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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수상해. (53/97)


53화. 수상해.
2023.01.01.


추석이 다가올수록 더욱 일하기 싫어지는 건 긴 연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일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연휴를 목전에 둔 때에는 일하기 싫어 증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팀장님은 해외에 가신대요.”

백인하 씨와 점심을 먹던 중. 추석 연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본가에 가면, 아직도 시집가라고 하신다네요.”

골드미스 팀장님은 꽤 본인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아직도 결혼하라며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결혼이 필수가 아닌데 말이죠.”

“저도 요즘 조금씩 결혼에 대해 압박이 들어온다고요. 인하 씨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네? 벌써요?”

나는 반찬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 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할 기세라고요.”

“그러시구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인하 씨에게 물었다.


“인하 씨는 추석 연휴에 뭐 해요?”

“저는 시골 본가에 내려갈 예정이에요. 작년에 여행 간다고 안 내려갔더니, 올해는 꼭 내려오라고 난리세요.”

얼마 전 기차표를 사기 위해 핸드폰으로 알람까지 맞추며 만반의 준비를 하던 그녀였다. 귀경길을 준비하는 그녀를 보니, 명절 분위기가 더욱 피부 가까이 다가왔다.

회사 분위기도 연휴로 들떠 있었다.

추석 전, 사원들 상대로 햄 세트 선물이 나왔고, 나는 선물을 덜렁덜렁 들고 퇴근하려 회사에서 나섰다.


-집에 가는 거야?

“응. 이제 막 회사에서 나왔어.”

지서준에게 먼저 퇴근한다고 문자를 하니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같이 저녁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응. 미국 본사에서 연락이 와서……. 아쉽네.

“내일 만날 건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

목소리만 들어도 지서준이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일 만나는데도 오늘 못 보는 것이 아쉬운 지서준이 귀엽게 느껴졌다.


-단둘이 있는 게 아니잖아.

달달한 지서준의 말에 퇴근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내일 일찍 올 거지?”

-응. 그래야지.

“내일 보자.”

-그래. 집에 도착해서 연락해.

지서준의 아쉬움이 나에게 옮겨왔는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들고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문다율 대리님?”

정찬형 연구원이 나와 같은 선물 세트를 들고 서 있었다.

이크.

이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같은 회사이다 보니 이런 우연까지는 막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하하.”

나는 최대한 난처한 표정을 감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네. 연구원님도 지금 퇴근하세요?”

“네.”

그러고는 그가 내 옆에 섰다.


“버스…… 타고 가세요?”

“오늘은 버스 타고 가려고요.”

상큼하게 웃고는 버스가 어디쯤 오나 확인하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추석에 어디 가세요?”

“아. 가족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요.”

“그러시구나. 저는 본가에 가야 해서요. 참고로 저는 설거지 담당입니다.”

그가 추석에 본인이 맡은 일을 설명하며 발꿈치를 한 번 들었다 내렸다. 그 모습이 꽤 잘 어울렸다.


“다행히 가족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동안 힘들진 않았는데, 올해는 조카들도 전부 우리 집으로 출동한다고 하네요.”

갑작스럽게 시무룩해진 정찬형 연구원.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말하자 그가 산들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때려 부술지도 모르는 것들은 모두 숨길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주부습진이라도 걸리면 어쩌죠?”

정잔형 씨가 손을 쫙 피고는 내게 손을 쭉 내밀었다.


“고, 고무장갑을…….”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거뒀다. 잠깐 자기 손을 살펴보더니 나를 바라봤다.


“혹시, 제가 부담스러우세요?”

“네?”

그때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저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상황에 ‘저는 이만!’하고 냉큼 버스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안타깝게도 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저도 소문 들었습니다. 아……. 엄청 미안해서 혼났다고요.”

소문이라면 아마도 그 소문이겠지. 그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미 소문도 많이 잠잠해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문다율 대리님이 꽤 힘들었을 것 같아서요.”

그의 표정은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사과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찾아가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그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사과라니. 그래도 그의 말이 고마웠다.


“정찬형 연구원님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그래도, 저로 인해서 피해받으신 거니까…….”

그가 이번에도 살짝 발뒤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저…….”

그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저만치에서 다시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저, 버스가 오네요. 이번에는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 네! 제가 붙잡고 있었네요.”

버스가 서고 사람들 줄 맨 뒤로 가 섰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버스 창밖으로 그가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고, 그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



“엄마. 이렇게 빨리 출발해야 하는 거야?”

새벽 5시.

전날 다 싸놓은 짐을 현관문 앞에 놓으며 물었다.


“추석 연휴라서 길 막힐 게 뻔한데, 빨리 출발해야지.”

아침잠이 많은 아빠와 나는 하품을 쩍쩍하며 짐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많이 들떠 있었다. 강원도에 펜션을 잡아 2박 3일간 놀러 가기로 한 후 엄마는 며칠 전부터 기대감에 차 있었다.


“문다율. 네 것 뭐 빠트린 것 없어?”

“응. 으아함. 없어.”

내가 하품을 하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아빠도 하품이 옮았는지 하품했다. 엄마가 빠트린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할 때, 지서준에게 전화가 왔다.


-준비 다 했어?

“응.”

-내려와. 짐 실어 놓게.

지서준의 차와 부모님 차 중 한 대만 끌고 가기로 했다. 짐을 가지고 1층으로 나가니 지서준의 차가 보였다.


“무슨 짐이…….”

짐의 양에 놀라 인사하는 것도 잊고 입이 벌어진 지서준.


“서준이 일찍 왔네. 어제 늦게까지 일했다더니. 피곤해서 어째?”

“아, 안녕하세요.”

엄마가 챙이 넓은 모자를 벗으며 지서준에게 인사하자 그제야 집 나간 정신이 돌아왔는지 평소처럼 깍듯이 인사했다.


“서준이. 오랜만이구나.”

아빠는 여전히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윤희 아줌마와 아저씨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나오기로 했다며 지서준이 설명하자 엄마가 서준의 차와 윤희 아줌마네 차에 실을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야. 뭐 뺄 건 없어?”

지서준이 나를 툭 치며 귓속말로 말했다.


“없어.”

내 단호한 말에 이 짐들을 어떻게 실어야 하나 고민하다 가장 큰 짐부터 트렁크에 싣기 시작했다.


“어머! 다율 엄마. 오늘 예쁘게 입고 왔네.”

지하 주차장에서 막 올라와 한쪽에 차를 세우고 승호 아저씨와 윤희 아줌마가 내렸다.


“자기는 더 예쁜데 뭐.”

아무래도 두 아줌마가 옷을 맞춰 입었는지 예쁜 꽃무늬 원피스가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계절을 잊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니, 이 짐은 다 뭐예요. 우리 이사합니까.”

예전에 지서준이 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승호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자 윤희 아줌마가 아저씨 팔뚝을 찰싹 때리고는 말했다.


“다 가서 쓸 일이 있으니까, 입 다물어요.”

팔뚝을 쓰다듬으며 승호 아저씨는 우리 아빠와 지서준과 함께 테트리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에 다 실리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감탄했다.


“자. 이제 차가 막히기 전에 빨리 출발합시다.”

트렁크 문을 탁 닫고는 아빠가 손을 탈탈 털었다. 짐을 실을 동안 어떤 걸 준비해왔는지 늘어놓던 아줌마들이 차를 보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새 차가 좋겠지?”

내가 은근슬쩍 지서준의 차로 향하는데 윤희 아줌마의 시선이 지서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가다 말고 멈칫했다.

사실,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한 차에 몰아넣고 단둘만의 드라이브를 꿈꿨다. 그런데 그 꿈이 산산이 조각나기 바로 직전이었다.


“승호 아저씨 심심하지 않을까요?”

나는 슬쩍 아줌마들을 다른 차로 태우기 위해 입에 시동을 걸었다.


“다율이가 타면 저 사람은 심심할 겨를이 없을걸?”

아줌마의 반박에 이번에는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엄마가 불쑥 발걸음을 승호 아저씨 차로 옮겼다.


“익숙한 차가 좋지. 저 차는 젊은 애들 둘이 타라고 하고, 우리는 이 차 타고 수다 떨며 가자고.”

엄마가 차 뒷문을 열고 어서 오라며 윤희 아줌마를 불렀다.


“그럼, 다율 아빠가 운전하고 나도 애들이랑 같이 갈까?”

눈치 없는 승호 아저씨의 말에 우리 엄마가 소리쳤다.


“빨리 와요!”

그렇게 두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이 시작되었다.

**



“문문. 너나 티 좀 내지 말지?”

“뭐가?”

나는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지 않기 위해 껌을 질겅질겅 씹었다.


“들키면 어쩌나 고민하더니, 나랑 같이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던데?”

지서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런 지서준을 살짝 째려본 후 내 손가락을 지서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둘이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어르신들 모시고 여행 가는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내 말에 한여름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하게 웃던 지서준이 승호 아저씨 차를 안전하게 뒤따랐다.


“아주머니 기분 좋아 보이시더라.”

“응.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에 놀러 가는 거니까.”

“그러네. 너희는 항상 친척들이 다 모이곤 했으니까.”

지서준의 할머니는 미국에 계시기 때문에 명절에는 항상 가족끼리 여행을 가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가 본가에서 올라오면 시골에서 싸 온 반찬을 서준이네 가져다주라며 심부름시키곤 했다.

설레는 기분도 잠시, 조금 시간이 흐르자 고속도로가 막히기 시작했고, 예상보다 계속해서 늦어지는 시간에 우리는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자리 잡기도 힘드네.”

겨우 우리 6명이 앉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휴게소를 훑어보니, 장시간 운전에 지친 사람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설렘이 가득한 사람들로 붐볐다.

나와 지서준, 그리고 아빠와 아저씨가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즐겁게 식사하고 휴게소를 나서기 전.


“나 저거 사줘.”

“너는 그렇게 먹고도 그 정도 몸매면 축복받은 몸매야.”

지서준이 내 옆구리 살을 살짝 꼬집었다.


“야!”

내가 지서준의 손을 찰싹 때렸다.


“뭐 먹고 싶다고?”

뭐라고 한소리 하기도 전, 지서준이 카드를 꺼냈다.


“알감자.”

순순히 알감자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지서준을 보며 실실 웃었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어른들. 차 앞에서 알감자를 먹고 있는 나는 윤희 아줌마의 말에 목이 탁 막혀버렸다.


“이번에는 우리가 서준이 차에 탈까?”

윤희 아줌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옆에서 물을 주며 지서준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나는 알감자가 담긴 그릇을 꽉 움켜쥐었다. 어쩌지, 이번에는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기지?


“그냥, 타던 거 타고 갑시다.”

그때, 우리 엄마가 윤희 아줌마의 팔짱을 끼고는 승호 아저씨 차로 향했다. 나는 승호 아저씨 차로 올라타는 두 꽃무늬 원피스를 바라봤다.


“수상해.”

“뭐가?”

옆에서 알감자 하나를 뺏어 먹던 지서준이 물었다.


“아주 수상해.”

나는 호호 웃으며 차에 올라타는 엄마를 지긋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왜 우리 엄마가 윤희 아줌마를 데리고 굳이 승호 아저씨 차를 탔는지,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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