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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거짓말. (57/97)


57화. 거짓말.
2023.01.15.



“직원들 제3국에 도착해서 방금 호텔에 들어갔답니다.”

“하……. 이제야 살 것 같네요.”

며칠 동안 고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강인한 리더십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팀장님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짙게 깔렸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팀장님에게 인사하자 생긋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닙니다. 우리 직원들이 안전하게 한국까지 올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힘냅시다.”

그렇게 발등의 떨어진 불이 사그라들었다. 발등의 불이 꺼지니 그제야 정찬형 연구원이 사달라는 밥이 생각이 났다.


“사긴 사야 하는데…….”

정찬형 연구원의 도움이 컸다. 그에게 밥 한 끼 사는 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밥에 커피까지 풀코스로 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마음 한구석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내 인생에는 절대 없을 것 같았던 단어. ‘스캔들’과 ‘여우’ 그 단어와 연관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접해야 하나 하다가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완벽히 사건이 해결된 후. 나는 고민 끝에 정찬형 연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정찬형 연구원님 덕분에 직원분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일전에 밥 한 끼 대접하겠다고 했던 약속 지키고 싶은데 언제가 괜찮을까요?]

문자를 보낸 후,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데 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니, 핸드폰을 들고 사나……. 이렇게 빨리 답장이 와?”

나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일은 잘 해결됐어?]

정찬형이 아닌, 남자친구 지서준에게 온 문자였다. 최근에 일이 터지면서 틈이 날 때 간단히 문자만 했지 제대로 된 연락도 못 했었다.


[응. 오늘 새벽에 직원들 무사히 귀국했어.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지서준에게 문자를 보내다 얼떨결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거울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양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좋냐 문다율.

나는 올라간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억지로 꾹 내렸다. 그러나 다시 쓱 올라가는 입꼬리. 저녁에 만나자는 지서준의 말에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 못 봤다고 아무래도 지서준이 꽤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퇴근하고 오피스텔로 가 있을게.]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낸 후. 키보드를 두드려대며 흘끔흘끔 문자가 왔는지 핸드폰을 확인했다.

‘딩동.’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기쁜 마음에 잽싸게 확인했다.


[문다율 대리님이 편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정찬형 연구원에게 온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잡는 게 좋겠지? 왠지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에 정찬형 연구원과 최대한 이른 날짜를 찾아 점심 약속을 잡았다. 빚 청산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

약속을 잡은 뒤, 그동안 비상사태 체제로 돌아가느라 기존에 했던 일 중 소홀했던 부분은 없나 빠르게 체크해나갔다.

그렇게 밀려 있던 일들을 확인하고 나니, 벌써 퇴근 시간.


“자. 오늘은 다들 일찍 들어가서 쉽시다.”

“네!”

팀장님의 반가운 말에 우리 팀 직원들이 모두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지 팀장님은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잽싸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팀장이 일찍 퇴근해야 다들 좋겠죠?”

역시. 팀장님.

내가 엄지를 추켜 올리자 눈을 접어 웃어 보인 팀장님이 팀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네곤 빠른 몸놀림으로 사무실에서 퇴장했다.


“제 롤모델이에요.”

내가 옆에서 짐 싸고 있는 인하 씨에게 말하자, 그녀는 미어캣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런데……. 그래도 저는 결혼은 하고 싶어요.”

팀장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상사인 내게 주절주절 늘어놓는 백인하 씨. 나는 이 철부지 어린 여동생 같은 백인하 씨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웃어버렸다.


“결혼은 선택사항입니다.”

“알죠…….”

내가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녀가 조금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며 나는 제법 밤바람이 쌀쌀해진 날씨에 챙겨온 카디건을 입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회사원들에 끼어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띠띠띠띠.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오늘도 깔끔한 지서준의 오피스텔이었다.


“아. 피곤하다.”

나는 가장 먼저 오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산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게 행복이지.”

나는 탁자에 맥주 캔을 올려놓고 머리를 말아 올리곤 다시 맥주 캔을 들어 소파에 내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TV만 있으면 천국이겠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보너스 들어오면 TV 사서 놓을까? 지서준이 반대하겠지? 그냥 사 놓으면 포기할 거야.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한 나는 TV를 놓으려면 어디가 좋으려나 고민했다. 그때, 지서준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고 있던 맥주를 내려놓고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왔어?”

아마 내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다면 모터를 단 것처럼 윙윙 흔들어댔겠지.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지서준도 나를 보더니 싱긋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찍 왔네?”

“응.”

깔끔쟁이 지서준은 바로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나오더니 다시 내 손에 들려 있는 맥주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빈속에?”

“지금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어.”

“뭐라도 만들어줘?”

“간단하게 뭐 시켜 먹을까?”

“빨리 뭐 하나 만들어줄게.”

바로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뒤적이던 지서준이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지서준의 옆에 찰싹 붙어 눈을 반짝이며 구경했다.


 


“위험해.”

“옆에서 보고만 있을게.”

“내가 집중을 못 하잖아.”

천하의 지서준이 집중을 못 하겠다니. 어릴 적 싫다는 지서준을 데리고 야구장에 갔다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는 지서준을 보고 혀를 내둘렀던 적이 있었다.

그런 지서준이 집중을 못 하겠다니.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내 입술 위로 지서준 입술이 재빨리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야.”

“아쉬워도 참아라. 요즘 힘들었잖아. 먹을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지.”

“참기는, 뭘?”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지서준이 말했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거.”

 

**



“문 대리님!”

정찬형 연구원과 식사하기로 한 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정말로, 부대찌개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저 부대찌개 좋아합니다.”

조금 더 비싼 거 먹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다른 메뉴를 제안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가 추천했던 부대찌개 집으로 들어가니, 벌써 자리를 잡고 찌개가 끓기만을 기다리는 회사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모님. 부대찌개 2인분이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모님에게 경쾌한 목소리로 주문한 정찬형 연구원이 나에게 물었다.


“귀국한 회사원들은 다음 주에 복귀하나요?”

“네. 며칠 쉬고 나올 것 같아요.”

그가 수저통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꺼내 냅킨 위에 살포시 놓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저는 그때 그 나라 가서 나름 즐거웠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 연구원들은 끔찍했던 기억만 남았겠네요.”

다른 회사에 다닐 때,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했던 정찬형 씨는 오랫동안 호텔에 머물며 친해진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리고 이번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들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갈 때쯤, 맛있어 보이는 부대찌개가 나오고 휴대용 버너에 불을 켠 그가 날 보고 씩 웃었다.


“문 대리님이랑 식사하기 참 힘드네요.”

“네?”

“우연히 회사에서 마주친 날 기억하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좀 서운하다는 표정을 만들었다.


“대리님 몸 안 좋아 보이던 날…….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고, 그리고 약국에서도…….”

“아! 네.”

그래. 그랬었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날, 나는 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고, 우연히 본 그의 사원증에 이름을 보고 속으로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회사의 뜬소문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피곤한 인생인지……. 나는 마음 한구석에 짠한 마음이 생겼다.


“그날부터 우연히 자주 마주쳤잖아요. 우리.”

그의 말투에서 ‘우리’라는 말이 강조되었다.


“주위 다른 연구원님들도 문 대리님 성격 좋다고 칭찬도 많이 하시고……. 저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소문이 나는 바람에…….”

“아. 네…….”

그는 굉장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부대찌개를 국자로 저었다.


“다른 연구원님들이 저를 칭찬했나요? 굉장히 고맙네요.”

그의 말에서 내 칭찬이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섰다.


“하하. 네. 그리고 이번에 사건이 터지면서 문 대리님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직원들 구출 작전을 수행하는 것 보고 솔직히 감동했어요.”

“구출 작전이라니.”

뭔가 그럴싸한 단어에 괜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일이 생겨도 한국에서 이렇게 애써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구나. 생각했죠.”

그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더욱 쑥스러워져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 비행기 태워주시네요. 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 팀 모두 최선을 다했어요. 저도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내가 멋쩍은 마음에 하나로 묶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더욱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감동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 말을 남기고 적당하게 익은 부대찌개를 앞접시에 덜고는 내게 건넸다.


“아. 먼저 드세요.”

“아니죠. 여자분 먼저 드려야죠.”

정찬형 연구원이 본인의 앞접시에도 적당량을 덜기 시작했다. 지서준과 함께 오면 누가 소시지를 많이 가져가는지 꼼꼼히 따져보곤 했는데……. 갑자기 지서준의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뜬금없는 내 웃음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옷을 살펴보다 티슈를 몇 장 뽑아 얼굴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갑자기 친구가 생각나서요. 누가 조금이라도 맛있는 소시지를 많이 덜어가면 난리가 나거든요.”

“아……. 지서준 연구원님이 은근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군요.”

응? 내가 지서준이라고 말했었나?

너무나 당연하게 내 친구가 지서준이라고 단정 짓고 말하는 그를 보며 눈을 껌뻑이자 그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 지서준 연구원님이 그런가요?”

아. 넘겨짚은 거였구나.

같은 팀은 아니지만, 바이오 연구하는 팀에서 자주 볼지도 모르는데, 지서준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테이블 위로 사람이 만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늘은 정찬형 연구원인가 보네요?”

정말로 보기 싫었던 사람. 인사팀의 유나라 씨였다.


“어? 오랜만이네.”

정찬형 연구원도 유나라 씨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우연히 비상구에서 봤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연인 사이가 아닌, 그냥 단순한 친한 사이인 걸까.

그나저나, 오늘은 이라니. 오늘‘은’ 이라니! 그녀의 말에 있는 가시에 나는 눈을 부릅뜨지 않게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나에게 보였던 미소와는 180도 다른 그녀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턱이 벌어졌다. 그때.


“대리님.”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백인하 씨가 서 있었다.


“인하 씨?”

내가 의외의 조합에 유나라 씨와 백인하 씨를 번갈아 바라보자 난처한 표정의 백인하 씨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우, 우연히 앞에서 만나서요.”

내가 백인하 씨를 향해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번에는 유나라 씨가 말을 보탰다.


“아. 혼자 밥 먹으러 가는 모습 보고서 내가 함께 먹자고 했어요. 그렇죠?”

“네? 아. 네.”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백인하 씨.


“그래요?”

내 말에 예쁜 입술을 옆으로 늘리며 씩 웃는 유나라 씨였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저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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