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생각지도 못한 만남.
(49/97)
49화. 생각지도 못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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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생각지도 못한 만남.
2022.12.18.
“고맙다.”
“뜬금없네.”
식사를 마치고 승호 아저씨가 설거지하겠다고 나섰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자 아줌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나와 지서준에게 심부름시켰다. 아줌마 심부름에 나와 지서준이 집을 나선 길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너한테 약해도 너무 약해.”
“누가 할 소리. 가끔 네가 우리 부모님 친자식이 아닐까 싶다니까?”
누가 더 내 친부모가 아닌 다른 부모님에게 이쁨받나 나열하는 우리 두 사람의 맞잡은 두 손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다음에 정말 같이 갈 거야?”
“그럼, 약속했는데, 가야지.”
내 말에 지서준이 가지런한 하얀 이가 예쁘게 드러나도록 웃었다.
예쁜 놈.
“지금 생각해봤는데, 나도 조금은 무서웠는지도 몰라.”
“병원 가는 거? 그것 봐, 내가 안 가는 이유 알겠지?”
내 말이 맞지 않냐며 턱을 조금 추켜 올리고 말하자 내 머리에 큰 손을 얹어 꾹 눌렀다.
“아직 잘해나가고 계시는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완치 판정받기까지 왜 이렇게 긴 건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온 이유가 아줌마 때문이지?”
“응.”
“만약에 아줌마 아프지 않았다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도 그랬겠지?”
지서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내 손등을 지서준이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괜찮았어. 너무 깊게 사생활을 침해하지도 않았고, 노력한 만큼 충분히 보상도 받았고.”
저만치 슈퍼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빴던 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지 못했던 것. 그것 말고는 다 괜찮았던 것 같아.”
“떠나올 때 아쉽진 않았어?”
“응. 나도 그래서 조금은 놀랐어. 꽤 만족하고 있던 삶을 정리하는데 하나도 아쉽지 않더라.”
슈퍼 앞.
“그 이유 중 하나는 너였는데, 너랑 놀 생각하니까 설레더라.”
지서준이 말했다.
이제는 완연한 가을바람이 우리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
“요즘, 그 소문 들었어요?”
몸이 완벽히 괜찮아지자마자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어 백인하 씨와 함께 회사 밖에서 음식을 먹고 들어왔다.
그것이 잘못됐는지 우르르 쾅쾅 요동치는 배를 붙잡고 화장실로 뛰어왔다. 겨우 급한 불을 끄고 한숨을 돌렸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뭔 소문이요?”
그러게, 이놈의 회사는 무슨 소문이 그렇게 많을까. 지서준이나, 나에 관한 소문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었다.
“유나라 씨요.”
“누구요?”
“왜, 그 인사팀 유느님이라고 불리는…….”
“아……. 여자 아이돌이 동생이라는? 그 사람이 왜?”
“그게…….”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져 나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대화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상체를 앞으로 최대한 밀어 봐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대박.”
대박? 무슨 소문이길래 대박이라는 걸까. 너무 궁금했지만,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회식 장소에서 꽤 잘생긴 사람이 아는 척하더니 유나라 씨랑 같이 밖으로 나가더래요. 그런데 두 사람이 나가서 한참을 안 들어오더래요.”
아니, 그 유느님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뜻인가. 어정쩡한 자세에 발이 저렸지만, 코에 침을 발라가며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에이, 어쩌다 둘이 나간 거겠죠.”
“누가 봤는데, 꽤 분위기 좋았대요.”
“유나라 씨, 지서준 연구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대차게 차인 게 언젠데요.”
“그런가? 아……. 왜 회사에 괜찮은 사람들은 다 임자가 있는 건가.”
그 말을 끝으로 하하 호호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화장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가니 화장실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유느님이 지서준에게 마음을 접고 누군가 만나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인가 싶었다.
회사 사람인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뭐. 알게 뭐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일 폭탄이 떨어졌고, 나는 그 소문을 까맣게 잊게 되었다.
그 소문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날로 이틀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였다.
“어? 저 사람은…….”
우연히 마주쳤던 그 사람.
정찬형 연구원이 유나라 씨와 꽤 진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팀장님의 심부름으로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 빨리 사무실로 돌아갈 욕심에 지름길로 가기 위해 비상구로 들어섰다. 이곳 비상구는 꽤 외진 곳에 있는 곳이었다.
혹시…….
화장실에서 들었던 유나라 씨가 만난다는 사람이 정찬형 연구원? 그렇담, 회계팀 정대리와의 소문은 역시 헛소문인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니니 이만 시선을 거뒀다. 그들이 알아차리길 바라며 일부러 발소리를 쿵쿵 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유나라 씨가 날 보더니 더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내게 살짝 목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또 보네요?”
“네? 아. 네. 안녕하세요.”
솔직히 말 걸 줄 몰랐는데, 정찬형 연구원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했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네. 도서관에 좀…….”
“도서관에 다녀올 때는 이 길이 빠르긴 하죠.”
여전히 예쁘게 웃는 정찬형 연구원. 유나라 씨와는 다르게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만요.”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
“왜, 왜 그러세요.”
“네? 아, 이것.”
갑자기 다가오는 정찬형 연구원에 놀라 뒷걸음질 쳐졌다. 정찬형 연구원이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에서 떼어 낸 것은 작은 스티커였다.
“이, 이게 왜…….”
“그러게요. 왜 이게 붙어 있었을까요?”
단지 머리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괜히 오버한 것 같아 민망해지려는 순간 정찬형 씨가 뒷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말로 설명해줄 걸 그랬나요? 놀랐다면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내가 더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계속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인사요?”
“네. 정식으로 인사한 기억은 없어서……. 그럼 해볼까요? 저는 바이오 제3팀 정찬형 연구원입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아. 네. 저는 트래블 코디네이터 문다율이에요.”
내가 한 손으로 책을 고쳐 잡고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 부담스럽지 않게 잡은 손을 흔들며 그가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
“너, 유나라 씨 알지?”
“누구?”
“기억 안 나?”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가을밤이니 곱창에 소주 한잔하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을밤과 곱창의 매칭을 의아해하는 지서준이었다.
그렇게 곱창집에 들어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곱창을 바라보며 지서준에게 물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너도 대단하다. 너한테 고백했던, 인사팀 유느님! 유나라 씨 몰라?”
“누구?”
“왜, 예쁘장해서…….”
내가 설명해도 그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황당했다. 고백했던 사람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고백했던 여자 중에 그 정도 미모의 여자들이 많아서일까. 어느 쪽이든 기분이 안 좋기는 똑같았다.
내가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겨우 기억을 떠올린 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여자? 그 사람이 왜?”
“요즘도 너한테 뭐 없어?”
나는 아직 익으려면 한참이나 남은 곱창을 이리저리 굴리며 슬쩍 물어봤다.
“뭘? 뭐가 없냐는 거야.”
“그냥…….”
그걸 또 굳이 꼬치꼬치 묻는 지서준.
“요즘 만난 적도 없어.”
그렇구나.
찝찝한 것 없이 뽀송뽀송해진 마음으로 곱창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해지려는데.
“아. 얼마 전에 있었구나.”
말린 빨래에 소나기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났어?”
“응. 사내 카페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말을 걸더라고.”
“뭐라고?”
“그냥, 잘 지내냐. 그런 안부?”
“그래?”
“응. 근데 뭔가 안다는 식으로 말해서 기분 나빴던 것 같은데.”
“뭘 알아?”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 이거 다 익었다.”
말하다 말고 작게 잘라져 있어 빨리 익은 곱창 하나를 내 소스 그릇에 올려주었다.
“여자친구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사생활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바로 돌아섰던 것 같네.”
나는 지서준이 내게 준 곱창을 소스에 콕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아. 뜨거. 후. 여자친구 뭐?”
“그냥, 잘 있냐고 물었던 것 같았는데. 말해야 할 이유 없잖아. 천천히 먹어.”
너무 뜨거운 곱창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지서준에게 묻자 지서준이 한심한 듯 바라보다 다 익은 하나를 입으로 호호 불어 내게 주었다. 나는 지서준에게 받은 곱창을 다시 지서준의 입에 넣어주었다.
“혹시 바이오 3팀 정찬형 연구원은 알아?”
“조금. 왜?”
지서준이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 이름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 사람이랑, 유나라 씨랑 사귀는 사이인 것 같더라.”
“그래? 잘됐네.”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에 인상을 곧바로 미간을 판판히 피고는 다시 곱창 굽기에 몰입했다.
“응. 팀장님 심부름 갔다가 내가 건물 맨 왼쪽 비상구 쪽으로 갔거든? 근데 거기가 좀 외져서 사내 비밀 커플의 성지랄까?”
“그런 곳이 있었어?”
“응. 나도 말만 들었지 처음 가봤는데, 거기서 그 두 사람을 봤지 뭐야.”
“그래? 왜 나는 몰랐지?”
“응. 유나라 씨가 나 보자마자 허둥지둥 사라졌거든? 둘이 비밀 연애하는 거 맞는 것 같지?”
“관심 없어. 근데, 거기가 어디라고?”
시큰둥한 지서준의 반응에 나는 김이 팍 새버렸다.
“그래. 네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두는 경우가 거의 없지.”
나는 노릇노릇 맛있게 익은 곱창을 보며 소주를 한잔 따랐다. ‘콜콜콜콜’ 소주가 잔에 떨어지는 소리는 청량했다.
“왜 말을 안 해. 거기 어디냐니까.”
“관심 없다더니 그건 왜 묻는데.”
아까 따라줬지만, 하나도 줄지 않은 지서준의 소주잔에 자체 건배를 한 후 입에 털어 넣었다.
“거기가 사내 비밀 연애 최적의 장소라며.”
“응.”
“가 봐야지.”
지서준이 그제야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소주를 삼키고는 씩 웃었다.
“오늘 집에 가야 하지?”
음흉한 놈.
“엄마한테 네가 허락받을래?”
“하하. 그래. 안 되겠다.”
“요즘, 우리 엄마를 조심해야 해.”
“왜?”
“내가 아팠을 때, 너랑 나 보고 의심했던 것 같아.”
“아…….”
자기가 생각해도 평소와 달리 행동했다는 걸 인정하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안 돼.”
“흠.”
지서준이 입을 삐쭉였다.
귀여운 놈.
“주말에, 주말에 네 오피스텔에서 온종일 빈둥거리자.”
내 말에 지서준이 내 잔, 그리고 본인의 소주잔에 소주를 넘칠 정도로 가득 남았다.
“콜.”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콜을 외쳤다.
“콜.”
공중에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도 콜을 외쳤다.
지서준과 뜨거운 데이트를 앞둔 금요일 저녁. 나는 지서준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해야 했다.
“미안, 진짜 미안.”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생일인 거 깜빡했다.”
-아. 맞다. 이맘때였지? 아……. 나도 잊고 있었네.
“응. 그래서 토요일에 못 만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케이크라도 사 갈까?
“아니야. 엄마가 아빠 빼고 외식하자고 해서 밖에 가서 먹고 올 것 같아.”
-아저씨는 왜?
“몰라 물어?”
-또 싸우셨구나.
“응. 하필 생일날……. 아무튼 종일 엄마 옆에 붙어서 화 좀 풀어드려야지. 일요일에 만날까?”
-상황 봐서 연락해.
“그래.”
지서준과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가니 내일 어디 갈지 핸드폰으로 열심히 검색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내가 묻자 엄마가 핸드폰을 내게 넘겼다.
“여기 가자.”
“오. 이런 데는 어디서 찾았대?”
아주 예쁘게 꾸며져 있는 식당이었다. 분위기도 좋아 보이고, 사진으로 봤을 때는 음식도 굉장히 깔끔했다.
“엄마 아는 사람이 딸이 생일에 거기 데려갔다고 하더라. 엄청 좋았대. 거기 가보자.”
“그래. 가보자.”
그리고 그다음 날.
“어? 여기는 어떻게…….”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