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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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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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내 거야?
2023.01.18.
“아무래도 두 분이 좋은 시간 보내시는 것 같네요. 인하 씨. 우리는 다른 자리에 가서 앉죠?”
유나라 씨는 나와 정찬형 연구원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비어 있는 자리로 갔다.
“음……. 괜히 미안하네요.”
백인하 씨와 유나라 씨가 자리 잡은 곳을 흘끔 보던 그가 말했다. 표정도 살짝 굳어 있었다.
“뭐가요?”
“그러게요. 왜 제가 미안한 마음이 들까요?”
사람 좋은 웃음이 아닌, 상큼한 웃음이 아닌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내 쪽으로 반찬들을 밀었다.
“일단, 먹읍시다. 여기 엄청 맛있어요. 와봤을지도 모르지만.”
“아니요. 처음 왔어요. 제가 사는 거지만, 일단 잘 먹겠습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도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다시 본래의 웃음을 짓고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몇 입 먹었을까. 갑자기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물론이죠.”
그의 말에 나는 잠깐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유나라 씨랑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나라와는 대학교 때 알던 사이였습니다. 같은 동아리였는데, 시기가 잘 안 맞아서 친하진 못했어요. 같은 회사에 입사하면서 조금 더 친해진 거죠.”
“그렇구나.”
나는 부대찌개 소시지를 젓가락으로 집어들에 입에 쏙 넣고는 백인하 씨에게 무언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유나라 씨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럼 저도 뭐 하나 물어도 될까요?”
이번에는 정찬형 연구원이 물었다.
“네. 물론이죠.”
당차게 대답했지만, 나는 곧 내 대답을 후회했다.
“문 대리님은 연애 안 하세요?”
물어보지 말라고 할걸.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그, 뭐. 시간도 없고.”
나는 대답을 빙글빙글 돌리며 밥을 크게 떠 입에 물었다.
“그러시구나…….”
그가 내 대답에 실없이 웃으며 나와 같이 밥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는 본인이 사겠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에 지고 말았다. 그렇게 커피를 손에 들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
“문다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지서준? 점심 먹고 와?”
지서준이 오늘도 참 잘생겼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안녕하세요. 지 수석님.”
옆에 있던 정찬형 연구원이 인사를 하자 내게 보였던 미세한 일그러짐이 더욱 짙어졌다.
“네. 안녕하세요. 둘이 어디 다녀오나 봐요?”
같은 로고가 찍힌 커피 컵을 바라보더니 지서준이 물었다. 지서준의 물음에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정찬형 연구원이 대신 답을 했다.
“네. 같이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지서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도움받은 것이 있어 점심을 대접했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 아니…….”
금세 꽉 차버린 엘리베이터. 지서준은 타지 못했고, 나는 서서히 닫히는 틈으로 지서준의 표정을 보았다.
망했다.
사귄 후 알게 된 지서준의 질투. 나는 당장이라도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한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고, 좁디좁은 틈에서 바스락거리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정찬형 연구원이 내리고, 조금 뒤.
나는 내가 근무하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나는 잽싸게 내려 지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도 알지? 얼마 전에 4 연구팀이 출장 갔다가 내전이 생겨서 위험할 뻔한 거. 그때 정찬형 연구원이 도와줬어. 그래서.]
한참 열심히 문자를 쓰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퇴근 후, 집으로 와.]
지서준이었다.
그래. 문자보다는 얼굴 보고 설명하자.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쓰던 메시지를 지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근무하면서도 시간만 확인했다.
빨리 지서준의 얼굴을 보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6시가 되자마자 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문 대리. 오늘 급한 일 있어요?”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지금 나를 부른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좀 전에, 새로 플랜 들어온 게 있는데 좀 이상하네? 같이 봐줄 수 있나?”
역시……. 나는 챙기던 가방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네. 제가 보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지서준에게 조금 늦을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팀장님 자리로 달려갔다.
**
“으아. 화났겠지? 그렇겠지?”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불안한 마음에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장애물 피하기를 하듯 사람들 틈을 쉭쉭 오가며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가고 있었다.
8시가 넘어가는 시간.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오늘 일찍 퇴근해 오피스텔에서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친구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더군다나 오늘 낮에 정찬형 연구원과 밥을 먹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삐삐삐삑.’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나, 나왔어!”
나는 신발을 잽싸게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서준은 방금 씻었는지 머리에 수건을 올려놓은 채 슥슥 문지르고 있었다.
“씻었나 보네?”
내가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지서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손 씻어.”
“아. 응. 그래야지.”
지서준의 한마디에 용수철 튀어 오르듯 튀어 올라 욕실로 향했다. 물을 틀고 손에 비누를 묻혀 손을 이리저리 비볐다.
“많이 삐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손을 뽀득뽀득 닦고 나가니 책을 보고 있는 지서준.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책 보는 척하긴…….
머리를 감으면 바로 드라이어로 머리부터 말리는 놈이, 머리를 말리기는커녕 책을 본다고? 나는 웃음을 겨우 참고는 옆으로 가 앉았다.
“뭐 봐?”
“…….”
말없이 책을 덮고는 표지를 보여준다.
“어려운 책 읽네. 쉬운 책 좀 읽지. 그럼 나도 보고 얼마나 좋아.”
내 말에 답 없이 다시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른 페이지를 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오늘 정찬형 연구원이랑 밥 먹은 건…….”
옆에서 지서준이 움찔했다. 여전히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책을 읽고 있지만, 내 말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도 알지? 4 연구팀 아프리카로 출장 갔다가 내전 때문에 위험할 뻔한 거…….”
지서준이 나를 슬며시 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이 폐쇄되기 전에 안전하게 움직일 차가 필요했는데, 구하기가 좀 힘들었어. 근데 정찬형 연구원이 도와줬어.”
“그 사람이?”
“응. 우리 회사 오기 전에 그쪽으로 연구를 하러 갔었는데. 꽤 오래 있었나 봐. 그때 인맥으로 도와줬지 뭐야.”
“그런데 왜 같이 밥을 먹어?”
“아, 고맙다고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했는데, 점심같이 하는 거로…….”
“다른 팀원들은?”
“응?”
아마, 지서준은 단둘이 먹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만, 지서준의 말대로 팀원들과 함께 식사할 수도 있었던 자리였다.
아. 나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미안. 그것까진 생각 못 했어. 근데, 진짜로 그게 다야. 밥 먹으면서도 다른 건 없었어. 알지? 응?”
안 되겠다. 작전을 변경.
“각서 쓸까?”
“각서를 왜 써?”
“너 화났잖아. 다시는 다른 남자와 단둘이 식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쓸까? 어?”
나는 지서준을 보고 다시 싱긋 웃고는 빠른 몸짓으로 지서준의 책상으로 가 종이와 볼펜을 들고 소파 밑에 앉았다.
“각……서.”
나는 입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말하며 각서를 써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흰 종이가 내 앞에서 쑥 사라졌다.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가, 갑자기?”
“하.”
여전히 조금은 젖어 있는 머리를 마구마구 헝클었다.
“일하면서 동료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지. 그래. 맞아. 나도 그런 일이 왕왕 있으니까.”
그러더니 각서를 꼬깃꼬깃 접어 공처럼 둥글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는데……. 몰라. 그냥 화가 나.”
“질투쟁이.”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버린 지서준.
사귀고 난 후로는 정말이지 새로운 지서준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곤 했다. 그 모습이 좋기도, 설레기도, 귀엽기도 해 가슴이 간질거렸다.
테이블에 양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올려 지서준이 들어간 드레스룸 문을 보았다.
“어? 그건 설마!”
지서준이 들고나오는 백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내 거?”
나는 벌떡 일어나 가까이 확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나를 슥 지나쳐 다시 소파에 앉는 지서준. 명품 로고가 선명히 박힌 쇼핑백을 무심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그럼 네 거야?”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 쇼핑백도 번쩍번쩍하는 것 같아 눈이 부셨다.
“네 거야. 문문.”
꺅! 나는 내적 비명을 지르며 냉큼 쇼핑백을 집다가 문득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고민했다. 내 생일도 아니고……. 우리 만난 지 100일? 그건 모르겠고. 도대체 무슨 날이길래?
내가 쇼핑백을 든 채 열지도 않고 곰곰이 생각에 빠지자 지서준이 말했다.
“원래 주려고 했던 거야. 원래 사려던 건 품절이고, 나도 바쁘고 해서 그냥 직원이 추천해 준 걸로 샀어. 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나는 쇼핑백을 내려놓고 지서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왜, 왜 그래.”
“명품의 미음도 모르면서 이거 알아보고 다녔어?”
내가 지서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하자 간지러운지 웃으며 나를 떨어트렸다.
“그래. 엄마한테도 물어보고, 아는 연구원님한테도 물어보고, 백화점도 가보고.”
오늘따라 더욱 깊은 지서준의 눈을 들여보다 문득, 아줌마와 함께 놀러 갔을 때, 지서준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명품을 묻고 다녔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다시 냉큼 지서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 열어보고 그렇게 좋아해? 열어봤는데 네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
“아냐. 그럴 리 없어.”
“단언하지 말고. 빨리 열어봐.”
나는 지서준의 재촉에 지서준의 몸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쇼핑백에서 가방을 꺼냈다.
“엄청 마음에 들어!”
내 말에 피식 웃더니 가방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오늘 나 여기로 부른 거 이거 주려고 부른 거야?”
“응.”
“나는 또……. 엄청 화난 줄 알고.”
“짜증은 났어.”
나는 가방을 들고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다 지서준 말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사람. 너를 보는 눈빛 마음에 안 들어.”
“응? 무슨 눈빛? 에이. 아니야…….”
내 말에 콧방귀 뀌는 지서준.
“그 사람 너만큼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꽤 인기 있거든? 나를? 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절대 아니야.”
“인생에 절대란 없어.”
“아니야. 절. 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지서준에게 했던 장담이 얼마나 우스웠나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