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우연한 만남의 시작.
(46/97)
46화. 우연한 만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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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우연한 만남의 시작.
2022.12.07.
“응? 무슨 소리야. 애들 요 앞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우리 엄마의 말에 나는 뜯다 만 인스턴트 커피 봉지를 든 채 거실로 나갔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아줌마들 사이 지서준이 보였다. 지서준은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무 당황해 몸이 굳어버린 것을.
“에이. 잘못 봤겠지.”
“그런가? 뭐 두고 온 게 있어서 집에 들어갔다가, 서준이 아빠가 하도 뭐라고 하는 바람에 서두르긴 했는데……. 그래도 얘가 어디 가서 눈에 안 띄는 스타일도 아니잖아.”
이럴 때는 저 잘난 얼굴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 그럼 다율이가 아니고 다른 여자 아니야?”
엄마의 말에 아줌마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어머. 그래? 누구지? 다율아, 너는 봤니?”
아줌마가 부엌 앞에 멍청하게 커피 봉지를 들고 있는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삐걱거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실…….”
나는 지서준이 고심 끝에 뱉은 말에 화들짝 놀랐다.
설마, 이 자식이……. 안 돼!
지서준과 순간 눈이 마주쳤고 나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사실, 집 앞에서 만난 게 아니고 오피스텔 근처에서 만났어요.”
“뭐?”
“자고 있는데 문문한테 전화가 와서, 집에 혼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 같이 가자고…….”
저, 저놈이!
물론, 사실대로 고하는 것보다야 백번 천번 낫다고 하지만, 정녕 그 방법밖에는 없었단 말인가.
“문다율!”
지서준의 말이 끝나자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아니야.”
“아니긴. 쉬고 있는 애 데리고 온 거란 말이야? 으유! 내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잘못하고 들어오는데 떡하니 서준이랑 집 앞에서 만날 수가 있어. 그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과도는 내려놓고 이야기하시지…….
“왜? 다율이 뭐 잘못했어?”
“저 지지배가 또 외박했지 뭐야.”
“그럴 수 있지. 다율이가 한두 살이야?”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야지.”
“자기는 개방적인 것 같다가도 이럴 때는 꽉 막혔어.”
윤희 아줌마가 사과를 콕 찍어 우리 엄마의 손에 과도를 빼앗아 포크를 쥐여주었다.
“그건 그렇고, 윤희. 문다율이랑 서준이 같은 회사 다니는 건 알고 있었어?”
“응?”
“아. 엄마. 그…….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지서준이 냉큼 윤희 아줌마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나머지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나, 나는 마저 커피를…….”
나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얼음을 꺼내 유리잔에 채워 넣는 내 등이 따가웠다.
“아니. 다율이랑 같은 회사 다니는 거 왜 말 안 했어? 응?”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니까요.”
“이래서 내가 딸을 낳고 싶었다니까. 이렇게 무뚝뚝할 수가 없어.”
“딸은 뭐 싹싹한 줄 알아? 나도 오늘 알았어.”
“얘는 무슨 상한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아이고. 답답해.”
제각각 아들과 딸의 안 좋은 점을 나열하기 시작하는 엄마들. 나는 재빨리 커피를 가지고 가 아줌마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빨리 커피 드세요. 네? 시원할 때 마셔야지.”
엄마는 내가 잔소리 듣기 싫어 커피를 내미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흘겼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잔소리는 없었다.
아줌마와 지서준은 과일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 폭탄을 피해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으로 들어와 누워 있다가 잠이 들어버렸었다.
“그 뒤로 아줌마는 별말 없으셨어?”
-이것저것 물어보셨지 뭐.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상한 조개 지서준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나는 반가운 부재중 전화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어?”
-그냥 대충 말했어.
“지금 집이야?”
-오피스텔.
“그래서, 상한 조개 씨는 저녁은 뭐 드셨나?”
-너 조개한테 물려봤어?
진지하게 싸우다가, 출처가 애매한 애교도 부렸다가, 구토하는 소리도 들었다가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서준과 통화를 했다.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울려 충전기를 꽂고 다시 통화하려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다율! 조용히 좀 해. 뭔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아무래도 조금 전 들어온 아빠의 영향으로 엄마의 심기가 다시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엄마가 전화 끊으란다. 내일 보자.”
-그래. 잘자.
지서준과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남자친구랑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라니. 갑자기 간질거리는 맘에 피식피식 웃음만 흘려대다 잠이 들었다.
**
수군수군.
오늘따라 유달리 소란스러운 회사 분위기에 나도 저절로 집중이 깨져버렸다. 정말로 모든 사원이 수군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그런 것같이 부산스러움이 있었다.
“인하 씨.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회사에 높으신 손님이라도 오나?”
“네? 왜요?”
이제 복잡하지 않은 트래블 건은 혼자서 맡게 된 백인하 씨가 문서 작업을 잠깐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음, 회사가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요.”
“아. 아마 그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것?”
잠깐 주위를 살피던 백인하 씨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얼마 전에, 회계팀 정 대리님이랑, 보안팀 과장님이랑 연인 사이였는데, 글쎄 결혼 청첩장까지 돌렸는데, 갑자기 결혼이 깨졌대요.”
“네? 왜요?”
나도 그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 대리님이 연구원 누구랑 바람이 났대요.”
“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올 뻔했다.
“누구랑요?”
나는 목소리 볼륨에 신경을 쓰며 잽싸게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이상하게 정 대리님만 소문이 나고, 상대방은 소문이 안 난 거 있죠?”
“이상하네요. 애초에 바람피운 게 아닌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데……. 어쨌든 두 사람 결혼이 취소되면서 여기저기 이상한 소문만 나는 것 같아요.”
회사가 나름 크고, 사원 수도 많지만, 좁다면 좁은 사회였다. 소문이 나면 삽시간에 퍼졌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치정 소문일수록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포커스가 맞춰지곤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럴 땐 여자인 게 조금 억울하긴 해요.”
백인하 씨가 말하며 주위를 훑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상대방이 바이오 3팀 정찬형 연구원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누구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작년에 이직한 연구원이라는데, 지서준 연구원님만큼은 아니지만, 훈훈한 외모에 성격도 다정해서 여사원들에게 인기 많았어요.”
그런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작년 그 연구원이 이직했을 무렵, 실연의 아픔에 허덕이며 반은 폐인처럼 살았던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ㅇ
“지서준 연구원님이 입사하면서 조금 인기가 시들긴 했지만요.”
역시 이런 쪽으로는 빠삭한 인하 씨였다.
“그 연구원이란 게 확실해요?”
“아니요. 두 사람이 회사 밖에서 만나고 있는 걸 누가 봤더라 하는 뭐 흔한 카더라 통신이에요.”
“에이. 뭐 그럼 정확한 것도 아니네요.”
“네. 그렇죠. 뭐.”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도 말아요. 괜히 인하 씨한테도 불똥 튈지도 몰라요.”
“네.”
대화를 마치고 다시 일에 몰두하는 백인하 씨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회사에서 유명인과 비밀 연애를 하는 중. 그런 상황에서 이런 치정 스캔들이 꼭 남 일 같지 않았다.
오늘은 야근해야 하는 상황.
괜히 낮부터 가라앉은 마음에 집에 일찍 돌아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상황이 되지 않아 꾸역꾸역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다.
“대리님, 아직 멀었어요?”
일을 다 끝냈는지 백인하 씨가 컴퓨터를 끄며 말했다.
“네. 저는 조금 일이 남았네요. 인하 씨는 다 했어요?”
“네.”
“그럼, 인하 씨 먼저 들어가요.”
“네. 대리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같은 팀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사무실에 나 혼자 덜렁 남아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30분만 더하면 될 것 같은데?”
이제야 끝이 보이는 일에 한숨을 푹 내쉬고 잔뜩 굳어버린 어깨를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아직도 끝나려면 멀었어?]
같이 저녁을 먹자는 지서준에게 오늘은 야근으로 힘들 것 같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퇴근한 지서준은 나를 데리러 오겠다며 언제 끝나는지 물었고, 기약 없는 퇴근 시간에 알아서 돌아가겠다 답했는데,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알아서 집에 갈 수 있어. 야근 한두 번 해보나. 걱정하지 마. 너도 얼마 전까지 연구 안 풀린다면서 힘들어했잖아.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사내 체육대회가 끝나고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연달아 출장을 다니던 지서준이 잘 안 풀리는 문제가 생겼는지, 꽤 피곤해했다.
야근도 계속 이어지면서 만나는 시간도 부쩍 줄어들어 아쉬웠지만, 일에 몰두하는 지서준을 보는 것도 꽤 좋았다.
이제 겨우 만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바빠졌고,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회사로 오겠다는 내 남자친구였다.
오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잠깐이라도 얼굴이 보고 싶은 모순된 감정이 날 괴롭혔다.
[정말 기다리지 마?]
[응. 정 힘들면 택시 탈게. 나 이제 일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문자를 끝내고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점점 눈이 침침해지고 으슬으슬 추워지는 탓에 작업 속도는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지서준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이미 쉬고 있을 지서준에게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아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마음먹고 나머지 일을 끝냈다.
“드디어 끝났구나.”
컴퓨터 전원을 끄며 이제는 여기저기 근육통처럼 아파져 오기 시작한 몸을 손으로 두드렸다. 아무래도 약국에 들러야 할 것 같아 뒷정리를 서둘러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밑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3층입니다.’
누군가 13층에서 타는 것 같아 엘리베이터 벽 쪽으로 내 몸을 붙였다.
남자 사원 누군가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우리는 서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눴다. 그 순간 내 시선이 그 사람의 사원증에 꽂혔다.
[바이오 연구 정찬형 연구원]
오늘 백인하 씨에게 들었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지 핸드폰만 만지고 있었다.
백인하 씨가 말한 대로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키도 지서준 만하니 180cm가 넘는 것이 분명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 때문에 더욱 선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네?”
갑작스럽게 날 보며 묻는 정찬형 연구원의 말에 바보같이 입맛 벙긋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제 착각인가요? 그렇다면 죄송하고요.”
“아, 아니……요.”
가만히 있어도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웃으니 더욱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그렇군요.”
-1층입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눈인사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몰래 훔쳐본 거 들킨 거야? 아……. 쪽팔려.”
나는 가뜩이나 뜨끈해진 머리에 창피함이 더해져 김이 날 정도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은 이마에 대고 열을 식히며 서둘러 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약국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상냥해 보이는 약사가 어떤 약을 찾는지 물어봤다.
“몸살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네. 잠시만요.”
약사가 약을 고르는 사이.
“어? 여기서 또 만나네요?”
조금 전, 만났던 정찬형 연구원이 약국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