운 고백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멘트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럼, 다음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 봐.”

내가 쑥스러워 작게 말하며 지서준 팔에 팔짱을 꼈다.

지서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지서준에게 다가갈 줄 몰랐다. 연애하기 전, 과연 사귀면서 다른 연인들처럼 대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닿고 싶어졌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았지만, 다른 면을 발견하는 점도 쏠쏠했다.

예를 들면 친구 지서준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친구 지서준은 감정 하나하나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보고 싶다, 목소리가 듣고 싶다. 지금 뭐 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전 남자친구들과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지서준의 표현은 뭔가 더 나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그건 아마도 진심이 듬뿍 담겨 넘쳐흐르는 눈빛과 목소리 때문이겠지.

그래서 더 불안하기도 했다.

혹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서준의 눈빛과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릴까 봐.

29년 친구에서 발전한 관계, 사내 연애라서 더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꽤 선선해진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굳이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지서준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버스로 두 정거장은 가야 했지만, 바람이 좋으니 걷기로 했다.


“발 안 아파?”

지서준이 물었다. 낮은 구두였지만 두 정류소나 걸어야 하는 거리에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응. 아직 괜찮아. 힘들면 바로 버스 타지 뭐.”

“편한 신발 신고 다니지……. 참지 말고 바로 말해.”

그렇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익숙한 길, 서로 평소에 하던 대화였다. 달라진 것은 지서준과 나의 거리였다.


“그래서, 팀장님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우리 팀 직원 관리는 제가 합니다. 월권은 참을 수 없습니다.’ 딱 그렇게 말하는데, 와. 나 반할 뻔했잖아.”

“여자 팀장님 아니야?”

“응. 내가 이 회사가 좋은 이유는 다 팀장님이랑 과장님 때문이라니까. 일이 힘든 건 어떻게든 참겠는데, 사람 힘든 건 못 참잖아.”

“그렇지.”

“너는? 너희 팀은 어때?”

“그냥……. 평범해.”

혹여 숨기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살폈지만, 역시 이놈의 포커페이스에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너 호주 가는 건 어떻게 됐어? 말씀드렸어?”

“그거? 아주 예전에 안 간다고 말씀드렸지.”

“언제?”

“네가 처음 고백하기 전날.”

“그럼, 호주로 간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내 말에 갑자기 걸음을 멈춘 지서준이 날 보았다.


“내가……. 하. 내가 너 호주로 날아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꽤 억울해 보이는 내 남자친구.


“내가 남자친구 두고 어딜 가.”

“네가 좀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면이라니. 내가 잡은 손을 탁하고 쳐버렸다.


“뭐. 어떤 면을 말하는 거야?”

“한번 한다고 하면 앞뒤 안 가리고 불같이 달려드니까.”

나를 너무 잘 아는 지서준이었다.


“칭찬이야?”

“반은?”

반이라도 칭찬이 있으니 다행인가. 나는 다시 지서준의 커다란 손 안에 내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래도, 안 간다고 했으면 됐지. 안심하고 발 뻗고 주무셔.”

내 말에 잡은 손에 힘을 더 꾹 쥐는 지서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천천히 걸었던지, 무려 1시간이나 걸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발 안 아파?”

“그렇게 천천히 걸었는데 아플 리가.”

사실은 네 번째 발가락 끝의 통증이 생긴 지는 좀 오래됐다. 그래도 더 걷고 싶어서, 꾹 참고 걸었다.


“이제, 너는 그만 가봐. 많이 늦었잖아.”

내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가보라고 등 떠밀었지만, 꿋꿋이 앞에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발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막 지서준의 본가,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 동을 지나쳐 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반사신경을 이용해 앞에 세워진 차들 사이 지서준을 밀어 넣고 몸을 낮췄다.


 


“요즘 다율이가 많이 늦네.”

“연애도 못 하면서 뭘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원…….”

“저번에 맞선 본 건 잘 안됐다며?”

윤희 아줌마와 우리 엄마였다.

이 오밤중에 두 아줌마는 뭐하길래 앞에 나와 있는 건지. 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서준도 커다란 덩치를 잔뜩 오므렸다.


“신경 쓰이는 남자가 있다나 뭐라나……. 근데 요새 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그것도 영 텄나 봐.”

“왜?”

“요새 서준이랑만 놀러 다니고 영 남자 만나는 기색이 없어.”

“그래? 아쉽네. 그럼 다른 남자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하나……. 어휴. 걱정이야 내년이면 서른인데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것 같아서.”

“자기는 다율이 걱정을 너무해. 내가 보기에 똑 부러지고 예뻐죽겠는데.”

밤공기가 찬데도 두 아줌마는 들어갈 기색도 없이 두 아파트 사이 딱 한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쁘면 자기가 데려갈래?”

“내가? 그래도 돼?”

“가져가. 공짜로 줄게.”

“호호. 그럼 고맙게 받을게.”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공짜로 팔려 가게 생겼다.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지서준이 입을 꾹 막은 채 몸을 흔들었다. 내가 째려보자 잽싸게 시선을 돌리며 무표정을 만들었지만, 이미 눈가의 눈물이 이놈이 얼마나 열심히 참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팔이라도 콱 깨물어주고 싶었지만, 행여나 지서준이 소리라도 지를까 봐 그저 내 어금니만 꽉 깨물어야 했다.


“아이, 이 사람 또 전화 오네.”

“그래 들어가 봐.”

승호 아저씨에게 전화가 오는지 잔뜩 귀찮아하던 윤희 아줌마가 옆 동으로 들어가고 우리 엄마도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 들킬 뻔했네.”

나는 쪼그라져 있던 몸을 펴 무릎을 콩콩 두드렸다. 나보다 몸집이 더 큰 지서준은 발이 저리는지 연신 주물러 댔다.

우리는 그런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

황금 같은 주말.

지서준과 함께 카페 데이트에 나섰다. SNS에서 유명하다는 카페를 오픈 시간에 맞춰 찾아가니 벌써 사람이 많이 차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지서준이었지만, 기꺼이 함께 와준 것이 고마워 내가 커피를 사려 막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어디서 분명 본적이 있는 여자였지만, 안개가 낀 것 같이 흐리기만 한 기억 속에서 제대로 데이터가 출력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당근 케이크 하나 주세요.”

주문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신경 쓰여 흘긋거렸지만,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아 더는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 답답하네.”

“뭐가?”

핸드폰을 심각하게 보던 지서준이 물었다.


“아니, 아까 어떤 여자를 봤는데, 분명 내가 어디서 봤단 말이야?”

“근데?”

“근데, 누군지 모르겠어.”

“그게 뭐야.”

“아. 이렇게 찝찝한 거 별론데.”

내 자리에서는 등을 돌려야만 볼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볼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신경 쓰지 마.”

“응? 응. 그래야지.”

그녀에게 신경을 쏟는 건 앞에 앉은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니 그만하기로 했다. 막 포크를 집어 당근 케이크를 먹으려는데 내 앞으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당근 케이크가 들어왔다. 자기 포크에 케이크를 콕 찍어 내 입으로 불쑥 들이민 지서준.

내가 말없이 입을 열어 케이크를 ‘앙’ 하고 물었다.


“잘 먹네.”

예쁜 가게 실내와는 다르게 맛은 별로였다.

물론 당근 케이크는 다 먹었다. 지서준이 신나게 내 입으로 배달했고, 그런 모습이 나쁘지 않아 열심히 받아먹다 보니 어느새 케이크는 사라져버렸다.

생각보다 의자도 불편했고 계속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일찍 일어난 우리는 근처에 있는 부대찌개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우리는 이게 더 맞는 것 같아.”

실내는 화려하지 않지만, 맛이 알차니 순식간에 해치웠다. 밥을 두 공기나 먹은 지서준도 얼굴에 만족감이 번져 있었다.


“다음에는 어디 갈래?”

“그러게, 어디 갈까.”

“만화 카페 갈래?”

“그게 뭐야.”

아직 만화 카페를 모르는군.


“누나만 믿어. 좋은 데 가자.”

드라마에서 마주칠 법한 음흉한 누나들이 하는 대사에 지서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따라나섰다. 근처에 어디로 가야 하나, 아니면 집 근처로 갈까 고민하는데 내 시선에 그 여자가 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나를 보더니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어버렸다.

뭐지.

굉장히 찝찝한 기분에 그녀가 사라진 골목 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뭐 있어?”

내 모습에 지서준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그녀는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아까, 아까 내가 어디서 본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그 여자. 또 본 것 같아서.”

“어디?”

다시 주위를 살피는 지서준.


“다른 쪽으로 갔어.”

나는 지서준에게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지서준.


“그냥, 오피스텔로 가자.”

“응?”

“그냥 오피스텔로 가서 놀자.”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차를 주차한 쪽으로 성큼성큼 걷는 지서준이었다.


“아파. 지서준. 아프다니까.”

지서준이 내 손을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내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서준이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내 손을 놓았다.

그제야 내 손에 피가 도는지 원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픈 손을 쓰다듬던 나는 지서준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은 놀라움으로 커졌다.

지서준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