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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트리케라톱스. (63/97)


63화. 트리케라톱스.
2023.02.05.


식사를 모두 마치고 식당을 나오기 전, 올리브유는 화장실에 갔고 지서준은 갑자기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최성주 씨를 흘끔거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고 그가 말했다.


“아, 그럼……. 예의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지서준의 여자친구로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이미 내가 할 질문을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올리브유, 아, 아니. 올리비아가 지서준 만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내 질문이 끝나자 더욱 여유로운 웃음을 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올리비아가 아니었다면 싫었겠죠? 음. 아마도 절대로 못 만나게 했을 것 같네요.”

마지막 말에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다시 미소를 만들었다.


“올리비아도, 서준이도 오래 봤습니다.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건 문다율 씨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지서준에게도 올리브유에도 로맨틱한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2년간 함께 했던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의 잣대로 두 사람을 보지 말아요. 문다율 씨의 기준, 지서준의 기준으로 세상을 봐요. 그래야 좀 더 행복할 것 같은데요.”

그러더니 가방을 뒤져 초콜릿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올리비아는 머리 아픈 고민 할 때마다 단 걸 찾더라고요. 그래서 가지고 다닙니다.”

이 초콜릿 포장지는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가방 안에서 나왔던 쓰레기 중 하나였다.


“고맙습니다.”

나는 초콜릿을 꺼내 입에 물었다.


“뭐야. 뭐 먹는 거야?”

지서준이 전화를 끝냈는지 식당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초콜릿.”

내가 빈 껍데기를 보여주며 말하는데 올리브유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 그거 내 건데!”

 

 

**

올리브유와 웨딩케이크를 만들기로 한 날. 도이라와 고주연은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웨딩케이크라니, 미친 거 아니냐며 펄쩍 뛰었지만, 이미 약속까지 한 상태여서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취소하려고 시도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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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어렵사리 올리브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율! 오랜만이에요. 나 지금 웨딩케이크 디자인 거의 다 뽑았는데 봐줄 수 있어요?


“아. 뭐. 그러죠."

 
너무도 티 없이 밝은 목소리. 얼마나 디자인에 공들였는지. 그리고 나와 함께 해서 얼마나 기쁜지를 나열하는 그녀에게 약속을 취소하고 싶다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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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연과 도이라의 말이 맞았다.

결국은, 올리브유에게 휘둘리고 마는 나였다. 더 황당한 것은 그렇게 휘둘리고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쳤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가도 뒤돌아볼 외모의 소유자, 그런 올리브유에게 지고 싶지 않아 안 꾸민 듯 엄청나게 꾸미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오늘 좀 괜찮은데?

요즘, 나름 마음고생했는지 뱃살이 조금, 아주 조금 들어갔다. 그래서 오랜만에 허리가 강조된 치마를 입었더니, 꽤 봐줄 만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냉큼 사진을 찍어 지서준에게 보내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다른 옷 없어?

예쁘다고는 못할망정, 다른 옷?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 막 입을 열었다.


-너무 예쁜데……. 다른 놈들이 쳐다보면 짜증 날 것 같은데? 그 웨딩케이크 만드는 수업, 너랑 올리비아만 듣는다고? 나도 가도 되나?

걱정스러운 말투로 우다다 쏟아내는 지서준. 지서준의 말에 금방 마음이 풀어져 나는 거울에 다시 몸을 비추며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네 눈에만 그런 거야.”

-아닌데.

말도 예쁘게 하는 놈.

나는 빨리 나가봐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기 전 몇 번이나 찾아오겠다고 하는 지서준을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올리브유와 만나기로 한 장소.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왔지만, 무슨 일인지 그녀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잘 찾아왔나 봐요?”

“다율! 네!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나를 발견한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편분이 데려다줬나 봐요.”

“어? 어떻게 알았지?”

나는 정말로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인 뒤 그녀와 함께 클래스가 진행될 건물로 들어갔다.


“선생님! 저 왔어요!”

그녀가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갔다.

가만, 수업받는 사람은 나와 올리브유 두 사람인데, 선생님도 둘이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며칠 혼자 와서 배웠다더니, 올리브유를 위해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수업은 꽤 재미있었다.

생각보다 올리브유는 차근차근 선생님의 지도하에 케이크 위에 장식해 나갔다.


“하하. 귀여운 공룡이네요.”

“토끼인데요?”

물론, 생각보다 잘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지, 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걸로 정말 결혼식 때 사용해도 되겠어요?”

그녀의 케이크 디자인은 그와 그녀 사이에 토끼가 총 3마리 올라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토끼는 미래의 아이들이라며 눈을 반짝이고 설명하는 올리브유.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트리케라톱스로 보인다는 것이다.


“트, 트리케라톱스가 어떻게 생긴 공룡이죠?”

내 말에 장갑을 벗어 핸드폰으로 트리케라톱스를 검색해본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라고요! 이건 토끼예요.”

그러나 핸드폰과 자신이 만든 공룡인지, 토끼인지 모를 것을 번갈아 보더니 금세 시무룩해지는 그녀였다.


“아. 뭐. 공룡 같은 아이들도 좋죠. 건강이 최고 아니겠어요? 하하. 건강해 보이네.”

내가 열심히 위로했다. 옆에 있던 선생님들도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조금 마음이 풀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선생님에게 혹시 자기가 디자인한 대로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냐 물었다.

아니. 그럼 왜 이걸 나와 만들고 있는 거지?

꼭 본인이 만든 케이크를 주장하던 그녀였다. 내가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보자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를. 나는 결국 그녀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가 만든 케이크는 잘 포장해 한 손에 하나씩 들고나왔다. 내가 만든 케이크는 그녀가, 그녀가 만든 케이크는 내가 갖기로 했다.


“오늘 너무 재밌었죠?”

우리는 근처 카페로 갔다. 그녀의 남편이 데리러 올 동안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편이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네. 그런데 정말 직접 만들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네.”

정말로 미련 없이 대답하는 그녀.


“그런데 왜 꼭 나랑 만들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말하자 멋쩍게 웃던 그녀가 내 옆에 놓인 본인이 만든 케이크를 흘끔 바라보았다.


“다율 씨랑 친해지고 싶은데, 다율 씨는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건…….”

“알아요. 내가 준 ex-girlfriend라서 그렇죠?”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관계를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어서……. 미안해요.”

“하.”

내가 한숨을 쉬자 그녀의 어깨가 더 쪼그라들었다.


“만약, 다율이 이 관계가 불편하다고 하면, 더는 푸시 하지 않을게요.”

“……편하지는 않아요.”

내 말에 쪼그라들었던 어깨가 땅으로 꺼지듯 축 처졌다.


“그냥, 그냥 천천히 해 보죠. 나는 사실, 지서준이랑 올리브유, 아, 아니 올리비아랑 그리고 남편분까지 다 이해가 가진 않아요. 내 사전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관계들이죠.”

“네…….”

“모든 관계를 정의할 수 없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일단은 천천히 알아 가는 거로 하죠.”

내 말에 축 처졌던 어깨가 확 올라가고 어깨도 펴졌다. 이렇게 겉과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와 있으면서 무시할 수 없는 과거가 있음에도 마음이 편했던 건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관심한 척, 고고한 척하면서 뒤로는 익명게시판에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킬킬대고 웃는 사람들.

그런 글을 보고 내가 지나갈 때마다 흘끔대며 수군거리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시달리다가 그녀와 함께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편했다. 아니 좋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현재 내 남자친구의 첫사랑이라는 것.

그래서 그녀에게 천천히 알아가 보자고 했다. 그렇게 알아가다 도저히 내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으면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이 관계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다율. 요즘 안 좋은 일 있어요?”

“왜요?”

“살이 빠졌어요.”

그녀는 자신의 볼을 홀쭉이 만들며 설명했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칭찬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작게,


“칭찬 아닌데……. 피부 탄력이…….”

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의 남편은 30분 뒤 그녀를 데리러 왔다. 함께 저녁이라도 하자는 그의 말에 지서준을 만나기로 했다며 거절하고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왔어?”

지서준이 현관에서 나를 반겼다. 나는 케이크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지서준 목에 매달렸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이 있어야만 안아주나?”

내 말에 나를 떼어놓고 나를 요리조리 살피던 지서준이 아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놓인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게 네가 만든 거야?”

“아니. 올리브유가.”

“걔 거를, 왜?”

대번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서준.


“바꿔서 가져가기로 했어. 맛은 괜찮아. 재료는 다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거고, 우리는 장식만.”

그 말에 안도한 그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커피 마실래?”

“응.”

커피를 내리고 케이크 상자를 열어본 지서준이 흠칫했다.


“공룡이야?”

역시 나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 것이다.


“아니.”

“얘는 도대체 뭘 만들고 싶었던 거래?”

진지하게 묻는 지서준의 말에 나는 크게 웃었다.

**

제법 쌀쌀해진 날씨.

얇은 코트를 꺼내든 나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장롱 냄새 안 나겠지?”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날씨에 미리 옷을 준비할 틈이 없어 그냥 바로 꺼냈더니 혹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쓰였지만, 마땅한 옷이 없어 그냥 입기로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회식 있어! 늦을지도 몰라요.”

“차 조심하고!”

늘 똑같은 출근길.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툼한 옷들을 꺼내입고 나왔다. 나는 목으로 들어오는 칼바람에 스카프라도 하고 나올 걸 그랬나 후회했다.

그렇게 잔뜩 웅크린 몸으로 회사에 도착했다.


“대리님. 오늘 무지 춥네요?”

백인하 씨는 중무장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렇게 입고 춥다고 하는 건 좀 반칙 아닌가?”

뒤따라오던 팀장님이 인하 씨를 보며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팀원들이 인사하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간 팀장님이 사무실 한 바퀴를 쭉 훑어보았다.


“오늘 회식은 인사팀이랑 같이하게 됐어요. 얼마 전 인사팀이 저희한테 신세 진 게 있죠? 그쪽 팀장이 오늘 톡톡히 갚는 다네요? 오랜만에 소고기 먹읍시다.”

“정말요? 와!”

백인하 씨가 소고기 소식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소고기. 나도 참 좋아하는데…….

인사팀과 먹는다니, 괜히 찜찜해졌다. 인사팀에는 유나라, 그 여자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리님. 우리 점심 조금만 먹을까요?”

나는 대책 없이 맑은 인하 씨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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