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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고마우면 밥 한 끼 사줄래요? (56/97)


56화. 고마우면 밥 한 끼 사줄래요?
2023.01.11.



 


“아. 회사 가기 싫은데?”

이 말만 몇 번을 반복하는지. 추석 연휴가 끝나고 회사 가는 날이 밝았다. 어젯밤은 얼마나 우울했던지. 눈을 뜬 순간부터 되뇌기 시작해서, 회사 근처 정류장에 다 와 가는 지금까지 나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최근 들어 가장 힘없는 내 아침 인사.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연휴의 달콤함이 몸에 남아 있는지 역시나 축 처진 얼굴로 나에게 인사했다.


“대리님. 오늘 유독 더 힘든 건 왜죠?”

“몸이 편안함을 알아버렸어요. 그래서 그래요.”

“으아…….”

출근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에 엎어진 인하 씨였다.


“출근하자마자 할 일이 산더미인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드네요.”

인하 씨는 책상에 한쪽 볼을 대고 투덜거렸다. 그때, 팀장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의 등장에 몸을 휙 일으킨 인하 씨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네? 그럴 리가요. 로또 당첨이 되지 않는 이상, 회사 오는 날에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겠어요.”

꽤 경쾌한 목소리에 전혀 다른 내용이 들려왔다. 나와 백인하 씨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 다들 이번 주부터 바쁜 거 알고 있죠? 늘어져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다들 커피 한잔하고 시작할까요?”

팀장님 커피를 산 이유는 분명했다. 출근한 뒤 얼마 후부터 우리는 일에 파묻혀야 했고, 점심시간도 제대로 즐길 여유 없이 자리에 돌아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야 했다.


“대리님, 조금만 쉬었다가 해요.”

“오늘 야근은 확정인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가고 싶어요.”

나는 영혼 없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누르며 답했다.


“인하 씨는 쉬다 와요.”

“그럼, 잠깐만 쉬다 올게요…….”

그녀가 내 눈치를 보다 사무실에서 나가고 내가 누르는 키보드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똑똑.”

누군가 입으로 노크했다. 모니터에 박혀 있던 눈을 돌려 사무실 입구를 바라보니 그곳에 정찬형 연구원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지금 이 시각에 여긴 어떻게…….”

내가 어정쩡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아. 지나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들러봤는데, 설마 지금 일하시는 중이세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물었다.


“아. 네. 연휴가 끝나자마자 일이 잔뜩 쌓여 있네요.”

“이런…….”

내 말에 더욱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꽤 유용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내민 것은 비타민 음료였다.


“어…….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요. 저도 받은 겁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정찬형 연구원이 긴 팔을 쭉 뻗어 내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더는 거절하는 것도 민망해 음료를 바라보며 고맙다 인사했다.

잠깐의 정적.

사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가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음료 잘 마실게요.”

정찬형 연구원이 가볍게 인사하며 나가는 길. 한 손에 커피를 든 백인하 씨가 들어오다 그와 마주쳤다. 백인하 씨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정찬형 연구원님이 여기 왜 오신 거예요?”

“글쎄요?”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가 주고 간 비타민 음료의 뚜껑을 열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음료가 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자. 이제 다시 일해볼까.”

나는 음료수를 한 번에 다 들이키고, 비어버린 병을 분리수거 한 후, 다시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바쁜 나날이 하루 이틀,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일이 터져 버렸다.


“일단, 대사관에 연락해봐요.”

“연락했습니다. 답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발이 묶인 직원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호텔에 있다고 합니다.”

“호텔에서 공항까지 가는 차량 준비 가능하다고 하나요?”

“현재 호텔에서도 찾고 있는데,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 알겠습니다.”

바이오 4팀이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질병 중 하나를 연구하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내전이 시작되면서 위험에 처한 상황. 우리 팀은 비상이었다.


“대리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백인하 씨는 혼이 다 빠진 표정이었다.

자정이 넘어간 시각.

우리 사무실만 훤히 불을 켜고 있었다. 그 나라 시간대로 맞춰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기 위해 회사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겪으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모두가 비상사태였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대사관과 소통을 많이 하며 직원들에게 빠른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정말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해서 대사관과 연락하며 현지 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계엄령의 변화가 있는지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했다.

다행히 대사관에서 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아직은 큰 변화가 없는 듯했다.

째깍째깍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와 어딘가와 오래 통화하는 팀장님. 그 소리만 우리가 근무하는 층에 울려 퍼졌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팀장님을 향해 우리 팀 모두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현지에 안전관리 회사 직원과 통화했습니다. 다행히 아직 공항은 폐쇄되지 않은 상태라네요.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직원들 공항으로 이송할 예정입니다. 바로 차량을 알아보겠답니다.”

나는 팀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항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차량이 매우 중요한 상황. 호텔에서 차량을 구할 수 없다면 믿을 수 있는 것은 안전관리 회사였다.

내전으로 안전관리 회사와 연락이 닿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현재, 우리가 확보한 항공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 직원들 안전하게 호텔에 머물고 있는지도 또 한 번 확인해 주세요.”

교민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전세기를 띄울 수 없는 상황. 항공권 확보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네.”

나와 백인하 씨는 동시에 대답했다.


“인하 씨는 호텔에 있는 직원들이랑 계속 소통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보이자, 긴장이 조금은 풀어진 듯한 인하 씨가 비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예약한 항공권을 확인했다.

정말로 중요한 일. 비즈니스 항공권 2장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한번 항공사에 연락해 항공권 확인을 마쳤다.

전시상황에서는 일반석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웃돈을 주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 아예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으로 예약하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이것도 다 내가 이 회사에서 꼬꼬마 시절에 겪었던 시행착오였다.


“팀장님. 항공권 더블 체크되었습니다.”

“그래요.”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여 확인한 후 다시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회사 직원이 제3국으로 나왔을 때, 묶게 될 호텔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 표까지 다시 확인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직원들의 안전을 바라며 대기하는 시간이 흘러갔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회사 창문으로 아침 햇볕이 따갑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며 인하 씨를 바라봤다.


“인하 씨. 잠깐 눈 좀 붙여요.”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전화기만 노려보던 인하 씨를 보고 휴게실에서 잠깐 쉬기를 권했다.


“네? 어떻게 저만…….”

주저하는 인하 씨를 보고 팀장님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요. 문 대리 말 들어요. 만약 차량이 제대로 안 구해지면, 또 다른 할 일들이 쏟아질 겁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쉬도록 하죠.”

장기전이 된다면 정말 말 그대로 체력싸움.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상황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네. 그럼 조금만 쉬고 올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주셔야 해요.”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터덜터덜 사무실에서 나갔다.


“팀장님. 아직 안전업체에서는 연락이 안 왔죠?”

“네. 아무래도 차량을 수배하는 데 애를 먹고 있나 봐요.”

나는 다시 긴장감의 끈을 붙잡고 혹시나 오늘 직원들이 공항으로 가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다음 날 탈 수 있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됐다.

조금씩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대사관에서부터 날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 동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우리 회사 직원 탈출시키기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 가 있는 연구원 중 한 명이 이런 일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어떻게 해야 가장 안전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이 있던 동료를 안심시키고 우리와 함께 적극적으로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기를 3일째.

[4팀 소식 들었습니다. 그곳의 다른 호텔에 머문 적이 있어서 그 호텔에 연락해봤더니, 차량 수배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정찬형 연구원에게 사내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팀장님!”

나는 곧바로 팀장님에게 소식을 알렸다. 팀장님이 벌떡 일어나 정찬형 연구원에게 바로 연락했고, 정찬형 연구원이 바로 우리 사무실로 올라왔다.


“저…….”

머뭇머뭇 들어온 정찬형 연구원의 팔을 잡아끈 팀장님이 미리 빌려둔 회의실로 끌고 갔다. 우리 팀 전원, 그리고 정찬형 연구원은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차량은 손쉽게 수배가 되고 준비 절차가 끝나는 대로 현지에 있는 직원들과 만나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일단 공항까지 가서 안전업체와 접선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도록 하죠.”

현지에 있는 직원들이 공항까지 데려다줄 차량이 만날 때까지 정찬형 연구원은 함께해줬다.


“정말 고마워서 어쩌죠?”

팀장님의 말에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그가 손사래를 쳤다.


“저도 아프리카로 출장 가봐서 알아요. 얼마나 힘든지. 같은 연구원으로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인사한 그가 회의실로 나가고 나는 그를 뒤쫓았다.


“너무 감사해요.”

“하하. 네. 도움이 됐다니 기분이 좋네요.”

“저희 도와주시느라 일이 밀리지는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조금만 야근하면 되죠?”

야근해야 한다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미안하죠?”

“당연하죠. 고맙고 미안하네요.”

내 말에 싱긋 웃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밥 한 끼 사줄래요?”

“네?”

“그렇게 고맙고 미안하면 밥 한번 사주세요.”

“밥이요?”

“네. 설마 아까운 건 아니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묻는 그의 얼굴에는 익살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네. 제가 꼭 사드릴게요.”

“네. 그럼 이 일 해결되면 그때 사주세요.”

“네.”

그가 돌아서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회의실 복도를 휘적휘적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우리가 있던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대리님. 팀장님이 찾으세요.”

“네. 갑니다.”

나는 서둘러 회의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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