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비밀 연애의 맛.
(44/97)
44화. 비밀 연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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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비밀 연애의 맛.
2022.11.30.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시원하게 볼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왔을 때였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누군가 후다닥 화장실 뒤편의 벽으로 몸을 숨겼다.
“누, 누구세요?”
뭔가 수상쩍은 기운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정신에 알아차린 것도 대단한데, 어슴푸레 실루엣까지 보았다.
“누구시냐니까요?”
술기운 때문인지 겁을 상실한 나는 나를 쫓아온 사람이 숨은 곳으로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문문? 거기서 뭐 해?”
“아! 깜짝이야!”
어깨를 잡은 사람은 지서준이었다. 나는 한껏 긴장했던 터라 지서준이 어깨를 잡자마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왜, 왜! 왜 놀라!”
내 목소리에 더 놀란 지서준이 나에게 한걸음 물러섰다.
“아, 아니…….”
나는 지서준을 노려보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잠깐만 기다려봐.”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나는 나 때문에 놀라 멀찍이 떨어진 지서준을 두고 내가 확인하려던 곳으로 가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화장실 건물 옆,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거기 뭐 있어?”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지서준이 조심스럽게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니, 분명 누가 있었는데?”
“누가?”
내가 확인한 곳을 지서준도 확인하며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꼼꼼히 살피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곳에 누가 있었다는 거야.”
“몰라. 분명 인기척이 있었거든?”
“너, 내가 술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
아닌데, 분명 있었는데…….
내가 잔뜩 인상을 쓰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 살피려는데 지서준이 내 목덜미를 끌었다.
“나와. 또 기어들어 가다 넘어지지 말고.”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너무 억울해 소리를 높이자 지서준이 갑자기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나를 끌어 잔뜩 심어놓은 철쭉나무 아래로 잽싸게 몸을 낮췄다.
“야, 진짜 너무 한 거 아니냐. 그 얼굴에 그 운동신경이……. 이거 억울해서 살겠냐.”
“역시, 신은 불공평해. 또 왜 땀은 안 흘리냐고. 인간 맞아?”
“엑스레이 한 번 찍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하. 그래야 하나.”
촉새였다.
A.I 팀의 촉새, 그 촉새가 딱따구리처럼 생긴 다른 연구원과 함께 비척비척 걸으며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걸음걸이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트래블 팀의 그……. 누구야. 그 눈 커다랗고”
“아. 문다율 트래블 코디?”
“그래. 그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 두 사람의 대화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서준은 아직도 손으로 내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뭐가 있긴 뭐가 있어. 친구라잖아.”
“친구? 너는 친구를 그런 눈빛으로 보냐? 그리고 왜 머리는 쓰다듬냐? 은근히 흘린다니까, 지서준 연구원.”
“난 잘 모르겠네. 나는, 일단 여자 사람 친구가 없지.”
“하하하. 맞네. 나도 없네,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화장실로 쑥 들어가 버렸다.
“우우으으으읍.”
나는 내 입을 막고 있는 지서준의 손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제야 눈빛으로 내게 조용히 하라고 경고를 보낸 지서준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손을 거뒀다.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그러기를 잠시.
“나 다리 저려.”
큰일을 보는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코에 침 발라.”
나보다 다리가 긴 지서준은 더 힘들 법도 하지만 화장실 입구를 주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금 뒤 두 사람은 여전히 깔깔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꽤 멀리까지 사라지자 저 정도 거리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 저리는 다리를 펴 일어났다.
“갔지?”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나왔다. 지서준도 조심스럽게 나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너는 왜 따라온 거야?”
주위를 경계하며 혹 누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을까 지서준과 거리를 두었다.
“네가 그렇게 취해서 사라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
“나, 많이 안 취했거든?”
사실, 긴장의 연속으로 갑자기 술기운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때는 조금, 아주 조금 취해 있긴 했다.
그 사실을 지서준도 잘 알고 있는지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팀장님은? 혼자 계시는 거야?”
내가 묻자 지서준이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너한테 가보라고 하셨어.”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야.”
머리 정리를 마쳤는지 다시 모자를 눌러 쓴 지서준이 나를 보았다.
“야. 지서준”
“왜.”
“지서준. 지서주운.”
나는 지서준을 보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취했네, 취했어.”
취했다며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서준이 내게 딱밤을 날렸다.
“아!”
“내가 경고하는데, 나 있을 때만 그렇게 마셔라.”
“알았어. 알았다고.”
대충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그거고, 잠깐…… 나 좀 볼래?”
나는 그런 지서준을 보며 헤실헤실 웃어대며 불렀다.
“보고 있잖아.”
나는 아까 우리가 숨었던 사각지대로 지서준의 반소매 끝자락을 잡고 끌었다.
“어, 어디 가.”
“잠깐 나 좀 보자니까.”
완전히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나는 주위를 살폈다.
‘쪽.’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지서준의 입에 내 입을 가져다 댔다.
“뭐야.”
“뭐긴 뭐야. 비밀 연애하는 중에 몰래 숨어서 뽀뽀하는 거지.”
그러자 살짝 몸을 빼 사람들의 동태를 확인한 지서준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몰래 하는 거면, 그 정도로 되겠어?”
눈동자가 더욱 짙어진 지서준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수고하셨습니다.”
술이 홀딱 깨서 돌아온 나는 막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대리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그…… 화장실 갔다가 술 좀 깨고 왔어요.”
막 소주병을 정리하고 있던 백인하 씨가 나를 발견했다. 나는 얼얼한 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리님도 2차 가실 거예요?”
“누가 2차 간대요?”
“네. 인사팀에서 2차 갈 사람 모으고 있어요. 대리님도 가실 거죠?”
“아 저는…….”
“안 가세요?”
워낙 그런 자리는 빠지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지서준과 몰래 숨어 스킨십하는 도중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지서준이 떠올랐다.
“저는 오늘은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왜요, 대리님 같이 가요.”
아쉬운 듯 백인하 씨가 같이 가자며 졸랐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 너무 무리하게 뛰어다녔나 봐요. 고기 먹으면서 술 마신 것도 좀 알딸딸해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백인하 씨.
“대리님이 좀 많이 뛰시긴 했죠.”
다행히 수긍하는 그녀 덕분에 아무 의심 없이 2차에 가지 않고 지서준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돌아갈 사람들, 그리고 2차 가는 사람들로 나뉘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오늘 탄 경품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지서준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문 대리님?”
“어? 이경훈 연구원님.”
이경훈 연구원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지 차를 끌고 있었다.
“2차 안 가세요?”
“네.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돌아가 보려고요.”
몸을 낮춰 활짝 열린 차 창문으로 이경훈 연구원을 보며 웃었다.
“바로 집에 가시는 거예요?”
“네. 요 앞에까지 걸어가서 택시 타려고요.”
“그럼, 제가 태워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요 앞에서 택시 탄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지서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물론, 지서준과 택시를 타고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가기로 했으니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사양 말고 타세요. 제가 큰길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그냥 가라고 이 사람아.
“아, 아니라니까요?”
“네?”
“그. 그러니까…….”
“아이. 평소와 달리 왜 그러실까. 부담 갖지 마세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 짐도 무거운데, 타세요!”
그때 뒤에서 다른 차가 다가왔고 클랙슨을 ‘빵’ 울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이경훈 연구원의 차에 올라탔다. 내가 올라타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오늘은 왜 2차를 안 가세요?”
그는 굉장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몸이 피곤하다고 말을 했거늘. 믿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 경품들을 보세요. 몸이 멀쩡할까.”
“하하. 그렇네요.”
운전하며 내 품에 안겨 있는 경품들을 보더니 기분 좋게 웃었다.
“이경훈 연구원님은 경품 못 탔어요?”
“저는 몸치라서요. 아, 지서준 수석님 대단하더라고요. 무슨 운동을 그렇게 잘해요? 반칙이에요.”
정색하며 고개를 젓는 이경훈 연구원님.
“걔 때문에 비 연구팀이 졌다고요.”
내가 뾰로통 말하자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이경훈 연구원님이야말로 술도 안 마시고 2차도 안 가고 무슨 일 있어요?”
연구원 마당발로 유명한 이경훈 연구원이 일찍 돌아가다니, 내가 2차를 안 간 것만큼 드문 일이었다.
“아……. 그러니까. 좀 일이 있어서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목이 말랐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네. 하하.”
다시 표정을 풀더니 활짝 웃는 이경훈 연구원이 어느새 큰 길가로 들어서자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집까지 모셔다드려도 되는데…….”
“그럼 조금 돌아가야 하잖아요. 괜찮아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찍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까지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조심히 가세요!”
“네. 그럼, 월요일에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이경훈 연구원의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서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나 지금 여기 큰길에 다 왔어.
“나도 지금 막 도착했어.”
전화하며 막 고개를 돌렸을 때 지서준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나는 지서준을 보며 경품을 추스르며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발견한 지서준이 싱긋 웃더니 전화를 끊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늦게 올 것 같더니.”
“아. 늦게 출발하긴 했는데, 중간에 이경훈 연구원님을 만났지 뭐야. 여기까지 차로 데려다줬어.”
“그렇구나. 그렇게 다른 남자 차에 덥석덥석 타고 그러는구나.”
지서준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또 언제 덥석덥석 탔다고……. 그리고 이경훈 연구원님의 차라고!”
“이경훈 씨는 남자 아닌가?”
“나한테는 아니지!”
“그래?”
그러더니 지서준이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오늘, 집에 안 갈 거지?”
“안 돼. 집에 가야 해. 우리 엄마 알지? 나 외박하면 난리나.”
택시를 기다리며 내가 들고 있던 경품을 지서준이 들어준다며 가져갔다.
“고주연이나 도이라네 집에서 잔다고 해.”
나는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핑계에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 없는 동안에 무슨 외박을 그렇게 했어?”
“뭐?”
“네 친구 집에서 자는 거 너무 우려먹어서 안 된다며.”
“아니, 뭐. 그냥…….”
말끝을 흐리는 내 대답에 떨떠름한 표정의 지서준이 들고 있던 내 소중한 경품들을 다시 나에게 모조리 넘겼다.
“뭐야. 들어준다며.”
“네가 들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게 굴까. 응?”
내가 지서준이 넘긴 경품들을 추슬러 안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질투도 다 하고, 응? 내가 아는 쿨한 지서준이 어디 갔나.”
내가 옆에서 아무리 느물거리며 놀려도 지서준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택시가 오는 방향만 미동도 없이 바라봤다.
“알았어. 내가 오늘 엄마한테 전화해서 다시 한번 허락받아보지 뭐. 응? 남자친구가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데, 등 한번 내주고 말지 뭐!”
내 말에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내 남자친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안 재울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