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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손들고 질문합시다. (55/97)


55화. 손들고 질문합시다.
2023.01.08.



“누가 서준이랑 사귄다고요?”

나는 엄마와 대화를 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나와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승호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승호 아저씨는 나와 엄마를 보더니 차 키를 툭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다시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서준아!”

나는 황망히 아저씨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엄마에게 말했다.


“어, 엄마…….”

“아휴. 하필 서준이 아빠한테 들킬 건 뭐람.”

엄마가 아저씨가 호들갑 떨며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저씨가 활딱 열어 놓은 문을 보고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저씨!”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아저씨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진짜니?”

윤희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가자 윤희 아줌마가 날 발견하고는 손뼉을 쳤다.


“다율아. 어머.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네. 응? 언제? 언제부터야?”

승호 아저씨도 그저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 지서준을 내버려 두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다율아. 이 아저씨는 추석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왜 지서준은 가만히 놔두고 나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지는 건지. 나는 지서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내 눈빛을 본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아줌마 아저씨에게 다가왔다.


“다율이 괴롭히지 말고, 저한테 물어보세요.”

“어머! 여자친구 감싸는 것 봐. 그래. 여자친구는 네가 감싸줘야지. 그럼 그럼.”

“아니지. 나를 보고 잘 자란 거지. 하하하.”

지서준의 한마디에 아줌마, 아저씨가 방죽 물이 터지듯 말을 쏟아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언제 들어왔는지 엄마가 손에 든 짐을 내려놓으면서 혀를 찼다.


“자기는 알고 있었어?”

거의 영혼의 반이 빠져나간 나를 두고 이번에는 엄마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이것들이 하도 티를 내니까 모를 수가 없었어.”

“다율 엄마 혼자 알고 있었단 말이야?”

“나한테는 말을 해줬어야지! 배신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줌마와 아저씨의 타깃이 바뀌면서 나는 잠깐 머리를 식힐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당장에 결혼식장부터 잡을 어른들 때문이었다. 바로, 우리 엄마와 승호 아저씨.

하지만, 엄마는 의외로 차분하고 쿨하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승호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흥분으로 볼이 붉어져 있고 광대는 하늘로 승천하듯 잔뜩 올라가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슬쩍 지서준을 바라보자 지서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지서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듯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 다들 앉아서 흥분 좀 가라앉히세요. 네?”

내 말에 열띤 공방을 벌이던 어른들이 말을 멈추고는 한 명씩 쪼르르 거실 소파에 앉았다.


“커피 한 잔씩 하실래요?”

지서준은 어른들이 조금 누그러지자 재빨리 커피를 권했고, 고개를 끄덕인 부모님들을 위해 커피를 타기 위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자. 다들 흥분을 가라앉혔으면, 하나씩, 한 명씩 물어보세요.”

“언제…….”

“누가 먼저…….”

“왜…….”

나의 한마디에 세 마디가 튀어나왔다.


“아! 한 분씩이요! 발언은 손들고 하세요!”

내 말에 승호 아저씨가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승호 아저씨.”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저씨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질문했다.


“결혼은 언제 합니까.”

“그 질문은 기각합니다.”

나는 냉정하게 아저씨 질문을 쳐냈다. 할 말이 많은 듯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윤희 아줌마가 아저씨를 뒤로 밀고는 손을 들었다.


“네. 아줌마.”

“언제 사귄 거야?”

그때 지서준이 커피를 들고나와 어른들 앞에 한 잔씩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됐어요. 여름?”

지서준의 말에 아줌마는 빵싯 웃으며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야. 너희는 왜 사귄다고 말을 안 한 거야? 어?”

엄마가 팔짱을 풀고는 지서준이 타준 커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 손들고 질문합시다.”

승호 아저씨의 말에 엄마가 찌릿 째려봤지만, 아저씨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들었다.


“누가.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야? 응?”

아저씨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말했다. 나와 지서준은 아저씨의 질문에 서로를 바라봤다.


“제가 먼저 했어요. 제가 먼저 좋아했고요.”

지서준의 말에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내 아들,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칭찬했다.

지서준의 답변이 끝나자 엄마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네. 김 여사.”

내가 준 발언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엄마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지만, 별다른 말 없이 질문했다.


“왜 숨겼냐고.”

“그건……. 쑥스럽기도 하고…… 당장 결혼시킨다고 날짜부터 잡을 분들이니까.”

내 말에 아저씨가 뜨끔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둘이 결혼 안 해?”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우리 사귄 지 몇 달 안 됐어. 결혼 생각을 벌써 해?”

내 말에 엄마와 아줌마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막 입을 여는 순간. 지서준이 말했다.


“저희가 아직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나,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지서준의 말에 아줌마들의 조금 벌어졌던 입이 스르르 닫혔다.


“어른들이 어떤 걱정을 하는지도 아는데, 결코 장난스럽다거나, 단순히 호기심으로 만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지서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결혼을 준비해야……. 악.”

승호 아저씨는 지서준의 진지한 말에 팔짱을 끼고 살짝살짝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다 아줌마가 아저씨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 너희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 둘이 예쁘게 잘 사귀었으면 좋겠네.”

아줌마의 말에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응. 서준이가 섭섭하게 하는 일 있으면 아줌마한테 일러야 해. 알겠지?”

“서준이가 잘해줘요.”

“그래?”

그때, 방에서 아빠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엄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

여행하는 내내 지서준과 나는 온몸이 따끔거렸다.


“나 물 좀.”

내가 목이 말라 지서준에게 말하자 벌떡 일어나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넸다. 물컵을 받아드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서준이는 다정하기도 하지.”

혼자 무언갈 열심히 하는 아저씨를 슬쩍 보니, 역시나 아들 결혼시키는 준비과정을 열심히 검색하고 계셨다. 그 후, 검색창에 좋은 시아버지 되는 법, 며느리에게 사랑받는 법 등을 검색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바닷가에 가서 산책할 때, 일부러 걸음을 늦춰 우리와 한참을 떨어져 걷는 부모님들. 잠깐잠깐 사진 찍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나는 부쩍 피곤한 몸으로 여행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 밤 산책을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지서준에게 오래 있다 와도 된다며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내가 이럴까 봐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난 마음은 편하다.”

“넌 이 상황이 마음이 편하니?”

그러자 입꼬리를 올려 고개를 끄덕이는 지서준.


“그래. 너라도 좋으면 됐다.”

내가 다시 한숨을 푹 쉬자 피식 웃더니 내 어깨를 감싸 제게 바짝 당겼다.


“이제 문문 집에 안 보내도 되나?”

조금은 끈적한 목소리가 늦가을 풀벌레 소리와 함께 귀로 들어왔다.


“되겠니? 아마 더 참견하실지도 몰라.”

그런 상황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지서준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금 더 걷자 막다른 길이 나왔고 다시 돌아가는 길. 훤한 달빛이 가로등을 켠 듯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럼, 그냥 결혼할까?”

“뭐?”

외박이 되지 않니 결혼하자는 지서준.


“우리가 서로 더 알아볼 기간이 필요한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지서준을 오래 봐 왔다. 그 기간에 지서준에 대한 정보가 쌓이고 그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지금 지서준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싫어.”

나의 단호한 말에 조금 놀란 듯한 지서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달이 내뿜는 달빛이 지서준의 얼굴에도 내려앉았다.

잘생긴 얼굴이 달빛에 더 그윽해 보였다.


“왜?”

나를 잠깐 내려보던 지서준이 내게 물었다.


“나는 지금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나는 잘생긴 지서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가락을 올려 지서준의 눈썹을 슥슥 만졌다.


“지금은 너랑 연애하고 싶어.”

내 말에 눈썹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풀렸다.


“결혼하고서 연애해도 돼.”

“그건 다르지.”

내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내 손길을 피했다. 바닥에서 나무를 비추고 있는 조명을 노려보던 지서준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해가 안 가. 왜 네가 망설이는지. 나는 결혼해서도 너랑 이렇게 연애하면서 살 수 있는데…….”

나는 지서준의 얼굴을 붙잡고 나를 보게 했다.


“결혼하면 좋겠지. 저녁에 헤어질 일 없고, 항상 같이 있고 서로에게 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주는 거. 좋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서준의 매끈한 볼에서 손을 떼고 지서준의 허리에 내 팔을 둘렀다.


“나는 지금은 헤어지고 난 뒤에 아쉬운 마음도 좋고, 그리운 마음도 좋고. 침대에서 너랑 깊은 밤까지 통화하는 것도 좋아.”

지서준은 가만히 축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나를 감쌌다.


“아직도 이해 안 가지?”

“…….”

대답은 없었다. 지서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완벽히 이해는 안 가지만,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볼게.”

“고마워.”

“그러니까 너도 노력해줘. 나를 이해하도록.”

“그래. 서로 노력하자.”

내가 지서준의 가슴에 턱을 괴고 올려다보자 지서준이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서준의 입술. 그 예쁜 입술이 내게 점점 다가왔다.

그때.

‘띵동.’


“핸드폰이 눈치가 없네.”

내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벨소리가 들렸다. 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대로 멈춰선 지서준.


“그냥 해.”

내가 재촉하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전화 오면?”

나는 툴툴거리며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꿨다.


“됐어?”

내가 입술을 비쭉 내밀고 말하자 짓궂은 표정을 짓던 지서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



“좋은 시간 보냈니?”

나와 지서준이 들어가자 부모님들이 맥주를 기울이다가 한마디씩 했다. 나는 대충 대답한 후 지서준을 홀로 남겨두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 맞다. 아까 메시지 왔었는데.”

지서준과 시간을 보내다 메시지가 온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즐거운 추석 보내고 있으신가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정찬형 연구원이었다. 무음으로 바꾼 후에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해 있었다.


[저는 열심히 설거지하고 퉁퉁 부은 손으로 열심히 밤을 깠네요. 문다율 대리님은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죠?]

울고 있는 귀여운 캐릭터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였다.

보내야 하나…….

이대로 씹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고심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즐거운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연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찬형 연구원님도 즐거운 추석 보내길 바랄게요.]

너무 쌀쌀맞은가?

잠깐 고민하며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붙여서 메시지를 보냈다.

‘똑똑.’


“네!”

메시지를 막 보낸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와. 과일 깎았어.”

지서준이었다.


“나갈게!”

나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잽싸게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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