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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양봉업자 지서준. 듣고 있니? (52/97)


52화. 양봉업자 지서준. 듣고 있니?
2022.12.28.



“틈을 보이지 마.”

도이라의 말에 살짝 겁을 먹었다.


“어떻게 독해지는데?”

“일단, 무기가 많잖아.”

“무기?”

“얼굴 되지, 몸매 되지. 일단 화려하잖아.”

도이라는 얼굴과 몸을 손으로 훑어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근황 토크를 이어가다 얼마 전 유나라 씨의 도발 아닌 도발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도이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애들이 작정하고 들이덤빈다고 생각해봐.”

“아, 아냐. 지서준은 그런 거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네가 어떻게 알아. 기름녀도 엄청 예쁘게 생겼다며.”

“기름녀?”

“포도씨유? 카놀라유?”

“올리브유!”

“어? 어. 그래. 올리브유. 그 여자도 엄청 이쁘다며.”

“응……. 엄청 예쁘지.”

감자탕 국물이 튄 흰색 원피스도 소화하는 그녀였으니까.


“야. 너무 겁주지 마라. 진짜 지서준이 얼굴 봤으면 애초에 얘랑 안 만났지.”

고주연이 도이라를 말리며 말했다. 말려준 것은 고마운데, 화가 나는 이유는 뭔지. 고주연을 노려보며 다시 소주잔에 소주를 채웠다.


“안주도 먹어가며 먹어라. 속 버린다. 이제 우리 막 소주만 마시고 그럴 나이 아니다? 20대도 몇 개월 남지 않았다고.”

내 앞접시에 칼칼하고 시원한 홍합탕을 퍼 주었다. 그렇게 맛있는 홍합탕과 소주가 찬찬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야. 전화 오잖아.”

“뭐? 내 핸드폰 어딨는데.”

내가 핸드폰을 찾으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자 고주연이 내 바로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어서 내게 건넸다.

[지서준.]
 


“남자친구다. 남자친구.”

나는 액정에 뜬 지서준의 이름을 고주연과 도이라에게 보여주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 취했어?

단지 네 글자만 말했을 뿐인데, 심지어 그냥 ‘여보세요’만 했을 뿐인데, 단박에 취했냐고 물어보는 놈.

‘여보세요’에서 술 냄새라도 맡은 걸까.


“아니?”

-취했는데.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놈을 속일 수는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어디야.

“여기가 어디더라……. 얘들아. 여기가 어디더라?”

고주연과 도이라가 이곳이 어디에 있는 닭발집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해를 못 했다는 것.


“야. 여기가 거긴데.”

-거기가 어디야.

“그러니까 여기가…… 고주연, 여기가 어디라고?”

고주연이 내가 묻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어. 오랜만이다. 나 고주연. 어. 그래. 응. 여기가 어디냐면…….”

고주연이 지서준과 통화를 하며 이곳이 어딘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 오는 건가. 나 별로 안 취했는데.

전화 통화를 끊더니 내 가방에 핸드폰을 넣은 고주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서준 온대?”

도이라가 물었다.


“응. 20분 정도 걸릴 것 같다는데?”

야근한다던 지서준. 요즘 일이 많은 지서준이었다. 이 시각에 일을 끝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니.


“오지 말라고 하지.”

내 말에 도이라와 고주연이 나를 노려봤다.


“네 남자친구가 있는데, 취한 문다율을 우리가 챙기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내가 뭐 어때서. 나 안 취했는데?”

내 말에 도이라가 고주연한테 물었다.


“지서준, 좀 더 빨리는 못 온대?”

소주를 더 마시겠다며 소주병을 사수하는 나와, 그걸 말리는 도이라. 한동안 실랑이하다 이제 거친 말이 중간중간 섞이기 시작했을 때. 지서준이 닭발집 안으로 들어왔다.


“쟤는 아직도 쓸데없이 과하게 잘생겼네.”

지서준을 보며 도이라가 중얼거렸다.

내 남자친구가 닭발집에 들어오자 주위 몇몇 사람들은 지서준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네 여자친구 여기 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지서준에게 말했다.


“미친 거지?”

고주연의 말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내 존재를 알렸다. 사실 20평도 되지 않는 작은 가게에서 나를 못 찾을 리 없건마는, 지서준을 보고 눈을 반짝이는 여자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저놈은 여자친구가 있고, 그게 나요! 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많이 취했어?”

“아니? 나 안 취했는데?”

“너한테 묻는 내가 바보지.”

지서준이 나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는 그런 지서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 배에 턱을 받치고 지서준을 올려다보자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겨주었다.


 


“야. 여기서 연애하지 마. 짜증 나니까.”

도이라와 고주연이 나와 지서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희도 다 남자친구 있잖아.’

나는 내 친구들을 보며 눈으로 말하자 도이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주를 들이켰다.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네.”

지서준은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야 우리가 보이냐? 어?”

도이라가 이죽거리거나 말거나 지서준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소주병 수를 세기 시작했다.


“많이도 먹었네.”

“잔소리할 생각 하지 말고, 쓸데없이 키만 커서는……. 목 아프니까 앉아.”

주연이 손바닥을 휘휘 저으며 지서준에게 앉으라고 하자 지서준이 내 팔을 풀기 위해 내 손목을 잡았다.


“싫어. 싫어.”

내가 고개를 저으며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저게 미쳤나?”

도이라가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노려보았다.


“배 아프냐. 내 남자친구 잘생겨서?”

“맞네. 미쳤네.”

고주연이 비어 있는 소주병을 거꾸로 집어 드는 영상이 슬로 모션으로 재생되었다. 고주연의 손에 핏줄이 돋아나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슬쩍 지서준을 풀어줬다.


“얘를 누가 이렇게 먹였어.”

지서준이 자리에 앉으며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티슈를 3번이나 접어가며 테이블을 슥슥 닦는 모습을 보며 고주연이 혀를 찼다.


“너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래. 우리가 먹였겠냐? 어? 지가 먹었지.”

나를 잘 아는 지서준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는 계속해서 테이블을 정리했다.

나는 지서준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는데 점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지서준을 보고 싶은데, 이놈의 눈꺼풀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문다율 잔다. 빨리 자리 파하자.”

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자리를 파한 우리. 나는 지서준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닭발집을 나왔다.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어.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쟤만 집에 잘 데려다줘라. 뭐,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 우리는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

지서준은 거의 눈이 감겨있는 나를 옆에 끼고 친구들이 택시 타는 모습을 모두 확인한 후에 차로 향했다.


“일어나. 문다율.”

“음?”

지서준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벌써 집이야?”

“완전 취한 건 아닌가 보네. 집 앞이야. 일어나. 또 외박하면 아줌마 화내신다.”

“으…….”

나는 잠이 다 가시지 않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풍경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러곤 시계를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늦은 시각에 깜짝 놀랐다.


“잠깐 서 있었어.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자 지서준이 내 앞으로 물을 내밀었다.


“편의점도 갔다 왔어?”

“응. 잠깐만.”

내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비닐봉지에서 숙취해소제를 까더니 내게 건넸다. 지서준은 내가 순순히 받아먹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요즘 많이 힘들어?”

“웅?”

입에 가득한 약 냄새에 입을 헹구기 위해 물을 잔뜩 머금었다.


“회사에 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같던데.”

“아……. 너도 들었구나.”

나는 물을 꿀떡 삼키고 대답했다.


“별일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조금 신경이 쓰이네.”

“……미안.”

나는 지서준의 사과에 놀라 지서준을 보았다. 핸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잔뜩 미안한 표정의 지서준을 보자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네가 왜 미안하냐. 네가 뭘 했다고.”

“그래도…….”

“소문이야. 그냥 소문. 내가 진짜로 그 여자를 울리지 않았고, 나는 떳떳해. 그러니까 기죽지 않을 거야. 문폭스? 요즘 폭스가 대세야. 그래. 내 인생에 그런 날이 또 언제 오겠어. 그냥 좋게 생각할래. 그러니까 너도 미안하다고 하지 마.”

“…….”

갑자기 목이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물을 한꺼번에 마시고는 페트병을 와그작 구겨 버렸다.


“나 이제 간다.”

씩씩하게 말했지만, 수군대던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잘못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서준을 보자 갑자기 눈가가 홧홧해졌다. 혹 눈치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까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간다. 너도 조심히 들어가. 오늘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재빨리 인사를 내뱉고는 서둘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

소문이란 으레 양은 냄비 달아오르듯 금방 달아오르다, 어느 순간 빠르게 식기 마련이었다. 내 소문도 그러했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힘들었던지 살이 조금, 그러니까 정말 조금 빠져 있었다.


“역시, 맘고생 다이어트가 직방이네.”

주말, 엄마와 목욕탕에 갔다가 시원하게 묵은 때를 벗기고 나오며 체중계에 올라갔다. 줄어 있는 숫자에 씩 웃자 엄마가 다가오며 말했다.


“살 빠졌어?”

“응. 빠졌네?”

“때가 많이 나온 건 아니고?”

나는 엄마의 말을 살포시 무시하고 체중계에서 내려왔다.


“이번 추석에는 할머니 댁에 안 내려간다고?”

“응. 할머님 고모네랑 놀러 가신다네.”

“그래서 엄마가 기분이 좋구나?”

엄마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왜 요즘 마음고생했는데?”

아까 혼잣말로 했던 것을 들었나 보다.


“그냥, 회사 다니면서 생기는 일들.”

내가 얼버무리자 머리를 말리다 말고 나를 보았다.


“누가 너 괴롭혀?”

“응?”

“요즘 뉴스에 나오더라. 사내 왕따, 괴롭힘. 뭐 그런 거.”

“내가 왕따나 괴롭힘당할 사람인가?”

“그래. 네가 그렇긴 하지.”

사람들의 시선에 힘들긴 했어도, 대놓고 왕따를 시킨다거나, 괴롭힘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것들 있으면 가만두지 마. 그만두겠다는 각오하고 덤비란 말이야.”

“나 그만두면 뭐 먹고 사는데?”

“걱정하지 마. 뭐든 해 먹고 살겠지.”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고 투덜거렸지만, 내심 엄마의 말이 힘이 되었다.


“그럼, 우리 추석 때 집에서 빈둥거리면 되는 건가?”

“아니. 윤희네랑 여행 가기로 했어.”

“여행?”

추석은 앞으로 2주나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진작 말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어디로? 부모님들만?”

“아니, 너랑 서준이도 갈 건데?”

“내 의사는 왜 안 묻는 건데?”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다 말고 엄마에게 따지고 묻자 엄마가 말했다.


“너랑 서준이 이제 시집 장가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같이 놀면 좋지.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해서 뭐해?”

“다 큰 딸 끼고 다니면 좋아?”

“좋아.”

새침이 대답하고는 옷을 입으러 향하는 엄마.


“앞으로 너랑 더 시간 많이 보낼 거야.”

“갑자기 왜 그러셔?”

말없이 옷을 갈아입던 엄마가 세면도구를 목욕 바구니에 예쁘게 착착 정리했다. 끝으로 컨디셔너를 욱여넣고는 엄마가 내게 바구니를 넘겼다.


“엄마, 갱년기인 것 같아.”

“또?”

 

**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검색창에 갱년기를 검색했다. 갱년기는 도대체 언제까지가 갱년기인가.


“언제 괜찮아지는 거야.”

부쩍 아빠와 싸움이 잦아지던 엄마. 갱년기에 좋은 영양제 하나를 구매했다. 알다가도 모를 호르몬.

그래도, 딸이 이해해주지, 누가 이해해주나. 나는 넉넉히 윤희 아줌마 것까지 구매했다.


“지서준.”

-응.

나는 쇼핑을 마치고 지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석 때 우리 여행 가는 거 들었어?”

-응. 어제 들었어.

“괜찮겠지?”

-뭐가?

“우리 안 들키겠지?”

-음……. 들키면 어쩔 수 없지.

이 자식이.

아무래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눈빛 관리 좀 해줄래? 꿀이 너무 뚝뚝 떨어지잖아. 네가 연구원인지, 양봉업자인지 헷갈리겠네. 부업으로 벌 좀 키우시나 봐요.”

-…….

“여보세요? 내 말 듣고 있니? 거기 아무도 없니?”

그렇게 지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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