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죽은 사랑이다.
(47/97)
47화. 죽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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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죽은 사랑이다.
2022.12.11.
“어디가 아프세요?”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너무나 다정하게 물어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러고 보니 안색도 별로 안 좋은 것 같네요.”
내가 아프다는 말에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는 정찬영 연구원의 모습을 보며, 왜 지서준이 나타나기 전, 우리 회사 인기남인지 알 것 같았다.
“몸살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사가 몇 가지 추천해 주는 약을 받아서 약국 문을 열고 나왔다. 택시를 부르려 핸드폰을 막 가방에서 찾는 중 지서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나 이제 집에 가려고.”
-나 여기 회사 근처.
“뭐?”
-회사 정문에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어. 그쪽으로 갈게.
“오지 말라니까.”
말을 그렇게 해도 기쁜 마음이 찔끔찔끔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
“그럼, 나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전화를 끊고 약봉지를 곱게 접어 핸드백에 넣고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딱 좋은 날씨.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설렘으로 가벼웠다. 5분도 기다리지 않아 지서준의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 앞에 섰고, 나는 잽싸게 지서준의 차에 올라탔다.
“많이 기다렸어?”
문을 닫기도 전에 내가 물었다. 내가 안전벨트를 하는 것까지 지켜보던 지서준이 차를 출발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안 기다렸어.”
차가 출발한 뒤 바로 빨간불에 잡혀 차가 섰다. 보행자 신호가 켜진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너, 어디 아파?”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내게 지서준이 물었다.
“조금 몸이 안 좋긴 한데……. 아파 보여?”
정찬형 연구원도 약국에서 안색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얼굴이 영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앞에 선바이저에 달린 작은 거울로 내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은 퀭한 눈에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환절기 때, 자주 앓더니 요즘도 그래?”
지서준의 커다랗고 시원한 손이 내 이마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너, 열 있는 것 같은데?”
신호등이 바뀌면서 누군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급히 차를 출발시키며 지서준이 말했다.
“으슬으슬 추운 것 같더니, 열이 올라서 그런 건가 보네.”
내 말에 차 열선 시트를 켜더니 히터도 틀려는 지서준을 말렸다.
“그렇게 추운 거 아니야. 괜찮아. 히터 틀면 답답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지서준의 표정이 어두웠다.
“몸이 안 좋으면 대충 끝내고 나오지, 이 시간까지 왜 무리를 해. 바보같이.”
말에 걱정이 담뿍 묻어져 나오는 지서준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 덜 아픈가 봐? 웃음이 나와? 나는 걱정돼 죽겠는데.”
“아픈 사람은 난데 왜 네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무릎에 있던 내 손을 가져가 조물딱 거리던 지서준이 내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평소에 뜨겁기만 했던 지서준의 입술이 차가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열이 꽤 나는 듯했다.
“밥은, 밥은 먹었어?”
“저녁 먹었어.”
“그럼 약 먹지 그래. 해열제부터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 안에서 약 봉투를 꺼내 쌍화탕과 해열제를 입에 넣었다.
“으. 진짜 쌍화탕은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좀 맛있게 만들 수는 없나.”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부르르 떨자, 물티슈를 꺼내 내 손에 쥐여준 지서준이 말했다.
“약이 써야지, 달면 되겠어?”
엄마의 잔소리 같은 지서준의 말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집에 다 오면 깨워줄래?”
“알았어. 눈 붙여.”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지난 것 같지 않은데 지서준이 나를 깨우는 소리에 간신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음. 뭐야. 벌써 다 왔어?”
“응. 빨리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조금 더 무거워진 머리에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지서준의 말대로 제대로 씻고 빨리 침대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고마웠어. 조심히 들어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지서준의 말을 단박에 거절하고 차에서 내렸다. 평소라면 지서준을 먼저 보내고 차 엉덩이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힘도 없어 내가 먼저 돌아섰다.
“다녀왔습니다.”
늦은 밤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던 엄마가 내가 들어오자 대충 대답하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엄마, 나 아파.”
“뭐? 어디가.”
그제야 나를 본 엄마가 눈이 커지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어머. 너 또 환절기 몸살감기 오는 거 아니야?”
“응. 그런가 봐.”
“아이고, 못살아. 병원은?”
“당연히 못 갔지.”
“오늘 밤 끙끙 앓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중얼중얼 혼잣말을 내뱉으며 TV 밑 서랍을 뒤져 온도계를 가지고 오더니 내 귀에 쿡 하고 꽂아 넣었다.
“38도? 어머. 너 약은 먹었어?”
“응. 엄마, 나 씻고 빨리 누울래.”
사실, 어렸을 때는 환절기마다 끙끙 앓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빨리 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대충 얼굴만 씻고 누워. 엄마가 얼음주머니 만들어서 들어갈게.”
나는 엄마 말대로 대충 화장만 지우고 편한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집에 들어오며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지 힘이 쭉쭉 풀려버렸다.
“응급실이라도 갈까?”
내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으며 엄마가 말했다.
“쌍화탕이랑 해열제 먹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이제는 목소리도 갈라지기 시작해 겨우 쥐어짜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야?”
방에서 먼저 잠들었던 아빠가 소란스러움에 눈을 떴는지 반만 떠진 눈으로 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얘가 또 아프기 시작하네.”
“응? 아니, 요 몇 년간 괜찮다가 왜?”
엄마와 아빠가 나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만, 대화 내용은 어느 순간부터 뭉개져서 귀에 들어왔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어느 순간부터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
목이 너무 말라 눈이 떠졌다.
아직 캄캄한 것을 보니, 밤중이 분명한데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무……. 물.”
“응? 물 줘?”
엄마가 옆에서 잠들었었는지, 내 목소리가 들리자 엄마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 물을 챙겼다. 따뜻한 물이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아파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열이 조금 떨어지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높네.”
엄마는 아직 잠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힘겹게 뜬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서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내 이마에 올려놓았다.
“해열제 하나 더 먹고 자자.”
엄마의 말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약을 삼켰다. 부어오른 목에 약이 넘어가니 통증이 더 크게 느껴져 목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지금이라도 응급실 갈래?”
“아니, 괜찮아.”
“어렸을 적부터 병원이라면 치를 떨더니, 다 커서도 왜 그래.”
말투는 퉁명스러워도 손길은 따뜻한 우리 김 여사였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고, 아침에 간신이 일어나 팀장님께 연락해 병가를 냈다.
[급한 건은 어제 문 대리가 다 해결해놔서 괜찮을 것 같아요.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다 나와요.]
팀장님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중간에 일어났을 때, 해열제가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차츰차츰 열이 내려 죽을 먹고 다시 약을 먹은 후 잠에 빠졌다.
“다율이는 괜찮아요?”
지서준?
꿈결에 지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제는 열도 많이 내려서 미열만 살짝 있네.”
“병원은요?”
“안 간다고 고집부리잖아. 9살 어린애도 아니고, 29살이나 먹어서 뭔 병원을 저렇게 싫어해.”
아무래도 엄마와 대화하는 것 같은데,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지금이라도 데리고 갈까요?”
“좀 더 지켜보지 뭐.”
“아주머니가 힘드셨겠어요.”
“어제 잠 한숨 못 잤어.”
어제 엄마가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것은 알겠지만, 한숨도 못 잤다니. 엄살이 너무 심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머. 쟤 웃는다. 뭔 꿈을 꾸는데 저렇게 웃어. 서준아. 쟤 괜찮은가 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대화가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걱정이 가득 담긴 지서준의 눈이 보였다.
“일어났어?”
“지서준?”
“연락 안 돼서 걱정했잖아. 이렇게 아프면 병원을 가지. 바보같이 끙끙 앓고 있어?”
“잔소리하지 마……. 머리 아파.”
나는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지서준에게 말했다.
“이제 문다율 살아났네. 잔소리 듣기 싫어서 끙끙거리는 거 보니까.”
엄마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문다율. 잠깐 일어나봐. 서준이가 죽 사 왔어.”
엄마가 옆에 있던 죽이 담긴 쟁반을 들어 보여주었다.
아직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그릇이 얼핏 보였다.
“죽 싫은데…….”
“봐. 쟤 이제 괜찮아 서준아. 네가 괜한 발걸음했다.”
엄마의 말에도 지서준은 여전히 미간의 주름을 펴지 못하고 나를 일으켜 앉혔다.
“죽 먹어.”
그러고는 엄마에게서 죽 쟁반을 빼앗아 숟가락으로 죽을 뜨더니 호호 불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입을 열어 죽을 받아먹자 그제야 인상을 편 지서준이 다시 숟가락에 죽을 얹었다.
“조금만 줘.”
내가 칭얼거리자 숟가락에 있던 죽을 반을 덜어 다시 호호 부는 지서준이었다.
그렇게 죽을 비워가고 있을 무렵.
나와 지서준 누구도 우리 엄마가 아주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이게 다 뭐야.”
다음 날까지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지서준이 다녀간 후로 급격히 좋아지긴 했지만, 회사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지는 못했고, 결국은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그래도 일어나서 거동할 정도로 회복을 해 거실에 나오니 부엌 식탁 위에 무언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어제 서준이가 사 왔어.”
“지서준이?”
식탁 위에는 꽤 많은 종류의 약들과 영양제, 그리고 과일들이 수북이 올려져 있었다.
“이거 말고도 너 먹으라고 죽을 많이 사 왔더라. 버리면 안 되니까 앞으로 우리 가족은 죽으로 식사를 할 거야.”
엄마의 말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야채죽, 호박죽, 닭죽, 전복죽까지 플라스틱 통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이걸 다 가지고 왔다고?”
“응.”
엄마는 대충 대답하고는 지서준이 사 온 오렌지 하나를 입에 넣었다.
“몸은 좀 어때?”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그래?”
엄마가 그 뒤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으나,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엄마에게 되물으려는 순간 방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지서준]
한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지서준이었다.
“여보세요?”
-금방 받네? 이제 좀 괜찮아?
“응. 이제 살 것 같아.”
-다행이네. 죽 먹고 약 챙겨 먹어.
“너는 무슨 죽을 그렇게 많이 사 왔어.”
-네가 죽 싫어하니까, 입에 맞는 거로 골라 먹으라고. 죽은 먹었어?
“응. 먹었어.”
요즘 예쁜 짓만 골라 하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니야?”
-지방에서 회의가 있어서 왔다가, 잠깐 쉬는 시간. 바로 들어가 봐야 해.
“그래. 고마워.”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올라가자마자 들를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거실로 나가려는 순간.
“깜짝이야!”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 손에는 오렌지를 든 채 잔뜩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